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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앵커판 관전스레★ (514)
20.🐞허물을 벗고🐜비로소🦋 (404)
백마 탄 기사님과 평생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를 동경했어요.
이건, 제 행복한 결혼 생활 이야기니까요.
* 개그성 앵커 지양
* 스레주 현대물 처음 써봄 주의
* 과정이야 뭐가 됐든 주인공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게 스레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잠시 산책을 나가기로 했습니다. 너무 멀리 가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근처를 한 바퀴 돌며, 선물로 줄 핸드크림을 사는 일까지.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밖으로 나서자, 공기는 살짝 차가웠지만 기분 좋게 맑았습니다. 우중충했던 그저께와는 달리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투명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걷다 보니 H&B 스토어에 다다르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습니다. 바로 그 길, 제가 늘 지나치며 눈길을 주던 꽃집이 있는 거리였습니다.
저는 괜히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괜히 더 잘 보이고 싶고, 괜히 더 정성을 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물 하나를 고르는 일조차, 오래도록 망설이며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찬우 씨는 제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다가 가끔 웃어주었습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조금의 긴장도 함께 남겼습니다.
"핸드크림 하나만 주는 건 별로일까요...?"
제가 조심스레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더 주면 부담스러워 할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찬우 씨는 계산대 앞에서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소영이랑 같이 먹어요."라는 짧은 말과 함께.
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에 어쩐지 미묘한 예감 같은 것이 섞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일이 예고 없이 다가올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가게를 나서자, 문 위의 작은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냈습니다.
눈길은 자연스레 꽃집 쪽으로 향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꽃들이, 조용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1. 구경하러 갑니다.
2. 다른 것을 하러 갑니다.
"자주 가던 그 꽃집이에요?"
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찬우 씨는 자연스레 제 손을 잡았고, 그 따뜻한 온기에 이끌려 저 또한 그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꽃집 문을 밀자, 잔잔한 종소리가 청명하게 울렸습니다. 안쪽에는 그저께와는 달리, 다리에 깁스를 한 점장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목발이 그녀의 곁에 기대어 있었고, 그 옆에서 이유찬 씨가 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었습니다.
"어서옵쇼- 아, 손님."
"안녕하세요...!"
"어머, 아가씨. 오랜만이네요!"
그 말이 들리자마자, 저는 순간적으로 긴장했습니다. '아가씨'. 찬우 씨가 그런 호칭을 싫어한다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일부러 만들어 낸 표정이라는 것을 저는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억눌러둔 감정이 그 속에서 일렁이듯.
그리고 그 순간, 그의 팔이 제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이유찬 씨의 시선이 찬우 씨의 손끝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옆에는 아가씨 남편이에요?"
"네, 언제 한 번 말씀 드렸었죠?"
"어쩐지 잘 어울리더라! 남편이랑 같이 오는 건 처음이잖아요?"
저는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아주머니의 밝은 말투가 공기를 따뜻하게 채우고 있었지만, 그 안에 흐르는 침묵의 기류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찬우 씨의 시선이 이유찬 씨 쪽으로 미묘하게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유찬 씨의 소매 끝에서 살짝 드러난 문신 자국. 저 또한 전부터 신경쓰고 있던 것이었지만, 찬우 씨는 저보다 더 많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입니다.
이유찬 씨는 한동안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붕대가 감긴 제 팔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그의 눈빛이 잠시 그 자리에 머물렀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근데, 손님. 팔은 어쩌다가 그렇게 됐습니까?"
...둘러대야 합니다. ‘찬우 씨의 누나가 칼로 그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그건 진실이지만, 여기서 꺼내선 안 되는 말이잖아요.
저는 침을 삼키며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습니다. 그 순간, 찬우 씨의 손끝이 제 어깨 위에서 조금 더 세게 힘을 주었습니다.
뭐라고 둘러댈까요...?
집안일하다가 다쳤다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음... 설거지하다 칼을 놓쳐버려서 그만 베였다고 하자
"집안일 하다가..."
"그 정도로 다친다고요?"
"설거지하다가 칼을 놓쳐 버렸어요. 그러다가 쭉, 하고 베여서..."
이유찬 씨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저는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손끝을 살짝 움켜쥐었습니다.
그때, 옆에 계시던 아주머니께서 환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 주셨습니다.
"아이고, 조심했어야지...! 저도 나이가 드니까, 청소하다가 이렇게 다리 다치고 그랬지 뭐에요."
"그래서 그저께 못나오셨구나...! 지금은 괜찮으세요?"
저는 반사적으로 걱정이 앞서 아주머니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제 어깨는 찬우 씨의 손끝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빠져나갔습니다.
그는 잠시 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꽃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유찬 씨가 다가서려 하자, 찬우 씨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혼자 둘러볼게요."
