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4/10/20 01:29:14 ID : wK2KY7eZeJP 2
첫 살인 이후의 하늘은 변함없이 쾌청하고. 그래서 하나는 신을 믿지 않기로 했다.
2 이름없음 2024/10/20 01:37:36 ID : wK2KY7eZeJP 0
범국가적 재난이었다. 신약 개발로 흥하던 기업 짓이랬나. 원인이야 팔자 좋을 때나 따져 묻는 거고. 세상이 대번에 기구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고가의 향수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던 시대에 사방이 살 썩는 악취만 풍기게 됐다. 꼬라지 좀 보라지. 골프에 열광한다던 체육 교사의 소문이 진짜인지 체육실에서 발견한 골프채는 성능이 훌륭했다. 다만 이런 식으로 내구도 테스트를 하고 싶진 않았는데. 하나가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3 이름없음 2024/10/20 01:42:54 ID : wK2KY7eZeJP 0
뒤통수가 으깨진 저 얼굴을 안다. 마주친 적 있는 행정실 사무관이었다. 끝이 조금 처진 눈꼬리가 단아했다. 살아 있는 시체가 된 이후로 그렇게 보인 적 없을 테지만. 재난의 근원지는 하필 산골짜기에 위치한 이 학교와 밀접했다. 모두가 역병의 사실도 모른 채 똑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기숙사에서 나온 학생들을 덮친 건 이미 좀비가 된 교직원이었다.
4 이름없음 2024/10/20 01:48:00 ID : wK2KY7eZeJP 0
"하나야." 마찰음을 내며 미닫이문이 열렸다. 익히 아는 음성이었다. 뺨에 기다란 자상을 단 지수였다. 무구한 눈동자가 시체를 향해 소리 없이 굴렀다.
5 이름없음 2024/10/20 01:53:32 ID : wK2KY7eZeJP 0
"... 야, 보지 마." "안 다쳤어?" "어. 멀쩡해. 들어간다." 살인은 하나가 했는데 지수 꼴이 너덜거렸다. 세로로 찢긴 하복 치마가 직전의 몸싸움을 연상시켰다. 하나는 각종 도구로 문에 바리케이트를 쌓았다. 보건실에 난입하는 불청객을 다시 마주치긴 싫었다.
6 이름없음 2024/10/20 01:59:37 ID : wK2KY7eZeJP 0
"좀비보다 사람이 무서운 것 같아." 지수가 낮게 속삭였다. 하나도 내심 동의했다. 둘이 보건실에 도착한 무렵이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약을 원하는 무리가 뒤늦게 나타났다. 격앙된 다툼은 소음을 유발했다. 복도 너머에서 사무관의 시체가 절뚝이며 달려왔다.
7 이름없음 2024/10/20 02:07:17 ID : wK2KY7eZeJP 0
보건실을 점거하지 못한 무리는 저편으로 달아났다. 조소의 빛을 만면에 띄운 채로. 잘 뒤져라 내지 좆 돼 봐라의 함의라 추측한다. 드럼으로 단련된 하나의 팔 힘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어쨌든 첫 살인이었다. 정확하고 날렵하게 가격하긴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을 생각보다 강인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살아 있으면 좋겠다." "그 새끼들?" "다 죽는 것보단 낫잖아." "넌 칼에 그여 놓고 그런 말이 나오냐?" "너 혼자 고생시켜서 미안." "어차피 겪어야 할 거였어."
8 이름없음 2024/10/20 02:15:54 ID : wK2KY7eZeJP 0
지수에게는 문 닫고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변변한 무기도 힘도 없었으므로. 복도 창문에 끈적한 피가 튀었다. 칠월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안 보였다. 줄지어 보이는 아파트와 건물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됐을까. 영혼 없이 교직원의 머리만 죽어라 팼다. 영화나 소설에서 타점의 묘사를 본 덕이 컸다. 힘을 너무 준 탓에 손이 덜덜 떨렸다. 하나는 보건실 침대에 던져지듯 누웠다. 세상이 이 꼴인지도 일주일이 됐다. 재난지가 비단 학교만이 아니라 단언하는 까닭은 구조대의 여부였다. 창문 너머 시가지에서 이따금 큰 연기가 솟기도 했다. 헬기가 몇 번 왔지만 그게 다였다. 고공에서 움직이던 헬기는 어디에도 착륙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쩌라고. 드러누워 잠이나 자고 싶었다. 생각 없이 드럼 치던 때가 눈물 나게 그리웠다.
