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괴담 조각글을 써보자 (9)
2.일상에서 문득 생각난 문구 써보는 스레 (743)
3.사귀자는 말없이 고백 멘트 적기 (138)
4.☆☆창작소설판 잡담 스레 2☆☆ (468)
5.조각들을 모아낸다면 (15)
6.글 잘 쓰는 사람들이 부럽다 (1)
7.생각난 소설의 개요만 쓰고 가는 스레 (6)
8.홀수스레가 단어 세 개를 제시하면 짝수가 글 써보자! (707)
9.조각글 적고 가는 스레 (267)
10.밸런스게임) 단한명의 열성팬 가지기 vs 여러명의 적당한 독자 가지기 (8)
11.만약 너네가 로판 소설에서 나온 책빙의가 된다면 무슨 역이 하고싶어? (111)
12.혹시 이거 설정 너무 양산형같아? (3)
13.다들 캐릭터 이름 만들때 쓰는 방법있어? (34)
14.ㄱ부터 ㅎ까지 좋아하는 단어 적는 스레 (106)
15.청춘은 켜켜이 쌓인 하루하루의 잔상이라고 (28)
16.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뒷문장 이어보기 스레 (9)
17.If you take these Pieces (487)
18.글 잘 안 쓰는 소재구걸주 (61)
19.이름 남기고 가면 간단한 분위기 대답해주기 (214)
20.나 로판식 제목짓기 잘함 (31)
1
이름없음
2018/10/06 01:23:29
ID : pTWqi3A2E4J
3
나 먼저 제시해볼게.
구름 먼지 희망
베스트 레스 2
이름없음
2026/03/14 21:58:14
ID : TRDuk6ZjAjj
1
오늘 나는 벼르고 벼르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새벽같이 일어나 말끔히 씻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색하게나마 머리손질을 하고 거울을 바라보며 동경하던 이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따라해보았다.
완벽하지 못해도 이정도면 되었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며 목적지를 향해간다. 창밖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저와 비슷한 차림으로 출근길이 바쁜것이 눈에 들어온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문득 동기의 우스겟소리가 머릿속을 지나쳤다. 너는 평생에 그런 옷차림을 안할것 같다고 했었던가.
숨막히는 각진 정장차림에 행여라도 옷이 구겨질까 허리를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슨 말을할지 짐작이가 작은 실소가 입가에 스쳐간다.
동결된 시간속에 머무는 이들이 지금 무어라고 할 지 짐작갈만큼 그 색체가 뚜렸하던 이들이었다. 오늘 드디어 보러가는 길이다. 그동안 다잡지 못한 마음을 추슬렀고 동경하는 이의 표정을 방패처럼 앞세워 꼴사납지 않길 바란다.
오랜만이다. 늦게 와서 미안해.
이름없음
2026/04/27 10:03:41
ID : k7bva79fPbd
1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사람을 이어주는 어느 인연신의 당부
내가 지금 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어느 인연신의 관한 이야기야
아주 먼 옛날 한 인연신이 있었어 사람에게 인연을 선물한다는 인연의 신이였지 하루는 인연의 신이 연못을 둘러보다 한 부부의 모습을 보게돼 그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어 늘 아기를 가지는 걸 소망했지 부부는 1000일이 되도록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같은시간 같은 장소에서 빌었어 제발 제발 인연의신님 저희에게도 아이를 주세요 라고 말이야 인연은 신은 그 부부의 정성을 기쁘게 여겨 아이를 주었지 그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어 그 아이가 20살이 되던 해 마을에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어 가뭄이 들어 땅은 갈라지고 물은 점점 부족했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신에게 빌었지 부디부디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말이야 그러나 우습게도 응답은 없었지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유명한 무당을 불러내 그 무당이 말하길 20살의 여자 중 하나를 골라 마을에 인연신에게 바치면 물이 다시 나올 거라는 말을 했지. 사람들은 20살 처녀를 인연신에게 바쳤지 그러나 마을에 비는 커녕 점점 사람들이 굶어죽거나 가뭄으로 이사를 해 인구 수만 줄어들기 시작했어 차례대로 가다보니 어느새 20살 여자는 한명 밖에 남지 않았어 그 아이가 바로 덕수길 마을에 자랑 이홍아 였어 홍아는 어쩐일인지 울지도 웃지도 않았어 되게 담담했지 마치 이일이 일어날 것임을 안다는 듯 그리 무서워 하거나 혹은 두려워하지 않았어 그 모습은 마치 기백은 호랑이의 기백이지만 속은 푸른 늑대의 모습처럼 오직 담대하고 호수의 물보다 투명하고 또렷했지. 어찌되었든 마을 사람들은 홍아를 위로하며 가마에 홍아를 태웠어.
홍아는 굽이굽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마침내 인연의 신을 만났어 인연의 신의 하녀로 들어간 그녀는 그때부터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어 온갖 잡일은 그녀가 맡았지 햇수로 3년동안 홍아는 인연의 신 밑에서 온갖 잡무를 맡았지 그리고 또 햇수로 5년동안 온갖일들을 총괄 했어. 인연의 신이 8년뒤 어느날 홍아를 불렀지 홍아야 이리오거라 라면서 말이야 홍아에게 붉은실 흰실 푸른실 검은실 초록실 분홍실 여러 실을 보여주며 물었어
"이 실이 무엇으로 보이느냐."
홍아는 담담하게 대답했어 이 실은 모든 삶의 인과율을 나타내는 실이네요 라고 말이지 만족 스러운 대답을 들었던 걸까 인연의 신은 마침내 그녀를 자신과 똑같은 인연의 신으로 만들어줬어 그리고 말했지.
네가 보는 모든 실들을 하나의 희망과 사랑으로 이어보렴 인연의 신이 말하자 그녀는 실을 잇기 시작했어 일찍이 과부가 된 여인과 옆마을에 듬직한 총각을 말이야.
인연의 신이 말했어
참 보기 좋게 이었구나 하며 홍아의 머리를 쓰다듬었지 지금도 홍아는 인연의 신과 함께 사람들의 인연을 잇는다고 전해지고 있어
502
이름없음
2021/11/04 18:08:45
ID : E8i8rs04K2L
0
눈물이 붉어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느끼며 우는 소리가 작고 우중충한 원룸에 울려퍼졌다. 시궁창 같은 삶이 싫었다. 어떻게든 발버둥쳐도 삶은 잘 만들어진 덫처럼 나를 더 꽉 조여왔다. 나는, 나는 이 덫에서 빠져나가려면 덫에 걸린 나의 영혼을 몸과 분리시켜야만 했다. 비겁한 변명,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상관 없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나랑 같은 처지인 인간들도 널렸을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빠진 숨을 들이마셨다. 삶에 대한 집착이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시궁창 같은 그런 인생이라도, 인간만도 못할 존재가 되더라도 살아 봐야지. 개소리. 헛소리. 쓰레기 같은 궤변. 온갖 말들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숨을 내쉬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곱게 죽어야지. 구깃구깃한 휴지로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지문과 뭔지 모를 것들이 잔뜩 묻은 더러운 거울이 니 꼴을 보라는 듯이 내 모습을 비췄다. 비웃음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침대에 앉자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렇게 된 하얀 이불에 굴러다니는 약통을 집었다. 죽음, 죽음. 죽음만이 내 구원이자 희망이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기도했다.