그 말 속에는 가벼운 미소가 섞여 있었지만, 동시에 조용한 거리감도 느껴졌습니다. 저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따뜻했고, 꽃집 안에는 잔잔한 향이 흩날렸습니다.
그러던 중, 찬우 씨는 압화로 만든 장식품이나 꽃 그림이 새겨진 작은 소품들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윽고 이유찬 씨를 불러 계산을 마치고는 조심스럽게 제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습니다.
보라색 꽃 그림이 그려진 책갈피였습니다. 종이의 표면은 은은하게 반짝였고, 그 위에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은 아주 섬세했습니다. 꽃말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단지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고, 저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찬우 씨는 이미 핸드폰을 손에 든 채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저 잠깐 전화 좀 할게요."
"그러면 그동안 아가씨는 우리랑 잠깐 얘기 좀 하고 있을까요?"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옆 의자를 밀어 주셨습니다.
나무 의자가 마룻바닥을 스치며 내는 소리가 어쩐지 다정하게 들려서, 저는 그 소리에 이끌리듯 천천히 자리에 앉았습니다.
무슨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요?
1. 강찬우
2. 이유찬
3. 꽃집 아주머니
4. 꽃 책갈피
5. 기타
"아까 남편 보니까, 엄청 잘 챙겨주던데~"
"그런가요?"
아주머니께서는 부드럽게 끄덕이셨습니다. 목소리에는 부러움이, 입가에 번지는 미소 속에는 오래된 아쉬움이 살짝 스며 있었습니다.
"우리 남편은 일 바쁘다면서 같이 나와주지도 않거든요. 그래도 이 꽃집, 남편이 차려주기는 했지만..."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그냥~ 사람도 찾고..."
말끝이 흩어졌습니다. 그 미묘한 망설임이 맴돌았습니다. 실종자를 찾아주는 경찰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한결 편하겠지요.
"사는 세계가 서로 엄청 다른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니까 결혼했어요. 속상할 때도 많았지만..."
그 말은 오래된 비밀을 내뱉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저릿해졌습니다. 마치 그 감정이 제 안의 어딘가와 겹쳐진 것처럼요.
무슨 말인지 알고 있다는 듯, 억눌린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위로보다는 공감에 가까운 미소. 그렇게 생각하는 저를, 이유찬 씨는 조용히 바라보았습니다. 시선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리고는 제 옆자리에 앉으며, 마치 혼잣말처럼 툭 던졌습니다.
"계속 속상하게 하는 사람이랑 계속 사는 건 좀 힘들던데."
그러자 아주머니께서 곧바로 장난스레 받아치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전처랑 깨진 거야, 조용히 해."
"윽..."
"좋은 얘기 하는데 함부로 끼어들면 이렇게 되는 거다, 유찬아."
"그게 좋은 얘기였다고요?!"
그들의 대화는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분위기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말끝마다 묻어나는 익숙함과, 그 속의 가까운 거리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 흘렀습니다.
그런 관계는 어떻게 맺는 걸까요. 오랜 시간의 신뢰와 상처들이 서로 맞물려 만들어지는 걸까요? 저는 손에 쥔 책갈피를 천천히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러던 도중,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찬우 씨가 통화를 마치고 들어오는 소리였습니다.
찬우 씨는 잠깐 아주머니와 이유찬 씨에게 시선을 건넸습니다. 그 시선은 짧았지만, 묘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곧 그는 제게 다가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습니다. 찬우 씨의 손끝이 제 손을 감싸며 힘을 주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습니다. 온도가 전해지는 그 감촉이, 어쩐지 묘하게 낯설었습니다.
"잠깐 집에 다시 들렀다 가요. 차도 가져가야 하니까."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점이 없었습니다. 차분하고 어딘가 정제되어 있는 미소에, 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습니다.
"오늘 둘이 데이트 하나보네~"
아주머니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찬우 씨는 잠시 난감한 듯 침묵하다가도,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주머니의 말처럼 '데이트'는 아닌 걸요. 하지만 그런 말은 꺼내지 않은 채, 우리는 인사를 나누며 문을 나섰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찬우 씨는 잠시 제 옆에서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아까 무슨 얘기 했어요?"
그가 불쑥 물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이 질문이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냥, 찬우 씨가 잘 해준다던가... 그런 칭찬이요."
"그런 얘기만 한 것 같지는 않던데."
그 말에는 묘한 단단함이 있었습니다. 장난처럼 들리지만, 눈빛은 웃지 않았습니다.
찬우 씨는 마치 그 대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대화의 모든 부분을 하나씩 꺼내 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무슨 말투로 이야기했는지, 이유찬 씨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저는 그 모든 질문에 차분히, 숨기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안심한 듯 조금 풀렸습니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한 사람처럼요.
