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18/09/01 14:59:57 ID : 4Hvcq0tvxwm 0
그렇게 극적이고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뭔가 묘한 느낌이 있었어 그래서 잊고 싶지 않으니까 늘 잊을 무렵이 되면 사이트나 블로그, 친구들한테 얘기한다던가...그런 식으로 계속 떠올려. 내 얘기 들어줄래 레더들?
2 이름없음 2018/09/01 15:00:59 ID : 4Hvcq0tvxwm 0
나는 이따금씩 가위에 눌렸어. 아주 어릴 때는 그냥 단순하게 뭔가 쫓아온다던가, 무서운 만화를 보고 잤을 때 그게 꿈에 나온다던가 하는 거였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인가 중학교때부터는 가위가 눌리는 꿈이 한정되어있었어.
3 이름없음 2018/09/01 15:04:27 ID : 4Hvcq0tvxwm 0
무슨 내용의 꿈이었냐 하면, 아무것도 없어. 진짜 아무것도 없는 꿈이야.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가 쓴 등산 경험 에세이 중에서, 너무 높은 산에 올랐을 때에 강한 기압 때문에(맞나?) 귀가 꾹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던 얘기가 있었거든? 우리는 평소에 아무리 조용하다 느껴도 무수한 잡음 안에서 사는 거였다고, 그게 막히는 순간 그사람이 딱 든 생각이 '아, 이 적막이 미치도록 시끄럽다.'하는 거였대. 내가 저 꿈을 안 꾸게 된 이후에 본 에세이였지만 읽자마자 바로 그때 그 꿈을 기억해냈지.
4 이름없음 2018/09/01 15:05:55 ID : 4Hvcq0tvxwm 0
검었어. 우리가 눈을 꽉 감으면 찾아오는 어둠만큼. 그것도 어느 정도는 빛이 들어올텐데, 그게 아니라 정말 그냥 순수한 검은 색이 내 주변에 있었고, 나는 나를 3인칭으로 바라보고 있었어(감정은 내 눈에 보이는 나와 같이 움직였지만 시점만 3인칭이었어)
5 이름없음 2018/09/01 15:06:43 ID : 4Hvcq0tvxwm 0
왜 어둡다가 아니라 검었다냐면, 그 중에서도 나는 선명하게 보였거든. 자체발광 정도는 아니고 그냥 실내 불빛 정도의 불 아래에 선 나를 뚝 떼어다 거기 둔 것처럼.
6 이름없음 2018/09/01 15:08:29 ID : 4Hvcq0tvxwm 0
내가 잠에 들었을 때 그 꿈을 꾸기 시작하면, 나는 그 공간(편의상 이렇게 부를게)에서 눈을 뜨는 걸로 시작했어. 누워서 뜰 때도 있었고, 서서 뜰 때도 있었고, 공중에 뜬 채로 눈을 뜰 때도 있었지. 한번 눈을 뜨면 그대로 가만히 있었어. 그냥 정말 잠에 덜 깬듯, 멍하니 주변을 잠깐 보는데 이때 내 주변이 검다는것도 알았지.
7 이름없음 2018/09/01 21:34:55 ID : BwLcMkranzO 0
(미안해 스레주야 학원갔다오느라...) 문제는 그때부터였어. 편의상 공간이라고 하긴 했지만 거긴 공중이나 허공이라는 말로도 표현 못 할 그냥 그저 아무 것도 없는 세계였거든. 그걸 인식하는 순간부터 나는 미칠 것 같은 경험을 차례차례 해.
8 이름없음 2018/09/01 21:37:55 ID : BwLcMkranzO 0
어떨 때는 그 검은색들이 나를 감싸는것 같은 감각을 느끼면서 몸이 졸리는 것 같고 숨이 막혔어. 내 모습이 가려지지는 않아, 그냥 밖에서 외곽선을 어그러뜨리려는 그런 느낌...그리고 어떨 때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뚝 하고 하염없이 아래로 떨어지거나 했고. 또 어떨 때는 신체적인 이상은 없이 소리를 질러 보기도 했는데 내 귀에도 아무 소리가 안 들리고 어딘가로 소리가 닿지도 않았어. 그게 미치도록 불안했던것 같아.