다음 생에는 돌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생각도 하지 않고 고통도 받지 않는 돌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503
이름없음
2021/11/04 18:13:24
ID : yNBy2Ny0tu2
0
낙옆 바람 시간
504
이름없음
2021/11/04 19:11:50
ID : Gk061vcoMrt
0
늘 앉는 카페의 익숙한 창가 자리에 앉는다. 메뉴는 늘 먹던 아메리카노. 옷도 늘 입고 나오던 적당히 예쁜 셔츠와 청바지. 창 밖에는 늘 보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늘 똑같은 가로수, 그 아래에 쌓여있는 낙엽. 바쁜 듯 걸어다니는 사람들. 바람에 날리는 전단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오직 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만이 달라져 있다. 늘 듬뿍 차 있던 것 같은 나는 완전히 텅 비어 버렸다. 나는 왜 이제서야 깨닫는 걸까? 내 안의 모든 온기는 너에게서 나왔다는 걸. 아아, 역시 차갑구나... 네가 없는 시간은.
짧아서 미안해!
505
이름없음
2021/11/04 20:02:55
ID : 0slvcrbDAqn
0
허유 정혈 마름
506
이름없음
2021/11/15 18:47:38
ID : 0slvcrbDAqn
0
ㄱㅅ!
507
이름없음
2021/12/28 10:12:28
ID : rtdva3u4Gmn
0
담배 꽃 정열
508
이름없음
2021/12/31 01:20:26
ID : mnu7gnO2sph
0
너는 담배 냄새를 싫어했다.
내가 담배를 피울 때 즈음이면 숨을 깊게 들이마셔 냄새를 맡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려면 그냥 좀 거리를 두면 되지 않느냐는 내 말에
너는 수줍게 웃으며 얼굴에 꽃을 피워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 뿐이었다.
난 너의 그 정열적인 외사랑이 부담스럽다 생각했다.
....외사랑이 옮아 외사랑이 외사랑이 되지 않았을때, 다시 외사랑이 되었을때까지는 말이다.
509
이름없음
2021/12/31 01:21:06
ID : mnu7gnO2sph
0
짝사랑 초코쿠키 굳은살
510
이름없음
2021/12/31 01:21:57
ID : 7hwJRB82pO3
0
난 한평생 내가 짝사랑을 하게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야 짝사랑이라고 하면 감정적으로 괴롭고 미어진다고 들어왔으니까. 스스로 기피 해왔을거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쳐버리니,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하나하나 알아갔다.
처음 경험하는 종류의 사랑은 초콜릿 쿠키와 같았다.
한없이 달콤하지만 천천히 음미하면 씁쓰래하기도 하고, 마냥 촉촉할거 같으면서도 꽤 건조하고 바삭한 감정들이 이리저리 교차한다.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이 한없이 상냥하고 예뻐 보일 때나, 옆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귀로 흘러올 때는 마구 설레이다가도
막상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음을 깨달을 때는 마음 한쪽이 아려오는
이 한없이 놀라운 감정을 나는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511
이름없음
2021/12/31 23:56:24
ID : lhfhwMlvfTR
0
사랑 꿈 미소
512
이름없음
2022/01/03 07:39:27
ID : cJRxzSE7cIM
0
사랑이었던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미소짓고 있는 꿈을 꿀리가 없을테니.
인정해버린 사랑을 외치기엔 너무 늦었을까.
네가 현실에서도 나에게 미소 지어줄까.
사랑을 외쳐도 네가 웃어줄까.
어떻게 생각해봐도 모르겠으니 그저 한 밤의 꿈으로만 기억하자.
513
이름없음
2022/01/03 07:40:27
ID : cJRxzSE7cIM
0
건조,짝사랑,가을
514
이름없음
2022/01/07 05:17:24
ID : E4L82qY9Buq
0
입술이 건조해. 립밤 잃어버렸는데 하나 사려고. 아침에 보니까 피가 났더라고. 아니 입술에. 내 말 제대로 안듣고 있지?
휴대전화 너머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주 길고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다.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 입을 연다.
그리고 나 짝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원래 같으면 이런 얘기 엄마한테 절대 안하는데. 누군지 궁금하지. 엄마가 늘, 딸 연애하는 모습 좀 보고 싶다고 그랬는데 내가 마음에 여유가 없었네. 응원해줘. 응? 듣고 있지?
다시 긴 침묵이 흐른다. 눈꼬리를 타고 흐른 눈물이 귀를 적시고 베개도 적신다.
끊어요. 이제 전화 그만 해. 엄마, 가을이니까 이불 잘 덮고 자. 추우면 춥다고 거기다 꼭 말해야해요. 알겠지.
515
이름없음
2022/01/07 11:31:42
ID : 7hwJRB82pO3
0
꽃다발 겨울 온기
516
이름없음
2022/01/07 18:03:05
ID : q3O2mk2nyLb
0
한 번은 한 꽃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푸름이라는 희한한 이름을 가진 꽃다발에 홀려. 휘갈겨 쓴 듯 샤프의 거침과 흐림이 묻어 나오는 이름표가 세워진 꽃다발에선 겨울이 시려나와 있었다. 그게 너무나도 이질적이게 보여, 따끈한 꽃집의 포근한 진열장의 푸른색으로 점칠된 꽃들에게 미안했다. 그 꽃다발이 나 같아서, 나에게 미안했다.
517
이름없음
2022/01/07 19:29:24
ID : lhfhwMlvfTR
0
기도, 연결, 길
518
이름없음
2022/01/16 23:05:32
ID : mnu7gnO2sph
0
살면서 해본 적 없던 기도를 해본다.
손을 이렇게 모으는게 맞았던가, 옛날에 친구가 하던 식전기도를 어설프게나마 따라한다.
신을 불렀다.
다른 이들은 아버지라 부르지만 내겐 그정도의 친밀감은 없었다.
신에게 빌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의 끝에 그 사람이 가는 길의 끝을 연결해달라고.
그렇게 우연이 되어버린 필연으로
내가 그 사람의 얼굴 한번, 체향 한번만, 딱 한번만 더.
내 뇌에 담아두고 소중이 꺼내어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 빌었다.
아멘.
519
이름없음
2022/01/16 23:06:31
ID : mnu7gnO2sph
0
가면, 주황장미, 혁명
520
이름없음
2022/01/17 01:12:09
ID : 7dXs3BaoGlj
0
혁명단의 상징은 주황색 장미였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전 단장의 가장 좋아하는 꽃이 주황색 장미였을 뿐이다.
그녀가 단장으로서 활동할 시절 그녀의 이명은 장미 가면이었다. 그녀는 혁명단의 가장 위에 서 있었음에도 대외적인 곳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더라. 비밀스러운 여자였다. 쓸데없이 비밀스러워,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자 했던.
최후의 전쟁에서 장미 가면은 우리와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황색 장미 꽃잎들만은 이후 패망한 제국 하늘에서 자유로이 휘날렸다.
521
이름없음
2022/01/17 01:14:33
ID : mnzTRzO2mli
0
장송곡, 보라색, 권총
522
이름없음
2022/01/18 22:54:30
ID : mnu7gnO2sph
0
'난 보라색이 좋아'
라는 대사는 죽음을 뜻한다는 그 어이없는 국어 선생의 말
왜 그 말이 지금 떠오르는 걸까요.
지금 당신이 권총으로 당신의 관자놀이를 가르키고 있는데
왜 바보같은 나는 그 말뿐이 떠오를까요.
당신이 보라색을 좋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당신 뒤의 노을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보라색이어서였을까요.
어디선가 희미한 장송곡이 들려옵니다.
나는 당신의 죽음을 막지 못할 걸 이미 아는 듯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잘 가세요, 사랑하는 이여.
나도 곧 따라가
하늘에서 다시 만나요.
523
이름없음
2022/01/18 23:17:35
ID : lhfhwMlvfTR
0
레비아탄, 파란색, 빨강
524
이름없음
2022/02/01 01:10:34
ID : mnu7gnO2sph
0
. 갱신!