...무엇 때문에 안심한 걸까요. 저는 그 생각이 미처 다 닿기도 전에, 그의 다음 말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그 얘기 어떻게 생각해요?"
“어떤... 얘기요?”
“지은 씨라면 살아온 배경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랑 결혼 할 수 있어요?”
찬우 씨의 물음은 차분하게 들려왔지만, 마음은 어쩐지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요...
이미 결혼해서 살아가고 있는걸요
저는 아무것도 없지만 찬우씨라는 멋진 분을 만났다구요
이제까지 달랐던만큼 앞으로 같이가면서 알아가면 되는거죠~ 이런 느낌으로 가자
"이미 결혼해서 살아가고 있는 걸요."
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손을 내밀어 찬우 씨의 손을 천천히 감싸자, 따뜻한 체온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지만, 찬우 씨라는 멋진 분을 만났어요. 이제까지 달랐던만큼 앞으로 같이 알아가면 되잖아요."
제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 말에 찬우 씨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잃은 듯 제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아주 천천히 숙였습니다. 놀람과 기쁨, 그리고 어딘가 묘한 불안이 뒤섞인 표정. 그 표정이 제 마음을 묘하게 간지럽혔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게 늘어졌습니다.
이윽고, 그 사람은 가만히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멋진 사람은 아닐텐데요..."
찬우 씨의 말에는 담담함과 함께 알 수 없는 여운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제 손을 조용히 놓았습니다. 손끝의 온기가 사라지는 순간, 바람이 아주 조금 차가워진 듯했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더니, 손끝으로 제 머리카락을 천천히 매만졌습니다. 손끝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고, 그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 망설임이 묻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조용히 제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물어볼게요."
목소리는 낮고 잔잔했습니다. 저는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
그 짧은 침묵이 오히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했습니다. 그의 눈빛에는 조심스러운 호기심과, 어딘가 슬픈 온기가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지은 씨는 과거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편인가요?"
1. 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2. 아니요, 중요하게 생각해요.
3. (기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까지 살아온 찬우 씨를 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걸어갈 미래에 비하면 덜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할 미래는 언젠가는 과거가 되겠죠.
우리가 함께 했던 과거는 중요하지 않을까요?
.....찬우 씨의 모든 순간이, 중요할 미래이고, 중요한 현재이고, 중요했던 과거였으면 해요.
저를 만나기 전의 과거도, 저를 만나기 위한 과거였다고 생각해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 말을 내뱉을 때, 제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속에는 스스로도 모르게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습니다.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거리 위에서,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습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머리카락을 건드렸고, 그 속에서 저는 제 말의 의미를 천천히 되새겼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찬우 씨의 질문은 낮고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찬우 씨를 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걸어갈 미래에 비하면 덜 중요하니까요."
찬우 씨의 눈이 가늘어졌습니다. 어딘가 묘한 분위기가 스쳤지만, 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마치 그 시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는 듯, 저는 똑바로 그를 마주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할 미래는 언젠가는 과거가 되겠죠. 우리가 함께 했던 과거는 중요하지 않을까요...?"
"..."
그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대화를 품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찬우 씨의 모든 순간이, 중요할 미래이고, 중요한 현재이고, 중요했던 과거였으면 해요."
그 말을 내뱉는 제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떨렸습니다. 하지만 그 떨림은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잠시 세게 불어와 제 머리카락을 흔들었고, 그 틈에서 찬우 씨의 눈빛이 한층 짙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차 근처에 도착하자, 저는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저를 만나기 전의 과거도, 저를 만나기 위한 과거였다고 생각해요."
그 말에 찬우 씨는 짧게 숨을 내쉬더니, 미묘하게 웃었습니다.
"...운명같네요."
그렇게 말하고, 찬우 씨는 천천히 차 뒷좌석 문을 열었습니다. 그 행동에는 자연스러움과 동시에 어딘가 낯선 진심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마치, 타라는 듯이.
시선이 부드럽게 제게 닿았고, 저는 그 눈빛에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가 잠깐만이면 된다는 듯이 미소 지었을 때, 저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마지못해 차 뒷좌석에 올랐습니다.
찬우 씨도 따라서 제 옆에 앉았습니다. 차 문이 닫히자 세상은 고요해졌습니다. 좁은 공간 속은 따뜻했고, 그 따뜻함 속에서 찬우 씨가 조용히 다가와 저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다행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부드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제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었을 때, 살결에 닿은 숨이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따끔한 감각이 스치자 저는 작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제야 찬우 씨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습니다.
"아팠어요?"
목소리는 진심 어린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습니다.
그 움직임 하나에도 시선이 따라왔고, 그는 저를 품에서 놓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딱 하나만이에요. 아무거나 질문해봐요."
