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5/02/17 15:07:37 ID : teMi8rzdVcF 2
그는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공기를 가르며 나아가던 주먹 끝에선 강한 파열음이 터지듯 뿜어져나왔다. 펑- 동그랗게 모이던 무형의 힘이 빛을 발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기분좋은 바람이 되어 남자의 몸 사이사이를 스쳐지나갔다. "...힘들군." 비록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지만 호흡이 가빴다. 아주 잠깐의 고된 훈련. 과거였다면 짧은 휴식으로 금방 회복했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노쇠한 육신 탓인지 최근엔 뭔가를 더 하고 싶어도 멈춰야하는 일이 잦았다.
2 이름없음 2025/02/17 15:27:27 ID : teMi8rzdVcF 0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숨을 골랐지만 가빠진 호흡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쯧. 늙었구만." 어쩔 수 없이 훈련을 마친 그는 바닥에 앉아 벽에 기대었다. 차가운 콘크리트의 감촉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운동이 끝난 직후에는 이것만큼 기분 좋은 것이 없었다. 잠깐의 쾌락을 만끽하던 그는 이내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아직도 보고있는게냐?" 그가 바라본 장소엔 인간 한 명이 겨우 지나다닐만한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려있었다. 구멍은 두꺼운 유리벽으로 막혀있었고 벽 너머엔 누군가 서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노인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3 이름없음 2025/02/17 15:34:44 ID : teMi8rzdVcF 0
잠시 뒤, 노인의 귀에 속삭이듯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일반인이라면 크게 놀라거나 어쩌면 기절했을지도 모르지만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고막이 울리는 듯한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 노인은 유리벽 앞으로 가 오른쪽 벽면을 손으로 짚었다. 그러자 벽이 위아래로 나뉘어지며 한 남자가 방으로 걸어들어왔다. "들여보내줘서 고맙군." "나도 궁금해서 말이지. 자넨 여길 올 이유가 없잖은가." 노인은 한 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며 남자의 행색을 살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잘 차려입은 듯 보였지만 정장 곳곳엔 흙먼지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소매 끝에 묻어있는 검붉은 자국. "이번엔 또 누굴 죽인겐가?"
4 이름없음 2025/02/17 15:42:48 ID : teMi8rzdVcF 0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노인은 그것이 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붉은 빛을 띌 만한 건 생명체의 피 뿐이였으니 말이다. "오는길에 습격이 있었지. 어린애 한 명을 죽였어." "별로 달가운 경험은 아니였겠구만."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이는 아이가 죽었기 때문도, 남자가 안 좋은 경험을 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근처의 주민 한 명이 죽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아주 잘 알고있었다. "자네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알겠구만." 그 말에 남자는 자신이 가져온 가방을 노인에게 건넸다. "급하게 챙겨왔네. 다른 이들은 이미 전부 출발했더군."
5 이름없음 2025/02/17 15:52:46 ID : teMi8rzdVcF 0
노인은 가방을 받아들었다. 오래되어 곳곳을 기워낸 가방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자수로 세겨져있었다. 딜런. 이제는 거의 잊혀진 노인의 이름이었다. 자수를 손으로 쓸어내리던 딜런은 남자의 재촉에 가방을 등에 매고 방을 나섰다. 유리벽 너머로 나가자 앞으로 쭉 뻗은 일자형 통로가 보였다. 통로는 명확한 광원은 보이지 않았으나 은은한 빛이 곳곳에서 뿜어져나왔다. 그 덕에 시력이 좋은 노인은 꽤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
6 이름없음 2025/02/18 02:53:37 ID : teMi8rzdVcF 0
"벌써 꽤 멀어졌네. 우리도 서두르는게 좋겠어." 노인의 눈에는 저 멀리서 뛰어가는 여러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각자 짐을 한아름 챙겨들곤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노인의 시력에 감탄하며 물었다. "쫓아가는건가?" "아닐세. 우린 더 빠른 길로 가야될거야." 딜런은 가방을 뒤적여 날카로운 금속 조각을 집어들었다. 평범한 쇠막대를 갈아내어 만든 도구는 조잡하지만 펜과 같은 모양새였다. "잠시 기다리게." 그는 펜의 끝을 왼쪽 팔목에 가져다댔다. 곧이어 빠른 손놀림으로 자신의 피부를 가르며 문양을 세겨나갔다. 이내 원시족의 문신과 같은 것이 그의 팔에 세겨졌다. 팔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으나 노인은 개의치 않고 그 팔로 벽을 짚었다. 끼긱- 끽- 흘러내리던 혈액이 응고되어 벽을 긁었다. 듣기 거슬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준비하게. 곧 뛰어야될테니." 도화지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핏덩어리는 벽에 자국을 남기며 일자로 뻗어나갔다. 남자와 노인은 그것을 따라 분주히 발을 움직였다.
7 이름없음 2025/02/18 03:16:17 ID : teMi8rzdVcF 0
· · · · · · 한참이 지난 뒤, 노인의 피가 움직임을 멈췄다. 작아진 핏덩어리는 자신의 주인을 찾아 그의 팔로 다시 스며들었다. 비록 충분한 양은 아니였지만 왼팔의 출혈을 멎게 하기엔 충분했다. "이곳일세." 노인은 왼팔을 한 번 쥐었다 펴보곤 벽에 손을 얹었다. 그곳엔 아까와 같은 유리벽이 있었으나 그 너머의 풍경은 전과는 사뭇 달랐다. 개봉된 통로를 지나자 삭막하기 그지없던 복도와는 다른 녹색 숲이 펼쳐졌다. "빨리 들어가세. 곧 있으면 시작할 것 같으니 말이야." 남자는 조용히 노인의 뒤를 따랐다. 숲은 고요하고 평안한 곳이었다. 적어도 복도의 비명으로 사방이 시끄러워지기 전 까진 그랬다. -끄아아악! 첫번째 비명이 들려왔다. 이어서 두번째, 세번째 희생자도 비명을 내질렀다. 대피할 장소를 찾지 못한 이들은 대부분 저런 최후를 맞는다. 그것이 이곳, 이면세계의 규칙이었다.
8 이름없음 2025/02/18 03:20:59 ID : teMi8rzdVcF 0
"···미친. 몇 명이 죽은거지?" "적어도 100명은 될걸세."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아는가?" 그러자 딜런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오는 길에 마주친 죄수의 수를 세어두었네. 딱 100명이였지." "X병. 많이도 죽었구만."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죽어갈지 노인과 남자는 정확히 알고있었다. 우선 전신의 혈액이 끓어오를 것이다. 그리고 온 몸에 화상을 입고 죽어가겠지. 그래도 이 정도면 호상이라 할 수 있겠다. 적어도 고통이 길게가지는 않을테니···.
9 이름없음 2025/04/03 07:02:59 ID : teMi8rzdVcF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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