525
이름없음
2022/02/01 01:11:17
ID : mnu7gnO2sph
0
비, 감자칩, 소주
526
이름없음
2022/02/03 13:17:34
ID : s0002q1wtxR
0
비가 내렸다. 우중충한 날에는 술을 마셔야 한다며 삼촌이 헤픈 너털웃음을 지으며 소주와 감자칩을 사왔고 할머니는 그런 삼촌을 보고선 철이 덜 들었다면서 한숨을 쉬셨다. 이미 동네 아저씨들과 몇 잔은 마신듯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진 삼촌이 아버지를 끌어앉고 안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아버지를 노려보더니 이내 뒤돌아 부엌으로 향했고 부엌에서는 물소리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낭자하게 울렸다. 나는 할 일이 없어 부엌과 거실을 맴돌다 거실에서 티비보는 할머니와 매섭게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안방으로 살금살금 향하였는데 안방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자 술 취한 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가 어머니의 귀에까지 들리게 볼륨을 높인 채로 허락을 고했고 고갤돌린 어머니의 싸늘한 표정에 난 양심의 가책을 가진 채로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빈 소주병이 바닥을 뒹굴고 반쯤 사라진 감자칩을 보며 삼촌 옆에 앉자 알싸하고 독한 술냄새가 삼촌에게서 흘러나와 나의 코를 적시더니 어른들은 또 그들만의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이곳에서도 할 일이 없어 감자칩을 슬금슬금 주워먹으며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비는 지치지도 않는지 쉼없이 웅덩이를 만들었다.
527
이름없음
2022/02/03 13:18:16
ID : lyJVffare0p
0
나 아침 겨울
528
이름없음
2022/02/03 18:03:58
ID : RBgjfPdBdV8
0
계절에 상관없이 아침은 항상 겨울의 냄새를 풍긴다. 지금은 7월의 새벽. 해는 아직 얼굴을 비추지 않았고 간밤에 열을 한숨 식힌 여름의 공기는 미적지근하게 겨울 향을 내뿜는다. 발코니 창으로 드는 여름 새벽 향기가 내 코로 들어와 폐를 둥글게 훑는다. 들숨 한 번에 너를 생각하고, 날숨과 함께 너를 잊는다. 또 들숨 한 번에 지난 겨울을 생각하고, 날숨과 함께 그 기억들을 뱉어낸다.
지난 겨울, 눈이 흐드러지게 내린 그날 존재했던 것은 나뿐이다. 흰 세상 속에 박힌 점 하나뿐이다.
529
이름없음
2022/02/07 01:58:53
ID : lhfhwMlvfTR
0
누락, 깊음, 허탈함
530
이름없음
2022/02/08 10:51:35
ID : 1zRA1CrAi7c
0
누락되었다는 것은 더이상 너의 존재가 이 세계에는 없다는 것을 아주 잘 나타낸다.
온갖 서류에도 너는 없으며 이제는 너에 대한 기록조차 모조리 사라져 간다.
깊고 깊은 구멍에 빠진 듯이 한순간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너는 젖은 몸을 부수며 짓밟히고 으깨진다.
나는 너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 세계에 너를 남겨두려 구멍에 밧줄 하나를 허탈하게 던진다.
531
이름없음
2022/02/08 15:40:12
ID : LcGk1a4IK3U
0
해 달 별
532
이름없음
2022/02/11 20:40:10
ID : mNwGmoIJWmI
0
"우리는 태양입니다. 아이들이라는 자그마한 별이 빛나도록 도와주시는 겁니다."
강의실 안, 수많은 예비 멘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연대 앞에 서있는 수석 멘토는 찬란히 빛이 났다.
그녀가 빛낸 아이들만 해도 백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여러분은 유년 시절의 고난을 가장 모범적으로 이겨낸 분들입니다. 그 방법을 제3자의 시점에서 전수해주시는 것이죠."
사각 소리가 잠시 울러퍼졌다.
성적이 좋은 것 하나로 예비 멘토가 된 나는
솔직히 저런 멘토들처럼 아이들을 잘 이끌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내 앞에 저 태양이 더욱 빛나보였다.
어쩌면 나는 수많은 태양 사이에 낀 자그마한 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열정 넘치는 예비 멘토들의 눈을 확인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잘못된 길을 가르치면, 여러분은 한 사람의 인생 자체를 망치는 겁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행동하세요."
강연이 끝나고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돕고자 했던 행동들이
아이들의 인생을 망칠 수 있다니.
멘토가 되면 나는 아이들의 인생의 키를 잡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잘못하면, 아이들은...
상상도 하기 싫다.
"그래 미연아, 어떤게 고민이라고?"
수석 멘토는 옆에서 내가 상담하는걸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이 미연이라는 친구는 아무래도 처음 보는 사람과 상담을 하다보니
꽤나 긴장한 듯 보였다.
"미연아 괜찮아? 많이 긴장했구나?"
나는 조용히 미연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미연이는 처음엔 깜짝 놀란 듯 했지만,
손을 놓지는 않고 심호흡을 했다.
"그게, 제가 좋아하는 얘가 있는데요..."
수석 멘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기운을 미연이도 느꼈는지 히끕, 하고 딸꾹질을 했다.
"그, 그, 이제 접으려고요. 네,"
"그러니? 이유가 있을까?"
수석 멘토의 따가운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기숙 학원이니깐, 이런걸 별로 안좋아하시겠지.
애기들이라 아직 이런 고민이 많을텐데.
"성적은 괜찮니 미연아? 계속 만점 맞아오다가 요즘은 좀 떨어졌던데."
수석 멘토가 갑자기 물어봤다.
"네? 아 그게,"
"그래. 접을 생각 잘 했다. 연애는 나중에 해도 괜찮고, 너만 손해인거야."
이후에는 수석 멘토와 미연이의 상담으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이번 상담 실습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
"예비 멘토님... 우리 학원생들 성적 상담도 못해줄 판에, 연애 상담을 해줘요?"
"아니 그게, 학생들이 힘들어 하니깐..."
"당신은 멘토에요. 걔네들 엄마가 아니라고요. 대학만 잘 보내면 되는거에요."
"넵..."
밤이 되어 내 상담실로 돌아오자 더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구나. 내 임무는 그거구나.
내가 회의에 차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똑똑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멘토쌤, 저, 미연인데요..."
미연이가 문에서 머뭇거렸다.
"어어 들어와!"
미연이가 안으로 들어와서 의자에 앉았다.
"사실 아직 안 접었어요."
"그 애?"
"네..."
미연이는 생각보다 말이 많은 친구였다.
자신이 그 애를 왜 좋아하게 됐는지부터
그 애랑 어떤 일이 있었는지,
친구들이랑은 어떻게 지내는지,
요즘 뭐에 빠져 지내는지
미연이는 끝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울한 표정과 함께
자신의 고민과 슬픔을 털어놓았다.
미연이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스스로 입 밖으로 내놓은 말들에 깜짝 놀란 듯 했다.
"상담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중에 또 올게요!"
"그래, 얼른 들어가서 자렴"
뜻밖의 일이었다.
항상 밝고 모범적인 미연이 같은 아이가
이런 사정이 있을 줄은,
저렇게 감정이 풍부할 줄은.
더 뜻밖인 것은 다음 날부터 다른 아이들도
밤에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쌤 쌤 있어요?"
"그래, 무슨 일이니?"
그렇게 하루하루 더 많은 아이들과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더 아이들을 이해해가기 시작했다.
내가 해준 상담은 성적 상담은 아니었지만,
다음 학원 모의고사 성적에서 아이들의 성적이 전반적으로 많이 올라갔다.