"갑자기요...?"
저는 조금 놀란 듯 물었지만,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습니다.
"네, 갑자기요. 뭐든 대답해줄게요. 딱 하나만."
"...정말요?"
"정말요. 무르기 없어요."
...저는 마른 침을 삼켰습니다. 엔진이 꺼진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의 심장소리가 미묘하게 겹쳐 울리는 이 순간 속에서.
무슨 질문을 해야 좋을까요...
(앵커를 미룰 수 있습니다.)
후하후하 은 무슨 질문할거니
찬우 씨와 지은 씨 닮은 아기 보고싶구나
이게 이모의 마음....?

"......언젠가는... 찬우 씨와 저를 닮은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있을까요?"
"..."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차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묵직해진 듯, 숨을 쉬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찬우 씨는 잠시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곱씹듯 침묵하다가, 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정말 그 질문으로 할 거예요?"
그 말에는 놀라움과 망설임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습니다. 마치 '정말 그게 전부냐'고 묻는 듯한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잠시 숨을 고르며, 그저 조용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습니다.
제 대답을 들은 찬우 씨는 저를 끌어안은 채 길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제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만들 수 있냐'는 질문이었으면... 네. 그렇게 답했을 거예요. 내키지 않아도, 가능한 건 가능한 거니까."
"..."
"그런데 '키울 수 있냐'는 질문이면, 얘기가 달라져요. 그것도 제 피가 섞인 아이라면..."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습니다. 무언가 깊은 곳의 기억을 떠올린 듯, 찬우 씨는 제 어깨를 더 세게 끌어안았습니다. 그 순간, 옷 너머로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습니다. 빠르고, 거칠게, 마치 숨을 고르기 어려운 사람처럼.
"...자신이 없네요. 제대로 사랑해줄 자신도 없고, 잘 키울 자신도 없고."
"..."
"그런데, 그 질문은 갑자기 왜..."
그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숨을 들이켰습니다. 그 호흡에는 놀람과 공포가 동시에 섞여 있었습니다. 천천히, 떨리는 손이 제 배로 향했습니다. 손끝이 닿는 순간,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아니죠?"
"저도 모르겠어요..."
"아니어야 해요. 안 생기게 하려고 했는데..."
그날 이후 하루 만에 아이가 생길 리 없다는 걸, 그때의 우리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의 불안은 더 크게 부풀어올랐습니다. 찬우 씨는 두려움에 잠긴 사람처럼 떨고 있었고, 저는 그저 그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그 침묵 속에서 저는 그의 두려움이 제게 전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불안이 우리를 덮어버린 채, 시간은 한참 동안 멈춰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안고 있다가, 찬우 씨는 조심스럽게 손목시계를 확인했습니다. 출발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찬우 씨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혹시 집에서 더 챙겨야 할 물건이 없는지, 제게 묻기도 하고 가방이나 주머니를 더듬으며 확인했습니다. 동작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동시에 약간의 두근거림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는 다행히 많이 진정된 듯 보였지만, 그 눈빛 속에는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차 문을 열기 전, 제 쪽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 시선은 제 얼굴을 향하는 듯하다가, 조용히 제 목 언저리에서 멈추었습니다.
"왜 그래요...?"
"잠깐만요."
찬우 씨는 손을 들어 제 목에 손가락을 댔습니다. 엄지손가락이 제 피부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고, 그 움직임 끝에 약간의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아까 그가 제 목에 얼굴을 묻었을 때,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던 자리였습니다.
그는 그곳을 살짝 바라보다가 난감하다는 듯 숨을 내쉬며, 반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제 블라우스 목깃을 집어, 잠그지 않았던 맨 윗 단추를 단정히 채워주었습니다.
"오늘 이거 풀면 안돼요..."
"네? 왜요?"
"제 말 들어요."
순간 찬우 씨의 얼굴에 살짝 붉은 기운이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그제야 약간 미소를 지으며 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습니다. 그 손끝의 온기가 잠시 제 머리카락에 머물다 사라졌습니다.
그는 조용히 문을 열었고, 잠시 후 우리는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엔진이 켜지는 소리가 들리고, 바퀴가 굴렀습니다.
"안 막혔으면 좋겠는데."
"1시간 걸린다고 했죠?"
"걸어서 1시간이요. 차로는 그렇게까지 걸리지는 않는데... 길이 좀 복잡해요."
창문 너머로 낯선 길들이 흘러갔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이 조용히 스쳐 지나가며, 저는 그 속에서 묘한 불안을 느꼈습니다. 평소 외출이 잦지 않아, 세상은 언제나 낯설고 불투명했습니다.
