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0/05/22 04:28:25 ID : wILgnO5U2E6 0
어렸을 때 롭이어 토끼를 한 마리 키웠어. 마음 같아선 집 안에 풀어놓고 키우고 싶었는데 똥오줌을 못 가려서 결국 좁은 우리 안에다 가둬 키웠어. 엄마가 소형견용 하네스를 사와 조금 만지시더니 토끼한테 맞을 사이즈로 만들어주셨어. 그런데도 귀찮아서 산책을 자주 데리고 나가지 않았어. 좁은 우리에 가둬 키우고, 청소만 맨날 해줬어. 가끔 간식도 줬는데, 어린 나는 토끼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어. 매일 같이 우리를 청소해줘야 하는 게 너무 귀찮았어. 많이 예뻐해주지 못했어. 그때 우리가 토끼뿐만 아니라 길고양이들을 입양해서 키웠단 말이야? 나는 토끼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고양이들을 예뻐했어. 근데 웃긴 게, 고양이들을 챙겨줬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일단 그땐 너무 어렸다는 핑계를 댈래. 초등학생이었어서. 너무 어렸어서. 고양이도 토끼도 그다지 예뻐해주지 못했어. 그러다가 토끼가 죽었어. 애가 많이 아팠는데, 제때 병원에 데려가주지 못했어. 아니, 조금 더 일찍 병원에 데려갔어도 똑같았을까? 아빠가 토끼를 병원에 데려가셨을 때, 토끼가 쇼크가 와서 죽었대. 아빠가 나한테 전화를 하셨어. 어린 나는 전화를 받기 전에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어. 아, 죽었구나. 별 느낌이 안 들었어. 슬프지도 않았고 힘들지도 않았어. 울지도 않고 그냥 평소와 같이 지냈어.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내가 싫었어. 고양이가 와서 고양이만 예뻐하느라 토끼에겐 더 이상 정도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후회는 있었어. 그냥 더 잘해줄걸, 하던 가벼운 후회는 가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 예뻐해줄걸, 더 챙겨줄걸, 날 그렇게 좋아했는데. 산책도 더 나가고, 간식도 더 주고, 더 쓰다듬어줄걸, 더 안아줄걸. 내가 너 많이 사랑한다고 더 말해줄걸. 사진 많이 찍어둘걸. 널 데려오지 말걸. 그랬다면 나보다 좋은 주인 만나 행복하게 살았을텐데. 가둬두지 말걸. 얼마나 좁고 답답했을까. 빗질 더 자주 해줄걸. 더 많이 좋아해줄걸. 막상 아이가 죽었다고 들었을때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어. 몇달이 지났을 땐 아이는 내 기억 속에서 거의 잊혀져 갔어. 근데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토끼가 생각나. 사진을 잃어버려서 이제 사진도 거의 안 남았어. 보지도 못해. 근데도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모습이 생생하게 생각나. 화가 나면 표정을 찡그리고 뒷발로 쿵쿵 거리며 자기 화났다고 의사표현을 하던 것도 생각나. 어떤 간식을 좋아했는지도 생각나. 아이가 죽고 나서 몇개월 뒤에는 가물가물했던 것들이, 되려 몇년이 지나니까 너무 생생해. 문득 아이가 생각나. 그리고 후회돼. 어제는 꿈에도 나왔어. 비록 꿈이어서 그런가, 아이의 모습은 전과 달랐지만 난 알았어. 내 아이였어. 내가 키우던, 내 토끼였어. 아이는 죽어있었어. 근데 내가 가까이 다가가니까 눈을 뜨곤, 막 돌아다니기 시작했어. 나는 아이를 열심히 쫓았어. 근데 아이는 잡히지 않았어. 너무 웃긴 게 뭔 줄 알아? 아이를 키울때 살던 집에 난 더 이상 살지 않아. 새로운 집으로 이사한지 3년이나 지났어. 근데 꿈에서는 전에 살던 집이 나왔어. 아이와 같이 있던 집. 심지어 아이는 우리 집 2층에 있었어. 우리 집 토끼는, 1층이나 3층에 있었던 적이 있지만 2층에는 와본적이 거의 없거든. 아이는 우리 집 2층에서, 나에게 잡혀주지 않고 신나게 뛰어다녔어. 아침에 일어났더니 마음이 허했어. 몇년이나 지났는데 이제와서 아이가 생각나. 웃기지. 내 무릎에 앉아서 고롱거리는 고양이를 보면 볼수록 더 미안해져. 그 애도 날 참 좋아했는데 그 애한테는 그렇게 해주지 못했거든. 더 데리고 나가주지 않았어. 더 쓰다듬어주지 않았어. 후회가 쌓이고 쌓여서 이젠 그 아이를 떠올리기만 해도 어딘지 공허하고 가슴이 욱씬거려. 왜 막상 그 애가 죽었다고 들었을때, 심지어는 그 아이가 죽은지 1년, 2년이 지나고나서도 아무 생각이 안 들다가, 5년도 더 지난 지금에서야 그 애가 그렇게 생각날까. 왜 그렇게 후회가 짙게 남고 미안하고 그리울까. 어제 꿈을 꿨는데 오늘 스레딕에 들어오니까 동물판이 그렇게 눈에 띄더라. 이유는 모르겠어. 그래서 홀린듯이 글을 썼어. 늦은 시간에 주저리 주저리 미안해.
2 이름없음 2020/05/26 13:30:02 ID : dzQslvg5gru 0
아이고 힘들었을텐데 힘내 어떻게 말해줘야 할 지 모르겠다
3 이름없음 2020/05/30 08:19:14 ID : wHA5atAo7te 0
사랑했었다는걸 뒤늦게 깨달으면 그렇더라.
4 이름없음 2020/05/30 13:41:10 ID : skk60ldu5O5 0
너 어른된거야
5 이름없음 2020/06/01 01:28:35 ID : ck7hAmFfQoG 0
나도 그래. 처음에는 무덤덤하지, 죽었구나.. 결국엔... 나중에 생각 안하고 있다가 그냥 코 훌쩍거렸는데 옆에서 뫄미가 울어...? 라고 물어봐서 갑자기 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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