수석 멘토는 이를 보고 아주 기뻐했고,
아이들에게 어떤 멘토의 상담이 제일 도움이 됐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아이들은 하나같이 나를 가리켰다.
"저 예비 멘토님이..?"
수석 멘토의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이건 어떻게든 수습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겠지.
수석 멘토가 내가 아이들과 다른 상담을 한다는 걸 알게 되면,
수석 멘토는 어떻게든 아이들의 비밀을 털려고 할 것이고,
그럼 아이들을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될테니깐.
"약간의 문제풀이 팁을 줬을 뿐입니다. 잘 사용했다니 다행이네요."
수석 멘토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무래도 내 대답에 만족한 듯 하다.
"그래요! 우리 예비 멘토님, 어머, 이젠 우리 멘토님이랑 더 잘 지내봐요."
그렇게 얼떨결에 나는 멘토가 됐고,
오늘도 달이 떠오르는걸 보며
오늘의 내 진짜 상담을 준비한다.
비록 나는 수많은 별을 환하게 비추는 태양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 나는 달이 될 것이다.
태양 앞에선 찬란하게 빛나는 별, 그 뒷편의
별이 꽁꽁 감추어둔 어두운 그림자를
그 누구보다 찬란하고 따뜻하게 비추어 주는,
그런 작고 작은 달이.
533
이름없음
2022/02/11 20:56:02
ID : Mo2NzamtxVa
0
그네 숨 바람
534
이름없음
2022/02/12 00:39:46
ID : O5RzTU0mpRC
0
방과후에 자주보던 놀이터에서 보자고 했다.
네가 무슨 표정을 지을까.
기약없이 만났던 우리 사이에 내 제안부터가 어색했을까.
어쩌면 눈치 챘을지도 몰라.
그러게 내가 준 꽃을 왜 아직도 갖고 있었어.
이게 그저 내 바람으로 생긴 망상일까 걱정된다.
너를 기다리는 게 이렇게 온몸이 저리고 숨막히는 일이었나-
네 머리칼이 보일즈음에 나는 어떤 표정으로 쳐다보아야,
덜 어색하지 않게 널 맞이할 수 있을까.
535
이름없음
2022/02/12 02:01:26
ID : 67AlzSMkljx
0
피 사랑 식사
536
이름없음
2022/02/12 03:45:49
ID : E4L82qY9Buq
0
전쟁은 식사를 앗아갔다. 짐승처럼 눈치를 보며, 입 속에 씹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욱여넣는 걸 식사라고 부를 순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앉아 같은 종류의 식기를 쓰며 함께 먹는 것의 소중함을 알았다. 살고자하는 본능에, 죽음 앞에서도 배는 고팠고 피가 나면서도 목은 말랐다.
537
이름없음
2022/02/12 03:47:07
ID : E4L82qY9Buq
0
악몽 천사 후회
538
이름없음
2022/02/14 22:50:18
ID : mnu7gnO2sph
0
너는 내 악몽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너의 눈은 나를 깊게 파헤쳤다
내가 숨기려 했던 내 비밀과 너에 대한 감정까지 모두.
너에 대한 감정은 나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너는 알겠다고 했었다
너는 내 감정이 사랑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에게 상처를 주었다
내 상처를 끌어안아 주려는 너에게 되려 상처를 내었다
네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계시를 주고 떠나버리는 천사처럼 네가 떠나고 나서야 인정하고 말았다
너는 내 인생의 유일한 빛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겐 암흑뿐이다
후회, 라는 감정으로 지금 내 상황을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암흑 속이라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보이질 않는다.
너의 부재로 인해 내 모든 것이 사라졌다.
539
이름없음
2022/02/14 22:56:32
ID : liqqrs2rdTQ
0
안개 별 소망
540
이름없음
2022/02/15 02:09:43
ID : atwIFdCkmty
0
사랑은 참 부질없는 것
매일 새벽마다 뜨는 똑같은 별을 보며
나 홀로 너를 그렸던 날도
니가 내게 주었던 순백의 믿음이
알고보니 하아얀 안개속 가려진 거짓이였던 것도
이제는 내가 그리는 모든 경우의 수가
전부 다 부질 없다
그 날들의 온갖 많은 생각을
네 침묵 한 번으로 마무리 지어야했다면
매일 너를 찾아가 내 마음을 고했던건
정말이지 전부 쓸모가 없어져버렸는데
난 그게 아쉬워서라도 유치하게 별을보며 빌어본다
너도 나와 같은 시간에 살기를 소망하며,
담담하게 인사를 건내
이젠 안녕
541
이름없음
2022/02/15 11:16:54
ID : nPh86Zii4JV
0
내일,별,영원
542
이름없음
2022/02/18 02:49:27
ID : liqqrs2rdTQ
0
너와 함께 올려다 본 밤하늘의 별은 참 아름다웠다
별을 담은 너의 눈도 참 아름다웠다
영원히 빛날 줄 알았던 밤하늘이 기울고
새벽의 향기가, 내일의 아침이 찾아오면
넌 하얀 숨을 내쉬며 언제나와 같이 속삭이겠지
너도 저 밤하늘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달을 쯤이면
시원한 바람이 뺨을 간질이고 밝은 햇살이 너를 비추고
난 새로운 오늘을 넌 어제의 나를 기억하며
오지 않을 내일을 기다리며
그래도 밤하늘은 다시 우리를 찾아올거야
543
이름없음
2022/02/18 02:51:58
ID : 40si6Y1g7yY
0
수첩, 카메라, 신발
544
이름없음
2022/02/20 03:58:17
ID : TWrBBAjikk2
0
나는 잭의 방 컴퓨터책상 위에 놓여있는 수첩 내용을 확인했다.
표지에 반듯하게 적은 자신의 이름과는 다르게 수첩 안에는 마치 잠에서 깬 직후 꿈의 내용을 기록하기라도 하는 듯 필체가 엉망이었다.
'악몽(nightmare). 천장이 없는(roofless). 셋(3) 비가 온다(raining). 그녀가 온다(she comes). 도망(run). 수첩과 펜(note pen). 창고에 숨었다.(hide warehouse)'
첫번째 페이지에는 여기까지 적혀있었다. 나는 다른 내용이 있는지 페이지를 넘겼다. 몇개의 페이지를 넘기자 다른 메모가 적혀있었다. 앞쪽과 마찬가지로 엉망인 글씨였다.
'같은(same). 둘(2). 젖었다(wet). 그녀 왔다(she came). 도망(run). 수첩과 펜(note pen). 창고(warehouse). 기다린다(waiting)'
몇 페이지 뒤에는 단 하나의 단어만 적혀있었다.
'보고있다(watching)'
"...보고있다?"
함께 메모를 본 동료 중 한명이 입을 열었다.
"이건 뭐 그런건가요? 누군가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고 그 내용이 몇일동안 계속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희생됐다는?"
동료는 마치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보는듯이 메모의 내용을 비꼬았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없이 다음 메모를 찾아 페이지를 넘겼다.
"음? 이건 뭐야? 암호?"
다음에 찾은 메모에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자가 적혀있었다.
"아, 이거 일본어네요. 히라가나로 적혀있어요."
처음 입을 열었던 동료가 메모를 보면서 말했다.
"어디보자... 출구(でぐち) 숨긴?(かくす) 카메라(かめら)?"
적혀진 메모가 읽혀진 후 나는 당연한 듯이 고개를 돌려 수첩 옆에 놓여있는 디지털 카메라를 바라봤다.
"아니, 테드. 지금 이 메모를 믿으시는 거에요? B급 영화 스토리로도 못써먹을만한 내용인데요?"
일본어를 읽은 동료가 나에게 약간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가능한 차분하게 대답했다.