나중에 그곳에 가서 살게 된다면, 집까지 오는 길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까요. 2G폰으로는 네비게이션조차 작동하지 않을 텐데. 저는 조용히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 길을 혼자서 찾아올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일렁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달리는 차의 진동 속에서 그저 미세하게 흔들리는 제 손끝만 바라보았습니다.
우선 지금은...
1. 대화를 합니다.
2. 음악을 틉니다.
3. 소영 씨에게 전화를 합니다.
4. (기타)
우선 지금은, 음악을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살며시 눈치를 보며 라디오 쪽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고 있던 찬우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허락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음악을 잘 모르기도 하고, 자주 듣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무난해 보이는 채널을 골랐습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부드럽게 울렸습니다. 담백한 보컬의 목소리가 퍼져 나가며, 긴장으로 굳어 있던 제 어깨를 천천히 풀어주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발끝을 까딱이며 리듬을 타 보았습니다. 이 정도라면, 방해되지 않겠지요. 조금 오래된 노래, 조금 촌스러운 사랑 이야기. 하지만 그 단순한 감성이 왠지 좋았습니다.
찬우 씨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 보였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어쩌면 음악을 잘 고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곡이 끝나자, 라디오 진행자의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OOO 씨가 부른 <...> 들으셨습니다. 요즘 노래가 아닌데도, 이 노래는 참 묘하게 마음을 건드리네요.]
그 멘트에 맞춰 고개를 살짝 끄덕였습니다. 별 뜻 없는 공감이었지만, 목소리의 여운이 이상하게 마음에 닿았습니다.
[그 시절 소녀들의 오빠였던 가수 OOO 씨도 이제는 아이 아빠라고 하시더군요.]
가벼운 농담 같은 말이었는데도, 그 순간 마음이 콕콕 찔렸습니다. 불편함이 목에 걸려,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찬우 씨는 아무 말 없이 아무 말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치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건데, 어째서 서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요.
저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왜 저를 보고 있었던 걸까요. 그 눈빛에 무슨 의미가 있길래...
[어릴 땐 몰랐는데, 이제는 아빠의 연애 시절 이야기가 괜히 궁금해져요. 그분들도 우리처럼, 이런 노래 들으며 사랑에 빠졌겠죠.]
“...”
연애라... 그 단어가 낯설게 맴돌았습니다. 연애에 대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빠의 연애 시절 이야기가 궁금해진다는 말은 저와는 너무 먼 세계의 언어처럼 들렸습니다. 어쩌면 그런 호기심의 시작이란, 저 같은 사람과는 인연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표정이 조금 굳은 걸 알아차린 걸까요. 찬우 씨는 시선을 잠시 제게 두더니, 조용히 채널을 돌려버렸습니다. 음악이 바뀌고, 어딘가 낯선 정적이 차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신호등이 바뀌기 전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 손을 살며시 잡았습니다. 그 손끝에서 느껴진 온기는 부드럽고 확실했습니다.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이.
그 따스한 감각이 제 안의 긴장을 천천히 녹여내자, 어느새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차 안의 온도, 잔잔한 엔진 소리, 그리고 그의 손의 온기 속에서, 저는 아주 잠깐 안심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습니다.
...꿈을 꾼 것 같습니다.
—"백 밤만 자면 돌아올게."
그 한마디는 어린 시절 제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그 말 하나를 품고, 저는 매일 밤을 세어가며 잠들었습니다. 창문에 달이 차오를 때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밤을 셌습니다. 생일을 혼자 보낼 때도, 넘어져 무릎이 까져 울던 날에도, 빗속을 헤매던 저녁에도... 백 밤만 자면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제 하루를 버티게 했습니다. 그러나 백 번째 밤이 지나고, 또 백 번의 백 밤이 지나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평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
눈을 뜨자마자 보였던 것은 낯설 만큼 가까운, 따뜻한 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 손이 찬우 씨의 것임을 깨닫고 나서야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았습니다.
“일어났어요? 이제 막 깨우려고 했는데.”
“저... 얼마나 잤어요...? 지금 어디에요?”
“다 왔어요. 소영이한테 내려오라고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먼저 깨우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차 안에는 잔잔한 공기가 흘렀습니다. 저는 허둥지둥 손거울을 꺼내 들고,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번진 눈화장을 정리했습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제 얼굴은 약간의 피곤과 긴장이 뒤섞인 모습이었고, 아무리 단정히 만져도 완벽히 정돈되지는 않았습니다.
“어제 밤도 샜으니까, 피곤했나봐요.”
“찬우 씨는 괜찮아요?”
“이틀 정도는 안자도 괜찮아요.”
그 대답에 저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습니다. 괜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손가락으로 운전대 위를 가볍게 두드리는 모습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습니다. 피로는 쌓이다가, 언제 한 번 갑자기 터지는 법이니까요.