9 이름없음 2018/09/01 21:40:25 ID : BwLcMkranzO 0
그런 꿈을 매일까지는 아니고 어떨 때는 한 주에 몇 번, 그러다 몇 달 걸러, 그러다 몇 주, 이런 식으로 불규칙하게 꾸었어. 나는 그 꿈을 꿀 때마다 나 외의 다른 어떤 것도 그 세계에선 본 적이 없고, 어떤 소리도 그 외 아무것도 보고 듣고 느낀 적이 없어. 나는 그 때 왕따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게 힘들게 와닿았는지도 몰라. 눈만 뜨면 현실에는 부모님도 오빠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내 방도 있었는데, 꿈에만 들어가면 미친듯이 외로웠고, 외로운 게 두렵기까지 했어.
10 이름없음 2018/09/01 21:44:14 ID : BwLcMkranzO 0
그러다 어느 날 같은 꿈을 꾸었어. 그 공간에서 멍하니 눈을 뜬 나는 드물게도 '이번에도 미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왜 이렇게 적냐면, 꿈에서 내 시야에 보이던 '나'는 내게 감각과 감정밖에 전달하지 않았어. 생각이나 소리 같은 건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고. (아까 소리가 들리지도 닿지도 않아서 불안했다고 한 거 말인데, 그쪽에서는 어땠는지 '생각'이 들어오진 않았어. 하지만 내가 보는 나->나를 보는 나 방향 뿐만이 아니라 나를 보는 나->내가 보는 나 쪽으로도 감정이 전달되는 것 같았지)
11 이름없음 2018/09/01 21:45:43 ID : BwLcMkranzO 0
그래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냐면, 무척 절망스러웠거든. 그 전까진 그냥 번번히 모든 때가 처음인것마냥 놀라거나 당황스러워하다 깨어났는데, 그건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고, 사실 그 당시에는 그 감정이 뭐였는지도 잘 몰랐어. 이걸 쓰는 지금 되새겨보니 굉장히 절망해서 자포자기 한 듯 했어.
12 이름없음 2018/09/01 21:48:01 ID : BwLcMkranzO 0
그랬는데 시야가 바뀌면서 지금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무언가'가 보였어. 사람이야. 어두운 옷에 어두운 망토를 후드까지 깊숙히도 덮어쓰고 있었고, 장갑을 끼고 있지는 않았지만 맨살이 살색으로도 무슨 색으로도 보이지는 않았어. 얼굴도 마찬가지. 주변이 그저 '검은'거였다면 그 사람은 뭔가...어느 광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알아볼 수 없도록 '어두웠'어.
13 이름없음 2018/09/01 21:50:02 ID : BwLcMkranzO 0
그 세계 안의 나를 3인칭으로 보고 있는 내게는 미리 보였지만, 내게 보이는 나는 그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기 전까지 모르다가 뒤에서 인기척이라는 걸 느끼고 그사람을 올려다봤고, 그 때 순간, 내가 보던 나와 나를 보던 내가 같아졌어. 그 사람 앞에 선 나의 시점으로 그 사람을 올려다 봤어.
14 이름없음 2018/09/01 21:51:30 ID : BwLcMkranzO 0
얼굴은 여전히 안 보였어. 만화같은 데서 보이면 안 되는 인물의 얼굴을 부자연스럽게 검게 하듯이. 그렇지만 턱선 한 구석은 약간 살 색이 비친 것 같았지. 빛도 없는데 비쳤다니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랬어...그리고 묘하게,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인상이 기억에 남았어.
15 이름없음 2018/09/01 21:53:22 ID : BwLcMkranzO 0
미형에 오똑한 콧선, 약간 튀어나왔지만 찡그리지는 않은 미간, 다소 야윈 듯한 뺨과 턱선...그렇지만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은, 한 20대 중후에서 많아도 30대 초밖에 안 될 정도의 사람. 그런데 키가 무척 컸어. 그 때의 나보다 머리 하나는 컸지. 나도 160대라서 작은 건 아니었지만...