"들어올 때 봤을지 모르겠지만, 현관에 있던 잭의 신발 중 하나가 젖어있더군. 세탁해서 놔둔 것은 아니었어. 분명 신발을 신고있다가 젖은거야. 최근에 이 지역에 몇주간 비가 오지 않은건 알고있겠지. 사무원인 잭이 발에 물을 묻힐만한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메모에는 젖었다는 내용이 있으니... 일단은 조사해볼 필요가 있어 보이지 않을까?"
어찌보면 내가 들어도 조금은 억지스러운 주장이었기에 비웃음을 감안하고 수첩을 내려놓은 후 카메라를 집어들었다. 카메라의 촬영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LCD가 파손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컴퓨터에 연결해서 확인해야 할 것 같다. 다행히 책상에서 연결선을 찾아 컴퓨터와 연결했다. 컴퓨터에서 카메라를 인식하고 사진 데이터를 로드하기 시작했다.
미리보기로 보여지는 앞의 사진들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찍힌 3장의 사진은 미리보기가 표시되지 않는다. 나는 그 중 먼저 찍힌 사진을 더블클릭하였다. 뷰어 프로그램으로 나타난 사진에는 어디인지 알수없는 어두운 복도 같은 곳이 있었다. 다음 사진을 확인해보니 자재더미들이 쌓여있는 곳을 창고같은 곳이었는데, 자세히보니 화면 중앙에 자재들 사이로 문으로 추정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카메라를 보며 웃고있는 전형적인 미국(서양)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마치 여자가 스스로 촬영한 것 같았다. 여자는 얼굴 옆에 수첩을 들고있었고 수첩에는 무언가가 적혀있었다.
동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읽을 수...있다(よめる)"
545
이름없음
2022/02/20 04:09:41
ID : QttfTQpWjeL
0
눈 존경 귀여움
546
이름없음
2022/02/21 16:23:40
ID : re1vhhupWrw
0
내 눈을 바라보는 듯 하더니 매몰차게 돌아 그저 스쳐간 눈빛을 가진 그 사람을 존경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빛 한 방울 보이지 않는 평범한 검은 눈동자 주제에 마음 속 열망과 애탄을 불러일으키고, 혀를 움직이지 않은 채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그 눈빛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 인간에게 나는 그저 귀여운 생도들 중 한 명이겠지.
547
이름없음
2022/02/21 19:30:34
ID : ipfffak7fdQ
0
사랑 운명 슬픔
548
이름없음
2022/02/22 03:11:50
ID : liqqrs2rdTQ
0
넌 항상 사랑한다는 말을 가볍게 하더라?
누구에게나 사랑한다면서
눈웃음을 지어주고
문자에 하트 이모티콘을 남발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사랑이 고팠던 나와 너는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너의 사랑해가 매일
나에게 차곡차곡 쌓여가 내 마음을 체워주었어
너에게는 가벼울지도 모를 사랑한다는 한마디가
나에게 얼마나 크게 다가왔는지
너는 모르겠지
나에게는 더없이 특별했던 사랑한다는 말
슬프게도 너는 다신 해주지 않겠지
마음이 비어버렸는데 다시 체워주지 않을레?
549
이름없음
2022/02/23 00:04:11
ID : mnu7gnO2sph
0
타이머, 맥주, 연인
550
이름없음
2022/02/23 00:30:33
ID : 7Aqi2q1A2L8
0
이미 수십번을 돌렸다. 손 때는 탈 대로 타고, 녹슬어 더이상 돌아가지도 않는 시계는 시간이 정해진 타이머처럼 점차 초조히 알릴 준비를 해온다.
어느때는 온종일 방구석에서 폐인처럼 맥주캔만 까 마시며 하루를 새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연인의 자취를 그리워 하면서 추억을 하염없이 쓰다듬는다.
방구석에 놓인 분홍색 커플 타이머는 더이상 버튼이 눌리지도 않을 만큼 너무 많이 눌렀고,
옛 그립던 시절을 추억하며 시간을 쓸어내기에는 내가 시간과 함게 쓸려갈 수 없다.
그 무엇보다 얼음장같고, 송곳하게 다가오는 파도에 침식되어가면서, 나는 결코 그와 함께 쓸려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책상 앞으로 가서, 작동하는 지도 모르는 색바랜 분홍빛 타이머를 맞춘다.
함께 쓸려나가지도 못하고, 깎이기는 커녕 흠집밖에 못내는 파도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다시 차게 얼어 변하지 않는 바다를 거슬러 오르려 한다.
10:00
.
.
.
.
00:00
바다는 여전히 나를 차가운 심해에 가라앉혔다.
어느때에는 하염없이 맥주를 마시며 날을 지새우고, 어떤 때에는 연인의 추억을 다시 떠올린다.
551
이름없음
2022/02/23 00:32:23
ID : 7Aqi2q1A2L8
0
첫사랑, 회귀, 불
552
이름없음
2022/02/23 02:04:02
ID : xyK1vdva04G
0
내 세상에서 감히 주인공 자리를 꿰어찰 수 있는 타인, 나는 주인공도 뭣도 아닌 변방의 가난한 시인. 빛바랜 시집은 노란 꽃물이 잔뜩 들었을 테지. 이따금 들려오는 노래는 당신을 위한 나의 사랑시. 아마 사랑은 그런 것이다. 들이닥치는 파도처럼 거칠고,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겁고, 마른 하늘에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갑작스러운 것. 그래, 나는 오랫동안 사랑을 잊고 살았던 거야. 잔춘의 시기, 회귀한 여름의 응달에선 첫사랑 내음이 난다.
553
이름없음
2022/02/23 02:06:00
ID : xyK1vdva04G
0
나 고독 타인
554
이름없음
2022/02/24 01:31:21
ID : mnu7gnO2sph
0
어쩌면 고독이란, 금단증상일뿐일지도 모른다.
타인과 함께 있는, 그 충만함에서 벗어나는.
그 중독과도 같은 달콤한 감정에서 깨어나 혼자가 되었을때
나는 비로소 고독이라는 감정을 느끼므로.
그래서 홀로 있는 것도 익숙해지다보면
더 이상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 전혀, 반갑지 않은 해방이지만.
555
이름없음
2022/02/24 01:32:20
ID : mnu7gnO2sph
0
드라이플라워, 자정, 오리온자리
556
이름없음
2022/02/25 00:55:00
ID : Arz9eFjy3V9
0
자정 무렵에 오리온자리가 보인다던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별자리라든가 황도 12궁이라거나 하는 것은 문외한인 내게, 당신이 깔깔거리며 오리온자리를 알려주던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새하얀 눈 속 당신이 아름다워 내가 슬금슬금 옆으로 붙으면 당신의 미소가 활짝 피어나곤 했습니다. 그곳은 조금 일찍 봄이 찾아왔고 귓가를 스치는 냉한 바람은 꽃샘추위가 되었습니다.
봄은 겨울에 끝났습니다. 꽃은 눈을 맞아 메말랐습니다. 이미 생기를 잃었음에도 그 자태는 여전히 찬란했기에 나는 그만 꽃을 꼭 껴안아 버린 것입니다. 그날 내 품 안에서 따뜻했던 우리만의 봄은 바스라져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감히, 아직 꽃을 사랑합니다.
또 드라이플라워를 샀습니다. 오늘 자정에도 오리온자리를 찾겠습니다.
557
이름없음
2022/02/25 01:00:31
ID : Arz9eFjy3V9
0
결정, 망상, 오만
558
이름없음
2022/02/25 01:22:34
ID : i62HB9hcJPj
0
망상과 오만은 인생이다.