찬우 씨가 소영 씨에게 전화를 건 지 몇 분 되지 않아, 멀리서 한 소녀가 다급하게 뛰어와 차 뒷문을 열었습니다. 순간 공기가 환하게 바뀌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소영 씨였습니다. 그 밝은 목소리에 저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제 귀에도 겨우 들릴 정도였습니다. 마음이 위축된 탓이겠지요.
“지은 언니 맞죠? 삼촌 결혼했다는 소식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갑자기 소개해준다고 해서, 저 엄청 기대하고 왔어요!”
저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찬우 씨와 결혼한 지 2년, 지금까지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니.
그리고 들었던 인상과는 달리, 그녀는 눈부시게 활기찼습니다. 굳이 제 말이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생기가 넘쳤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언니 만나는 겸, 삼촌이 남편으로서 잘 하고 있나 볼 수 있겠죠? 그렇지, 삼촌!”
“.........밥 뭐 먹을래.”
“우와, 말 돌린다.”
“...지은 씨, 식사 메뉴 어떤 걸로 할래요... 아니다, 둘이서 정해요.”
그 말에 소영 씨는 제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제가 먼저 제안하면, 다 들어줄 것만 같은... 그런 확신에 찬 얼굴이었습니다.
외식 메뉴로는 무엇을 제안해볼까요...
"돈까스 어때요?"
"맛있겠다, 좋아요!"
짧은 대화 한마디에, 찬우 씨는 주저 없이 근처의 돈까스 전문점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창밖으로 스치는 햇빛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고, 그 속에서 저도 조금씩 긴장을 풀었습니다. 낯선 밝음에 서서히 익숙해지자, 제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소영 씨가 먼저 말을 놓자고 제안했고, 저는 잠시 망설이다가 수락했습니다.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의 얼굴이 햇살처럼 환했습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고소한 기름 냄새와 따뜻한 공기가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적당히 메뉴를 고르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소영이는 장난스럽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찬우 씨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삼촌. 언니는 어쩌다가 나랑 같이 살게 된 거야?"
"나도 일 바쁘기도 하고... (여자 이름. 성 없이 이름만) 씨가 너 혼자 외롭지 않겠냐고 해서."
"진짜? 이모가?"
그 짧은 대답 하나에, 소영이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번졌습니다. 마치 잊고 있던 빛이 다시 찾아온 듯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순간, 찬우 씨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감추고 있는 사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눈빛엔 분명한 애정이 스며 있었습니다. 그건 거짓이 아니었어요.
"이모라면..."
"우리 엄마의 언니에요."
소영이는 조심스레 말을 잇다가, 이내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이모는 나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럴리가. 잘 부탁한다고 나한테 직접 연락까지 왔었는데. 씨가 일이 바빠서 그래."
찬우 씨의 말은 단호했지만, 그 속에는 부드러운 온기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진심이 담긴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습니다. 숨겨진 무언가가 있더라도, 그가 소영이를 아끼는 마음만은 분명했습니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돈까스 접시들이 테이블 위에 놓였습니다. 고소한 냄새가 허공을 가르며 퍼져나갔습니다. 바삭한 튀김 옷을 나이프로 자르자, 따뜻한 김이 일어났습니다. 그 온기 속에서 어색함도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무슨 주제로 대화 할까요...
1. 찬우 씨와 소영이의 관계
2. 씨에 관해서
3. 결혼 이야기
4. (기타)
"삼촌이랑 언니는 어떻게 결혼했어요?"
소영이의 목소리는 유난히 맑고 가벼웠습니다. 젓가락을 잠시 내려두며 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찬우 씨를 바라보았습니다.
찬우 씨는 물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습니다. 유리잔이 식탁 위에 내려앉을 때 나는 작은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결혼하자고 했어."
"진짜?!"
그 대답이 이렇게 솔직하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마 소영이가 상상하는 결혼의 이야기는, 꽃길 위를 함께 걷는 반짝이는 장면일 테지요.
하지만 우리의 시작은 그것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초면인 줄 알았던 날, 결혼하자는 말이 흘러나왔고, 그걸 또 받아들인 사람이 저였으니까요.
"그때 그렇게 말 안 했으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찬우 씨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습니다. 그 말은 오래된 기억을 두드렸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육교에서 좋지 않은 생각까지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개를 살짝 돌려 찬우 씨를 보니, 그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오래 좋아했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마치 얼굴을 식히듯 다시 물잔을 들었습니다. 식당 안은 점심시간의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소리가 멀어졌습니다.
소영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찬우 씨가 눈을 피하지 못하게 쫓으며 물었습니다.
"어떤 점이 좋았는데?"
"그냥 자꾸 신경이 쓰인다던가... 생각이 나서..."
"그래서?"
