1 이름없음 2023/02/19 17:10:31 ID : o6qlu3Bhuli 0
너는 항상 그랬어
2 이름없음 2023/02/19 17:11:06 ID : o6qlu3Bhuli 0
중학교에서 다시 만난 넌 어릴 적 그대로더라. 매끈한 피부도 그렇고 살짝 부스스한 곱슬머리도 그랬어. 키는 여전히 컸고 호리호리해서 허리가 내 손으로 감길 것 같아.
3 이름없음 2023/02/19 17:11:17 ID : o6qlu3Bhuli 0
너는 반에 친한 친구가 없다며 내 반에 와서 놀았어. 서로에게 어릴 때의 기억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빠르게 친해졌어.
4 이름없음 2023/02/19 17:11:30 ID : o6qlu3Bhuli 0
너는 교복을 단정하게 입는 편이 아니었어. 마이까지 풀착장해야 마음이 놓였던 나는 네가 자유로워 보였던 것 같아.
5 이름없음 2023/02/19 17:11:42 ID : o6qlu3Bhuli 0
여름에도 생활복 대신 와이셔츠에 치마, 검은색 덧신을 신던 너는 덥지 않냐는 질문에 춥다는 말을 했어. 시간이 흘러도 너는 반에 있기 싫다며 우리 반에 와서 친구들을 만들었지. 공부를 안 하던 너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처럼 치켜세워줬어.
6 이름없음 2023/02/19 17:12:00 ID : o6qlu3Bhuli 0
난 살짝 우쭐해진 기분으로 네 손을 잡고 수다를 떨었어. 네 손은 내 손과 다르게 길고 예쁘더라. 손조차도 주인을 닮아가나봐.
7 이름없음 2023/02/19 17:12:11 ID : o6qlu3Bhuli 0
너는 수업시간에 계속 자는 애였어. 수업이 끝나고 찾아가면 잠들어 있어서 흔들어도 잘 깨지 않았지. 나는 그런 너를 붙잡고 밤에 잠들라는 말을 했어. 무책임하게 말이야.
8 이름없음 2023/02/19 17:12:29 ID : o6qlu3Bhuli 0
어느날 너는 내게 작은 약상자를 하나 내밀었어.
9 이름없음 2023/02/19 17:12:42 ID : o6qlu3Bhuli 0
수면 유도제
10 이름없음 2023/02/19 17:12:56 ID : o6qlu3Bhuli 0
그렇게 적혀있었어. 약국에서 4~5개를 한꺼번에 샀다고 했어. 밤에는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그래서 먹는 거라고 했어.
11 이름없음 2023/02/19 17:13:10 ID : o6qlu3Bhuli 0
나는 또 멍청하게 아침에 자니까 잠이 안 오는게 아니냐고 물었어. 너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어. 악몽을 꾼다고 했어. 이젠 약도 잘 안 들어서 2알을 한꺼번에 먹어도 잠이 오는 걸 버틸 수 있다고 했어.
12 이름없음 2023/02/19 17:13:19 ID : o6qlu3Bhuli 0
어느날 너는 내 귀에 대고 고백 계획을 속삭였어. 내가 중학교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사귄 남사친이었어. 나는 몰랐어. 그 애가 네 악몽에 중심에 서 있는 동시에 유일하게 숨쉴 수 있게 만드는 애란 걸.
13 이름없음 2023/02/19 17:13:38 ID : o6qlu3Bhuli 0
그 남자애는 초등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해. 너는 그 애랑 사귀고 나서부터 괴롭힘을 당했고. 남자애는 괴롭힘 당하는 너를 지켜보느니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다고, 너한테 첫 번째로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고 했지.
14 이름없음 2023/02/19 17:14:19 ID : o6qlu3Bhuli 0
너무 순수했지. 그렇게 사라질 괴롭힘이었으면 시작도 안 했을 거야. 재회 후부턴 서로가 서로에게 지쳐가는 시기였나봐. 다시 헤어지고 세 번째. 다시 또 갈라서고.
15 이름없음 2023/02/19 17:14:41 ID : o6qlu3Bhuli 0
너는 그 애를 많이 좋아했어. 아마 지금도 못 잊고 있을거야.