자신이 결정을 해냈다는 망상과 그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오만이 인생의 전부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우리 모두의 일부이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망상으로써 결정을 만들고 자신의 안의 오만으로써 그 결정에 확신을 만든다. 그 망상은 오만의 길이에 따라 꽤 오래 지속되기도, 짧은 백일몽처럼 끝을 맺기도 한다.
망상을 거듭해서 수정해 나가 단단하고 아름다우며 완벽한 오만을 만드는 것이 인간의 존재 이유이자 인생 그 자체가 아닐까.
559
이름없음
2022/02/25 01:47:26
ID : liqqrs2rdTQ
0
상상력, 모방, 공허
560
이름없음
2022/02/25 20:08:48
ID : 5PbbinSHA0l
0
상상력이 좋았던 그 아이는,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판타지 동화 속 주인공을 모방했던 그 아이는, 흐르는 세월 따라 성장하며 더럽고 추잡한 현실을 깨닫게 된 그 아이는, 끝없는 공허 속으로 빠져들어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561
이름없음
2022/02/25 21:37:44
ID : GnyMo40twMo
0
죽음, 파티, 웃음
562
이름없음
2022/02/26 01:21:39
ID : mnu7gnO2sph
0
나는 어쩌면 너의 모든 걸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내가 죽은 날에 네가 파티를 열고
내 영정사진 앞에서 깔깔 웃어도
난 네가 밉지 않을테지
아니, 어쩌면 더더욱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
미치광이가 된 내가 널 사랑하게 된걸까
아니면 내가 널 사랑해서 미치광이가 된걸까
모르겠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내게 중요한 건, 지금 널 껴안고 키스하고 싶다는 것뿐이야.
563
이름없음
2022/02/26 01:40:10
ID : wk3A2HA7xUZ
0
여름 방학, 첫사랑, 약속
564
이름없음
2022/02/26 10:13:27
ID : jxPa7bu9vwr
0
"우리 가는 길의 끝이 어떻건 간에 마지막에는 함께하기로 약속했었지."
그 아이는 교실 창가를 등지고 서서 붉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사위는 울적해지리만큼 고요했다. 나의 첫사랑은 잊혀지지 않을 미소를 입께로 끌어올렸다. 초생달 모양으로 두 눈이 그리는 곡선이 그 위에 고즈넉하게 걸려있었다.
"약속을 지키려고 돌아왔어, ■■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하늘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그 아이의 등 뒤로 드리워져 있었다. 영문을 몰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첫사랑을 보듬어 품에 안았다. 창 밖의 짙은 핏빛이 눈동자에 스며 욱신거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가에서 흐른 물방울이 뺨 표면을 소리없이 지나고 있었다.
"바보야. 네가 돌아온 게 아니야."
- 끝나지 않을 여름방학
565
이름없음
2022/02/26 10:15:00
ID : jxPa7bu9vwr
0
굴곡, 안경, 청량
566
이름없음
2022/02/26 23:42:52
ID : 3yGso2K1xBd
0
처음은 안경이었다. 안경 너머의 넌 잘 웃었다. 남들에게 자주 말을 걸고, 반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며, 더운 여름에도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곤 했다. 밝고, 활기차고, 친절한 너. 그거 안경 너머의 너였다.
"야. 오늘 피씨방가자."
"나 오늘은 집에 가야해."
곤란하게 가방을 든 너는 칭얼거리는 친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실을 나선다. 안경 속에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
두번째는 창 너머 비치는 너. 너와 나는 같은 책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루한 수업이 될 무렵 창문을 바라보곤 했다. 그 창문에 비친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였다. 묵묵히 할 것을 하는, 공부를 잘하는 너. 그건 창문이 비친 것.
나는 드디어 용기를 냈다. 안경도, 창문도 필요 없었다. 진짜 너는 무엇일까. 비친 그 너머의 조각들이 진짜 너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냈다. 내가 본 너는 낡은 운동화를 신었다. 휴대폰은 기억도 못할 옛날 기종. 책상에 가끔 끄적이는 낙서는 우울에 대한 내용이었고, 그건 늘 감춰져있었다. 또.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맨 눈으로 본 너는 내가 안경과 창문으로 바라볼 때와는 너무 달라있었다.
아, 맞아. 그렇게 또한 맨눈으로 바라본 하늘이 청량하다. 굴곡을 버렸음에도 여전히, 여전히 반짝였다.
(ㅜㅜ 굴곡을 굴절로 착각했어... 일단 올려볼게... 미안)
567
이름없음
2022/02/27 00:53:35
ID : 9vA5go0q0mp
0
인사, 여름, 미소
568
이름없음
2022/02/27 02:24:16
ID : liqqrs2rdTQ
0
여름의 노을은 유난히 붉다. 지평선 너머로 점점 사라져가는 새빨단 태양이 회색 도시를 물들이는 이 시간이 난 좋다. 너의 미소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시간이니까. 우리 마을에서 노을이 가장 잘 보이는 갈림길에서 우린 언제나 작별 인사를 나눈다. 급식이 맛없었다느니 숙제를 보여달라느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나의 걸음을 늦추는 너는 벌써 작별 인사만 다섯번째 건낸다. 계속해서 붙는 너의 추신에 내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오른다. 노을이 가장 잘 보이는 이 길이 도시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름의 추억일거야.
569
이름없음
2022/02/27 02:31:09
ID : zf84HBhAmFe
0
불꽃 학교 혁명
570
이름없음
2022/02/27 10:54:49
ID : 3Ci4HCpe6pa
0
불꽃이 거세게 튀었다. 평화롭던 학교는 순식간에 비명으로 뒤덮였고, 무언가가 타는 듯한 냄새와 미친듯이 타오르는 불길만이 지상에 남았다. 잠긴 교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스러진 학생들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그 위를 덮은 붉은 색의 불은.. 저 멀리서 보면, 마치 깃발로도 보이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허무했다.
...전부 소용 없었구나. 잔잔한 일상이 깨진것도, 누구보다 사랑했던 친구를 잃은것도. 무엇 하나 슬픈 것 같지 않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은 헛수고였다는 그 하나의 사실이 어떤 것보다 아팠기에. 이 혁명은, 도대체 무얼 위한 혁명이란 말인가. ..이건,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행위였나? 더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시간은 없었던 듯, 곧이어.. 시야가 암전했다.
571
이름없음
2022/02/27 16:12:27
ID : MmGlhdTSNtg
0
성인 아저씨 추억
572
이름없음
2022/03/03 00:47:25
ID : mnu7gnO2sph
0
너는 성인이 되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이사했다며 어색하게 인사해오던 것이
나는 며칠 전의 일만 같은데 말이다.
나는 여기에 멈춰 서 있고 너의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에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웃는 얼굴엔 성숙함이 스며들고 있었다.
오늘 1월 1일, 새벽에.
너는 이제 성인이라며, 술을 마셨다고 했다.
만취한 얼굴이 붉게 물들어있는 모습은 낯설었다.
아니, 눈시울마저 붉었던 걸 생각하면 그게 술기운 탓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너는 마지막 추억이라고 하며 내 입술에 네 입술을 비볐다.
정말 많이 좋아했다고, 첫사랑이었다고. 입술을 붙인 채로 속삭여왔다.
입술엔 거스러미가 일어나 까슬했다.
짧은 접촉 후에 너는 네 집으로 도망쳤다.
마치 닿으면 녹아버리는 눈송이처럼 사라졌다,
아주 아름답고, 매혹적인, 그 눈송이의 결정같은 너는.
573
이름없음
2022/03/03 03:44:07
ID : RDxRA6qlA4Y
0
붉음/감정/연민
574
이름없음
2022/03/04 03:14:06
ID : 1DunA1xDAkn
0
난 푸른 감정을 슬픔으로, 붉은 감정을 분노로 표현하고는 했다.