"...정신 차리고 보니까 틈 날 때마다 찾아가고 있었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찬우 씨는 고개를 깊게 숙였습니다. 손끝이 잔의 물방울을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괜히 저까지 얼굴이 달아올라, 아무 말 없이 샐러드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습니다. 상큼한 드레싱의 신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데, 마음 한켠이 괜히 저릿했습니다. 소영이의 시선이 제게로 옮겨오는 게 느껴졌고,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얼굴에 다 드러난 것 같았습니다.
"언니는요? 삼촌 어디가 좋았어요?"
찬우 씨가 소영이를 말리려는 듯 했지만, 그 행동은 어딘가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말릴 듯 말리지 않는, 묘하게 기대가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는 걸요.
어떻게 대답할까요?
찬우씨는 친절하고 멋진 사람 다른 면도 좋지만 행동 하나하나에 나에 대한 사랑이 담긴게 가장 좋았다
"다른 면도 좋지만, 행동 하나하나에 나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어. 그게 가장 좋아."
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마음에 걸리는 일들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보다도 따뜻한 무언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잔잔하게 번졌습니다.
차가운 물잔의 표면을 따라 맺힌 이슬처럼, 복잡한 감정들이 서서히 녹아내렸습니다. 사랑이라는 건, 꼭 완벽해서가 아니라, 불안함 속에서도 서로에게 닿으려는 마음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소영이는 눈을 반짝이며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제 말에 담긴 온기를 그대로 느끼는 듯했습니다. 반면 찬우 씨는 조용히 물컵을 매만지며, 아직도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유난히 조심스러워서, 오히려 마음이 더 깊이 느껴졌습니다.
"친절하고 멋진 사람이야, 찬우 씨는."
"너무... 너무 띄워주는 것... 같은데요..."
숨기려 했지만, 찬우 씨의 귀끝은 금세 붉게 물들었습니다. 그 미세한 변화가 이 공간의 공기를 조금 더 부드럽게 바꾸었습니다.
소영이는 돈까스를 한 입 베어 물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찬우 씨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시선에는 짓궂음과 애정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에이, 그럴 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야!"
"..."
"뭐야~ 결혼한지 2년이나 됐으면서."
찬우 씨는 잠시 고개를 들더니, 조심스레 중얼거렸습니다.
"그러게, 2년이나 됐는데..."
식당의 창문에서는 부드러운 햇빛이 스며들었습니다. 따스한 공기 속에 기름 냄새와 달큰한 소스 향이 은은하게 섞여 있었습니다. 젓가락이 접시를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묘하게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 평범한 소리들이 오히려 저를 안정시켰습니다.
점심 식사는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잡담과 농담이 오가는 속에서 공기 중에는 왠지 모를 안도감이 감돌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그 평범한 순간이 오히려 더 특별하게 느껴져서... 이 평범한 시간이 오래도록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찬우 씨는 저와 소영이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미소는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해주었습니다.
소영이는 웃음소리가 가볍게 울릴 정도로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저 아이는 원래 그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그녀를 웃게 만든 걸까요.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근처의 작은 카페로 향했습니다. 메뉴판을 바라보며 서 있자니, 커피 향과 갓 구운 빵 냄새가 은은히 공기 속에 가득 번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페 직원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습니다. 저희를 보는 것도 같았지만, 분명히... 유난히 찬우 씨에게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성별) 직원이었는데, 이유를 짐작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샷 세 번 추가해서."
"삼촌, 무슨 카페인 중독이야?!"
찬우 씨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말 대신 그 미소가 피곤함을 감추는 듯했습니다. 어젯밤에는 잠을 자지 못했으니까요. 생각해보니 최근 잠을 자는 모습을 거의 못봤는데, 요즘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스쳤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마음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너는 뭐 마실래."
"음... 난 딸기라떼."
"지은 씨는요?"
저는 고민하다가 를 주문했습니다. 자리에 앉아 조용히 대화를 이어가며, 저는 여전히 시선 한 줄기를 느꼈습니다. 카운터 쪽을 힐끔 보니, 아까 그 직원은 여전히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이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때 찬우 씨의 휴대폰이 진동했습니다. 화면을 본 찬우 씨의 표정이 잠시 흐려졌습니다. 눈가가 아주 미세하게 찡그려지는 것을 놓치지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봤는데 갑자기 미안해. 급하게 자리 좀 비워야겠다. 회사에서 갑자기 불러서..."
"오늘 휴일인데도?"
"사회 생활이 원래 그렇지..."
그의 말에는 건조한 웃음이 섞여 있었습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다독이려는 표정에 가까웠습니다. 웃을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늘 그렇게 괜찮은 척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잠시 후, 그는 남은 음료를 한 모금에 비우고 가방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는데... 끝나면 연락하고 올게요."
"잘 다녀와요..."
