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0
유서
참 힘들고도 예쁜 삶이었습니다. 나 꽤나 열심히 달려온 듯 합니다. 많은걸 이뤄냈고 이제서야 행복해졌다 생각한 순간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내가 과연 원한 삶일까 라는 생각에 밤새 뜬눈으로 지샜습니다. 혹시 아실까요. 방 너머로 들리던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재잘거리던 놀이터의 소음이 날 살아가게 했었습니다. 어쩌면 짧고, 어쩌면 길었던 나의 작은 인생이 누군가에겐 짐이 되었을 수도, 운 좋은 만남이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한평생 도망가기 바빴던 난 이제 모든걸 내려놓고 나만을 위한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누군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해요. 겁쟁이라 욕해도 좋습니다. 그저 한때 웃는게 예뻤던 겁쟁이로 기억해주세요. 엄마의 웃는 얼굴을, 아빠의 자랑스러운 얼굴을, 내 사랑의 얼굴을 보지 못한단 생각에 조금은 눈물이 납니다. 유서는 역시나 오글거려야 조금이라도 웃겠지요? 그래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주저리 주저리 적어내려봅니다. 사랑해요. 모두를 너무나도 진심을 다해 사랑했고 난 후회하지 않습니다.
행복하세요. 제 몫을 대신 살아주려 하지 말고 모두 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을 살다 오시길 바랍니다. 딱 100년씩만 더 살다 오세요. 제가 마중나가 있겠습니다. 너무 빨리 오진 말아주세요. 오래오래 살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와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전 수국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니 제가 생각나는 날 수국 하나 들고 절 보러 와주세요. 그 색이, 그 향기가 오는 길 외롭지 않게 하길 바래요. 꽃을 두고 가는 길 조차 잔향이 남아 가득 채워지길 바랍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꽤나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그의 답을 결국엔 찾지 못하고 이렇게 갑니다. 너무 오래 슬퍼하진 말아주세요. 너무 많이 울지도 말아주세요. 딱 3일만 절 기억하며 행복을 빌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언제나 함께 하겠습니다. 각자의 삶을 응원합니다.
또 만나요. 그 계절, 그 어딘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