푸름에서 붉음으로, 이윽고 끈적하게 타오르는 것은 증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색에서 청색으로, 이윽고 오만하게 납득해버리는 것은 연민이었다.
가끔 붉은 노을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고는 한다.
575
이름없음
2022/03/04 03:16:17
ID : zQq0mr81eNs
0
생각. 휴지. 물감
576
이름없음
2022/03/06 22:25:10
ID : 7Aqi2q1A2L8
0
물감을 휴지에 한컵 떨어트리면,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며 일그러진다.
모두가 입을 모아 아름답다하지만, 결국 남는 건 일그러진 휴지 조각
생각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생각도 너무 많으면 일그러져 남은건 그저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577
이름없음
2022/03/06 23:00:04
ID : vh9bctxU5bx
0
나비 속박 해방
578
이름없음
2022/03/07 05:28:25
ID : xyK1vdva04G
0
사색의 시간, 죽은 쥐 옆에 흩어진 나비의 시체. 패악을 저지른 소안, 그 위로 쏟아지는 춘광. 안(顔)과 안(眼)이 표독으로 일그러진다. 공연스레 산통 깨지 마. 내 말 들어. 권위적이고 작위적인 말투가 귓등에 착근한다. 하늘도 나를 사랑하셔. 나비의 절개를 지키어, 죄 가득한 것을 입에 담지 못하게 한 거야. 이제는 절사한 관계의 말로도, 어느 여름의 실의도 천회하지 않아. 종적 감추듯 너도 저 나비처럼 나와 함께 연멸해 버리자. 염속되기 전, 천협한 속박을 벗고 영멸해 버리자. 이것은 살생이 아니야, 해방이야. 광파에 지끈거리는 눈두덩이를 누르다, 악취에 코를 틀어막고선 바락 소리를 지르니, 종내 남은 것은 무(無). 인간의 탈을 빌려 쓴 천신의 자제라 치부해야 하는가. 나의 폐잔한 착류인가. 이 순간을 유념해, 요행이 깃들기 바라. 폐부를 들어내 놓고 천지분간 식별할 일말의 경황조차 없이 번지는 시간에 비해 대가치렌 가히도 잔악하다. 일컨대 네가 저지른 것만이 죄악이라 칭할 수 있어. 난 이제 널 사랑할 수 없어.
579
이름없음
2022/03/07 05:33:31
ID : xyK1vdva04G
0
시나브로 허파 황량몽
580
이름없음
2022/03/08 09:27:00
ID : DxRCqi04Glh
0
허파가 터질것 같이 숨을 쉬었다.
방금 내가 들은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네가 아니기를 바랬는데.
숨을 들이킬 때마다 송곳이 내 몸을 찌르는 느낌과, 내쉴때 마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다.
처음으로, 네가 원망스러워졌다.
이럴거였으면 나한테 다가오지 말았어야지. 왜 나를 길들여 놓고 떠나는거야?
소나기가 오듯이 시나브로 찾아왔으면서, 갑자기 훅 하고 떠나버리다니. 얼마나 잔인한가.
모든 것이 황량몽이었음을, 알고 싶지 않은 방식으로 깨달았다.
581
이름없음
2022/03/08 10:11:44
ID : nPh86Zii4JV
0
불,우정,배신
582
이름없음
2022/03/08 19:51:36
ID : LcGk1a4IK3U
0
불꽃이 피었다. 화려하고도 지독히 강렬한 불꽃이 하늘을 검게 메웠다. 연꽃이 불꽃의 열기에 젖어 바스라지고 물속으로 숨어든 이들은 뭍에서 태어난 죄로 뭍으로 나와 물속에서 죽었다. 그 무엇도 아닌 죽음이었다. 어찌하여 그대는 과실을 나뉘고 그 종자 속에 독을 담았나. 어찌하여 내가 나뉜 것에 꽃을 피워 죽음을 담았나. 그대는 나를 사랑하였나.
나는 그러했다.
583
이름없음
2022/03/08 21:54:58
ID : q1Cjg3RBcGn
0
바다, 신비로움, 미지(未知)
584
이름없음
2022/03/13 21:26:59
ID : 8pcGqZa5Rvh
0
가슴이 부서지는 듯한 치명타였다.
그 아이가 겪은 일이 이렇게까지 슬픈 일이였구나.
소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아이가 7년이란 시간 속을 지낸, 죽음의 바다로 빠져들어갔다.
죽음의 바다는 흑백 밖에 없는 고요한 공간.
소녀는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죽음의 바다 속으로 계속 가라앉았다.
얼마나 더 가라앉아야 할까.
끝이 느껴지지 않는 바다다.
이 바다의 물에 닿으면 차갑고, 슬퍼.
소녀의 손은 손끝에서부터 검게 변해갔다.
이제, 끝인 걸까.
더 이상 팔에 감각이 없어.
그렇게 생각하던 소녀는 생각한 직후,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눈을 떠보았다.
분명 흑백 뿐이였고, 고요하고 차가웠던 바다 속이 아니라 여러 색의 빛으로 감싸진 신비한 무언가의 안에 있는 것이였다.
소녀를 감싼 그 빛나는 구체는 점점 위로 올라왔다.
소녀의 몸에 있던 죽음의 색은 점차 구체에 빨려 들어가면서 사라졌다.
구체는 죽음의 색을 빨아들이고도 여전히 밝게 빛났다.
하지만 그 후유증 때문인지, 아님 또다른 이유인지 소녀의 손톱에만 검은 색이 있었다.
마침내, 수면 위로 구체가 떠오르고, 바다 위의 하늘에 떠있는 그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땅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소녀의 손은 죽음의 색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듯이 손이 그 구체의 색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구체는 점차 작아지더니 어디선가 줄이 생겨 소녀의 목에 목걸이처럼 걸어졌다.
그 아이, 즉 소녀의 어두운 또다른 인격은 분명 자신이 없애버린 다른 인격인 소녀가 다시 살아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눈만 깜박거렸다.
소녀의 눈은 찬란한 색으로 빛나면서 자신의 또다른 인격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너를 꼭 이기고, 저 너머의 미지의 차원으로 넘어가겠어.
소녀는 부서진 검을 붙잡고 다짐했다.
자, 이제 운명의 시간은 왔도다.
585
이름없음
2022/03/13 21:29:30
ID : a5QoFdCnSJP
0
노래(가사있는거) 무채색 달
586
이름없음
2022/03/14 22:19:33
ID : LcGk1a4IK3U
0
만화방의 구식 라디오를 통해 들었던 노래는 이런 노래가 아니었다. 징징거리고, 들썩이게 하는 오색찬란한 무지갯빛 노래. 이처럼 색도 빛도 없는 무채광의 노래가 아니었다. 나는 하염없이 한개의 씨디와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번갈아보며 울컥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쓸 수밖에 없었다.
가게를 나오며 나는 생각했다. 나의 찬란한 어린 날의 노래여, 이건 그대의 노래인가. 한순간 지문이 덕지덕지 묻은 씨디가 빛을 받아 일렁임을 내었다. 아아, 보름이구나. 고갤 들어 누런 달을 바라본 나는 또다시 울컥했다. 눈에 물이 고였다.
이젠 영영 되찾을 수 없는 나의 찬란이 못내 서러웠다.
587
이름없음
2022/03/14 23:59:10
ID : 9BBtctusoZi
0
꿈, 희망, 행복
588
이름없음
2022/03/16 01:06:10
ID : mMlvg1zRyE5
0
나는 오늘도 희망을 품고 꿈속으로 다이브하죠
당신이 나올거라는 실낱같은 그런 호프를 가지고
하지만 나는 알아요, 당신은 그곳에 애브센트하다는 것을
아무리 기도해도 내게 어드미트 되지 않은 만남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모스트하게 알고 있지요.