16 이름없음 2018/09/01 21:56:57 ID : BwLcMkranzO 0
그러고는 다시 내가 둘로 분리되어 버렸어. '내'가 입을 열자마자 그걸 못 듣게라도 하려는 것처럼, 또 내 눈에는 무어라 말을 하는 내 모습밖에 안 보였어. 그 사람에게 뭔가 말을 하고 있었지. 나는 그 모습이 좀 신기했어. 이 때는 내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으면서, 입 자체를 열질 않을 때 였거든. 막힘없이 뭐라고 하는 내 모습이 생소하다고 생각하는데, 내 눈에 보이는 나는 점점 억울하거나 화난 표정이 되다가 눈물을 뚝뚝 흘렸지.
17 이름없음 2018/09/01 21:58:46 ID : BwLcMkranzO 0
그랬더니 아까 그 남자가 손을 들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어. 막 문질렀다기보단 그냥 툭 하고 머리 위에 얹어 놨지. 내 얼굴이 보이고, 남자의 등이 보이는 시야각에서 오른쪽 뒤부터, 검은 색이 아니라 흰색으로 갑자기 세계가 덮여오는거야. 진부해 보일지는 몰라도 정말로.
18 이름없음 2018/09/01 22:00:32 ID : BwLcMkranzO 0
그 사람의 어두운 색 의복 차림은 흰색을 주위에 두고 있으니 더 눈에 띄었어. 그리고 문득 생각이 들었지. 바닥도 천장도 벽도 없는 공간에서, 그 사람이 나타났을때부터 나와 그 사람은 바닥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못 들었으니 모르겠어. 나의 시야는 처음 얼굴을 봤을 때 이후로는 그 사람의 앞을 본 적이 없거든...등만 보였지.
19 이름없음 2018/09/01 22:04:03 ID : BwLcMkranzO 0
아무튼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몇 초 가만히 (내 눈에 보이는) 나를 보고 서 있다가, 뒤돌아서서 옆쪽으로(아까 설명한 시야대로라면 오른쪽 대각선 앞쪽 쯤)가버렸어. 내 눈에 보이는 나는 그 사람의 등에다 대고 뭐라고 한 것 같지만, 한번 눈을 깜빡이고 다시 떴을 땐 현실의 내 방, 아침이었고...난 가위에 눌리지 않았어.
20 이름없음 2018/09/01 22:06:08 ID : BwLcMkranzO 0
오히려 그날은 왠지 더 개운한 것 같았지. 분명 기분 좋을 일이 생긴 것도 아니고, 생길 것도 아니었고(내 과거 이야기니까) 원래부터 잠이 많으니 아침은 고역이라 알람도 못 듣고 계속 잠을 자는데 그날따라 알람이 울리긴 커녕 그 전에 일어났는데도 나는 멀쩡하거나 그 이상으로 상태가 좋았지. 너무 의아한 정도도 아닐 정도라 몇 분 뒤 알람이 울릴 때까지 멍때리고 있었지.
21 이름없음 2018/09/01 22:14:20 ID : BwLcMkranzO 0
꿈 얘기는 이게 끝이야. 그 뒤로부터 지금까지 쭉, 그 검은 곳이나 하얀 곳, 알 수 없는 망토를 쓴 남자를 꿈에서 다시 본 적은 없었어. 그때 오컬트에 흥미 정도만 가지고 있던 친구랑 얘기를 하면서, 혹시 수호신 같은 거 아니야?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걸 그대로 믿고 있어. 왜냐면 그 때 이후로, 약간의 기운이 생긴 건 사실이거든. 엄청난 건 아니고, 그냥 이죽거리는 학교 남자애들한테 말대답을 할 수 있게 됐다던가, 가기 싫을 때 싫다고 말할 수 있다던가....그 꿈들, 특히 마지막 꿈이 뭔가 나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는 했다고 생각해. 나 혼자 막 감동을 받아서 노력한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생긴 의지니까. 뭔가가 대가 없이 생겨났다는건 일종의 축복이 아닌가 했지.
22 이름없음 2018/09/01 22:15:39 ID : BwLcMkranzO 0
잊을 만 하면 그 사람을 떠올려. 요즘은 또 좀 힘들어져서 문득 또 떠오른 김에 적으러 와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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