16 이름없음 2023/02/19 17:14:52 ID : o6qlu3Bhuli 0
너는 내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어. 난 있다고 했어. 너는 눈이 반짝이며 캐묻기 시작했어. 나는 내가 좋다고 답했지. 너는 아쉬워하며 연애 좀 해, 라며 투덜댔어. 나는 사람한테 빨리 질리는 편이라 그런 거 못해. 라고 대꾸했어. 너는 잠시 생각하다 그럼 나는 안 질려? 라고 물었어.
17 이름없음 2023/02/19 17:15:08 ID : o6qlu3Bhuli 0
나는 조금 충격받았어. 사실 나는 죽고 못 살던, 6학년때의 친구와 여전히 좋은 사이였지만 질려가고 있었거든. 나는 어릴 적부터 그 흔한 애착인형, 애착 이불이 없었어. 정은 많았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뭘 해도 금방 질리는 사람이었어.
18 이름없음 2023/02/19 17:15:29 ID : o6qlu3Bhuli 0
너는 안 질려. 라고 짧게 대답한 후 생각을 좀 했어. 너는 왜 질리지 않을까. 답은 금방 나왔어. 너는 내게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았어. 마치 아무런 기대도 없다는 듯.
19 이름없음 2023/02/19 17:15:47 ID : o6qlu3Bhuli 0
너는 그 남자애한테 고백했지만 좋은 결과는 아니였어. 네가 처음으로 울먹였던 것 같아. 너는 내게 말했어. 자기 반에는 초등학교에서 같이 온 애들이 많다고. 그래서 숨이 막힌다고. 나는 네 등을 토닥이거나 꽉 안아주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어.
20 이름없음 2023/02/19 17:15:59 ID : o6qlu3Bhuli 0
여름방학, 겨울방학이 지나고 우리는 2학년이 됐어. 시험을 치는 학년이었지만 난 첫번째 시험을 완벽하게 말아먹었지. 눈이 안 떠질 정도로 우는데 솔직히 후회 좀 했어. 작작 울걸...
21 이름없음 2023/02/19 17:16:18 ID : o6qlu3Bhuli 0
너는 시험지를 보지도 않고 엎드려 자서 역사 선생님을 경악하게 만들었어. 나는 공부 좀 해, 라며 네게 말했어. 그러나 멘탈이 아작난 채로 중학교 1년을 날린 애가 어떻게 2학년 과정을 따라가겠어. 나는 너를 붙잡고 수학 공부를 시켰어. 네가 그나마 좋아하는 과목이었거든.
22 이름없음 2023/02/19 17:16:48 ID : o6qlu3Bhuli 0
수학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야. 근데 그때는 자신있는 단원이기도 하고 네가 열심히 해서 그런지 재밌더라고. 2학기 기말에서 나는 한 문제를 실수해서 5점을 날려먹었지만 A를 맞았고 너는 81점을 맞았어. 매일 10점, 20점대던 네가 시험을 치고 애처럼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교대를 갈까 고민도 했지.
23 이름없음 2023/02/19 17:17:01 ID : o6qlu3Bhuli 0
나는 시험 친 이후로 이렇게 계속 맞춰나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어. 내 착각이었어. 너는 생각보다 많이 아팠어. 수면 유도제를 먹으면 죽는 줄 알았던 열세 살이 2알씩 먹어도 약을 견딜 수 있는 열네 살이 될 때까지 얼마나 아파야 했는지 나는 몰랐어.
24 이름없음 2023/02/19 17:17:19 ID : o6qlu3Bhuli 0
너는 농구 교내대회 때 내 체육복 겉옷을 빌렸어. 그날은 유일하게 네가 반팔을 입은 날이었고, 네 체육복은 없었고, 네 손목의 상처는 너무 정직했거든. 나는 후시딘을 직접 발라 본 적이 없어서 치료할 때 후시딘 튜브를 너무 세게 눌러 엄청나게 많이 나왔던 기억이 나.
25 이름없음 2023/02/19 17:20:17 ID : o6qlu3Bhuli 0
알콜솜으로 상처를 닦아나고 면봉으로 약을 바른 뒤 반창고를 붙이는 널 쳐다봤어. 얼마나 아파야 그렇게 익숙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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