9 이름없음 2024/10/20 02:21:05 ID : wK2KY7eZeJP 0
"하나야. 손." 지수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엔 포비돈이 들려 있었다. 손은 왜. 눈짓으로 의문하니 냅다 하나의 손을 제 쪽으로 당겼다. 포비돈을 적신 막대가 끌려간 손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까졌잖아." "아." "무서웠지. 미안해."
10 이름없음 2024/10/20 02:32:17 ID : wK2KY7eZeJP 0
손바닥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다. 어쩐지 욱신댄다 싶었다. 골프채를 세게 쥔 탓인가. 하나는 시선을 내린 지수의 얼굴을 봤다. 답지 않게 고요하고 음울했다. 윤지수의 포지션은 일렉이다. 참 적성 잘 찾는다 싶게 시종일관 존재감이 강렬하고 밝았다. 그런 애가 이런 표정을 하게 한 세상이 문제다. 하나는 지수에게서 포비돈 막대를 빼앗아 들었다. 무리 중 한 놈이 커터칼을 갖고 있었다. 몸싸움 도중 지수의 뺨에 대고 그은 듯했다. 좆같은 새끼. 물방울 표면에 접촉하듯 상처를 살살 문질렀다. 쓰라린지 지수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네 상처가 더 큰데 누굴 걱정해." "그래도." "한 번만 더 속 터지는 소리 하면 세게 누른다."
11 이름없음 2024/10/20 02:49:35 ID : wK2KY7eZeJP 0
죽어도 안 그럴 걸 알아서 웃음이 샜다. 말로만 협박하는 건 하나의 오랜 버릇이었다. 지수는 그걸 알았다. 하나가 자신에게 필사적이라는 것 또한. 재난은 아이러니하게도 축제 날 고개를 치들었다. 지수는 새벽부터 오 층의 밴드부실에 처박혀 있었다. 등교 시간까지 앰프 소리 낮추고 일렉만 쳐 댔다. 밴드부실을 나선 건 첫 종이 친 직후였다. 교내가 기묘하게 조용했다. 걸음마다 불길함이 이끼처럼 끼었다. 꿈자리가 편치 않았던 탓인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벽면에 즐비한 축제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삼 층에 다다랐을 때였다. 같은 위치의 포스터를 스치듯 봤다. 피가 선명하고 크게 튀어 있었다.
12 이름없음 2024/10/20 03:00:14 ID : wK2KY7eZeJP 0
인지한 순간이었다. 거센 악력이 손목을 낚아챘다. 비명을 지를 새 없이 입도 막혔다. 크게 뜨인 눈을 굴려 손의 주인을 식별했다. 하나였다. 그런 얼굴은 처음 봤다. 시종일관 고요하고 나른한 애였다. 드럼 칠 때나 눈에 생기가 돌던 걸로 알았다. 하나는 태초의 절망을 짊어진 듯 절박한 신음을 토해 냈다. 가까이 마주한 얼굴에 피가 튀어 있었다. - 찾았다.... 윤지수.
13 이름없음 2024/10/20 03:12:27 ID : wK2KY7eZeJP 0
웃기게도 그 말에 모든 상황을 기꺼이 이해했다. 붙잡힌 손목에 순순히 응한 채 밴드부실로 돌아왔다. 지수는 밴드부 몇의 이름을 나열했다. 보컬과 베이스와 서브 기타 누구.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 다 죽었어. - ....... 거짓말. - 너 찾고 있었어. 안 보이길래. 모르는 사이에 걔네랑 똑같이 됐나 싶어서. 근데 아닌 것 같았거든. 그냥 감이었어. 그러다 삼 층 복도에서 찾았을 때.... 하나의 설명은 조리와 두서가 없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현실감이 소름 끼치게 와닿았으므로. 하나는 손목을 쥔 힘을 풀지 않았다. 유일한 온기인 듯 뗄 생각조차 안 했다. 허리께까지 오는 흑발이 하나의 정신을 대변하듯 헝클어져 있었다. 지수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하나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14 이름없음 2024/10/20 03:23:24 ID : wK2KY7eZeJP 0
다 죽고 너 하나 남았어. 나한테는 이제.... .... 응. 같이 있어 줘.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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