그럼에도 나는 내일 밤에도 프레이할거에요.
신에게, 전지전능한 애니원에게 어떻게든 말예요.
당신이라는 행복을 만나게 해달라고, 신시어하게.
(현대시에서 영어독음 그대로 시에 쓰는게 갑자기 떠올라서 따라해봤당 히히)
589
이름없음
2022/03/16 01:19:40
ID : mMlvg1zRyE5
0
지긋지긋, 짝사랑, 키스
590
이름없음
2022/03/18 08:35:49
ID : 2IE2pU0rbB8
0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을 끝내겠다 막연히 각오했을 때엔 이미 네게 물들어 있다는게 억울해 울었다. 난 원래 본모습이 무엇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네 분홍 아크릴 물감에 덧칠해져 있는데 네 손수건에는 내가 흘린 눈물 몇방울이 축축함을 나타낼 뿐이다. 아니지. 사랑따윈 하는게 아니랬는데, 사랑을 해서. 다 사랑 탓이다.
빗속의 그녀는 차가웠다. 꿈속의 그녀일지도 모른다. 비가 내렸고 나는 왜 이곳에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묘한 분위기의 어디론가 사라질 것만 같은 여자는 희미한 미소로 내게 말했다. 안녕, 날 좋아하는 사람아. 이제는 안녕.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이 기대를, 이 사랑을. 그러니 꿈이로구나. 마주하지도 못한 사별의 외침은 비참했다. 첫사랑은 원래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니,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녀가 다정한 눈으로 다가온다. 허릴 숙여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멍하니 보는 내게 입맞춘다. 그녀의 입술은 거칠었고 입은 물컹했다. 박하향이 났다. 내게 쥐어줬던 박하사탕처럼 시원하고 씁쓸했다. 첫사랑의 키스는 박하맛.
591
이름없음
2022/03/18 08:54:34
ID : 5Wpe1ClB9gY
0
양복 담배 권총
592
이름없음
2022/03/18 19:36:03
ID : mMlvg1zRyE5
0
그는 항상 양복을 입고 있어요.
조금 더운 날조차도 두꺼운 양복 재킷을 입고 있는게 조금 의아할 정도로요.
하지만 그는 넥타이를 매지 않아요.
물어보진 못했지만, 아마 불편해서가 아닐까요.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요.
그의 근처에만 가면 맡아지는 아주 옅은 향수 냄새엔 담배 냄새가 묻어있지 않아요.
하지만 그는 술을 꽤 좋아해요.
물어보진 못했지만, 아마 취하는게 좋아서겠죠.
나는 그를 사랑해요.
나는 양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를 사랑하지만
어쩌면 양복을 입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 그도 사랑할거에요.
내가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내게 사랑을 속삭여주지 않아요.
하지만 만약 그가 사랑한다고, 내게 말해주기만 한다면.
나는 그에게 권총조차도 들려줄 수 있어요.
내 관자놀이에 총구가 들어와도,
나는 기쁘게 웃을거에요.
593
이름없음
2022/03/18 21:30:57
ID : q1Cjg3RBcGn
0
마왕, 공주, 장미꽃
594
이름없음
2022/03/18 21:51:25
ID : mMlvg1zRyE5
0
공주는 마왕을 사랑했어요.
어리고 해맑은, 이제 20살이 된 아름다운 아가씨.
그녀는 언젠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던 그 비참한 왕을 사랑했답니다.
그래서 마왕에 공주를 납치해 갈때엔
그녀는 그보다도 먼저 제 창문을 열었어요.
마왕은 제 목에 감기는 따스한 팔에 놀라고 말았답니다.
둘은 그렇게 궁전에서 도망쳤어요.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공주와 묵묵히 그 말을 들어주는 마왕.
그때부터 마왕은 공주를 사랑했을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왜 모르냐고요?
아주 용감한 용사가 나타났거든요.
용사는 새카만 기운을 내뿜는 마왕에게 칼을 휘둘렀어요.
하지만, 아아, 그 칼을 맞은 것은 공주였답니다.
제 몸을 날려 마왕을 지켜낸 공주는
마지막으로 하얗게 웃으며
눈을 감고 말았답니다.
그렇게 제 인생에 유일하게 핀 장미꽃을 잃은 어린 마왕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조차도 아무도 모른답니다.
595
이름없음
2022/03/19 03:16:13
ID : TSHB9ijba61
0
겨울, 추억, 사랑
596
이름없음
2022/03/25 01:38:05
ID : liqqrs2rdTQ
0
날이 추워지면 우린 바다를 찾곤 했다. 바다를 좋아하지만 사람이 많은 건 싫어 겨울 바다를 찾아 차가운 바닷 바람을 맞는 것을 즐겼다. 차가운 바람이 내 안을 가득 체우고 온 몸이 시려와도 너와 맞잡은 손은 너무나도 따뜻했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너와의 추억은 바다 없이는 말할 수 없다. 파도 소리와 너의 노랫소리, 바닷물을 머금은 커플링, 노을 색의 조개 껍데기 너와 겨울 바다를 찾은지 벌써 몇년째인지 모르겠지만 너와의 모든 추억이 참 아름다웠다.
597
이름없음
2022/03/25 03:07:17
ID : 5UY7e7uqY78
0
햇살, 죽음, 놀이공원
598
이름없음
2022/03/25 04:13:20
ID : ctzgqqqjbfX
0
하얀커튼이 펄럭인다.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셨다.
꺄아아악!
비명소리가 들렸다. 놀이기구를 타기위해 줄을 섰다.
"진짜?"
굳이 여기까지 따라온 동수가 묻는다.
세상에서 제일 높게 올라간다는 x열차, 하늘 가까이 다가갈 생각에 두근거린다.
두근두근 심장이 박동한다. 터질거 같다.
"진짜로..?"
안전벨트가 내려가고 몸을 옥죄었다.
레일을 타고 열차가 하늘로 올라간다.
더 높이! 더 높이! 더 더!
팔목을 잡은 동수의 압력이 더 세진다.
뜨거운 태양 푸른 지평선
가장 꼭데기에서
나는 나를 옥죄는
한줄기 따스한 햇살을
놓는다.
599
이름없음
2022/03/25 11:01:02
ID : GnyMo40twMo
0
빛, 죽음, 영원
600
이름없음
2022/03/25 12:45:57
ID : ctzgqqqjbfX
0
"신랑, 신부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아껴주며 위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 "네, 맹세합니다."
반지를 교환하고 두 손을 마주잡는다. 결혼준비한다고 예민해져서 다툰게 어제인데.
마주잡아 오는 따뜻한 온기를 꽉 붙잡았다..
일렁이는 눈동자가 오로지 나만을 보며 말했다.
"사랑해."
너도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일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차오르는 만족감을 너도 느끼고 있을까. 환한 조명이 우리만을 비추고 있는 것같았다.
너의 얼굴이 가까워 지려는 그때.
박수소리와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짝짝짝
"브라보~"
"축하합니다! 고객님~ 이로서 모든 잠금이 풀렸군요."
"이제부터 시크릿 루트 ; 영원한 사랑이(가) 시작됩니다."
어..?
주례사의 중저음 목소리가 발랄하게 울리며
인지 부조화가 일어났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어..어.. 하는 사이 환한 빛이 나를 집어삼키고, 세상이 하예진다.
붙잡은 온기가 덧없이 사라져가고 너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아.
그런데 너, 왜 웃고 있어..?
601
이름없음
2022/03/25 12:59:50
ID : q1Cjg3RBcGn
0
과거, 숙적,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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