그의 뒷모습이 문가로 멀어지는 동안, 분위기는 이상할만큼 조용해졌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리고, 그 순간부터는 완전히 소영이와 저,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괜히 소매를 매만지며, 자리의 공기를 정리하듯 손끝으로 테이블을 쓸었습니다.
1. 찬우 씨와 소영이의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눕니다.
2. 유진 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3. 화장실에 다녀오는 척, 직원을 떠봅니다.
4. 기타
"그런데, 찬우 씨랑 소영이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
저는 조심스레 물어보았습니다. 분위기를 조금 풀고 싶기도 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기도 했습니다.
"저 6살 때요. 엄청 오래 지났죠?"
소영이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 미소 속에는 오래된 기억이 부드럽게 스며 있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이라니, 그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이 알고 지냈다는 것이 왠지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어떻게 만났는데?"
"집에서 엄마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는 거에요. 삼촌이었는데, 엄마가 보냈다면서... 그 때는 엄청 수상했어요."
소영이는 그때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습니다. 너무 놀라고 긴당해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며. 그 시절의 작은 집,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남자, 그리고 두려움에 굳어버린 아이의 시선이 그려졌습니다.
그때의 찬우 씨는 방 한가운데 앉아 물을 떠달라 하고, 자기소개를 하자며 어색하게 웃으려고 애썼답니다. 그 서툰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소영이는 그날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다가, 마침내 '엄마'가 돌아와 사정을 설명해준 뒤에야 찬우 씨의 말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안도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엄마는 바쁜 사람이었고, 찬우 씨에게 어린 소영이를 잠시 맡길 수 있겠냐며 무리하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 부탁이 시작이 되어, 그는 몇 번이고 그 집을 찾았고, 나중에는 함께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괜히 실례가 될까 싶어 저도 그저 조용히, 마음속으로만 짐작했습니다. 어쩌면 한부모 가정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보다도, 세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미 가족처럼 단단히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더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몇 년 정도 같이 살았는데... 어느 날 삼촌이 혼자, 갑자기 엄청 무서운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어요. 엄마는 안돌아오고..."
소영이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듯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숨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찬우 씨는 그날, 어린 소영이 앞에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고 합니다.
— "나연 씨는 이제 안돌아올 거야. 그런데 너 버린 건 정말로 아니야. 이제... 내가 돌봐줄게. 내가 안전하게 돌봐줄 거야."
그 낮은 목소리에는 책임과 슬픔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나연 씨'는 소영이의 엄마였겠지요. 정말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그 말의 무게가 제 가슴에도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그 뒤로 찬우 씨와 소영이는 몇 년을 함께 지냈고, 또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몇 해가 지나, 찬우 씨는 따로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쁜 일정 탓이라지만, 연락은 꾸준히 이어졌다고 했습니다. 다만 저와 결혼했다는 사실은 그가 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예전부터 이유 같은 건 말 하나도 안해주는 거 있죠. 저, 그래도 많이 컸는데."
그 말에 저는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삼켰습니다. 씁쓸한 맛이 입안에 번졌지만, 묘하게 따뜻했습니다. 저 혼자만을 믿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었구나, 하고 조금은 안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침묵을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은 소영이겠지요.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소영이가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맞다, 집에 삼촌 옛날 사진 있는데. 보러 갈래요?"
그러나 저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카페 구석에서 느껴지던 그 시선이 아직도 마음 한켠을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까보다 덜하지만, 여전히 그 직원이 우리를 힐끔거리며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저와 대화할 기회를 엿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무시할까요, 아니면 몰래 찾아갈까요. 그것도 아니면...
"..."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 직원은 계속해서 우리를 힐끔거리는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카페의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커피 머신의 김이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데도 그 사람이 계속 신경 쓰였습니다. 주변 테이블을 닦던 그 직원은 고개를 숙인 채 우리 쪽을 자꾸 훔쳐보았습니다.
저는 결국 마음을 다잡고 그녀를 불렀습니다. 살짝 떨렸지만, 당당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단지, 낯선 긴장감이 제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저기,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시던데... 왜 그러시는 거에요?"
그 직원은 제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소영이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안쪽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짧은 순간의 공기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습니다.
소영이는 무언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괜히 말 한마디 없이 제 앞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마치 제가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듯이요.
잠시 후, 직원이 돌아왔습니다. 손에는 작게 접힌 쪽지 한 장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슬쩍 제 앞에 그 쪽지를 내려두었습니다.
소영이가 눈치채지 않도록 몰래 펴보니, 그 안에는 짧지만 무거운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같이 있었던 남자가 강찬우 맞죠? 제 여동생이 불법촬영 피해자에요. 연락 주세요.
(직원 이름) 010-XXXX-XXXX'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찬우 씨는 그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일까요.
"언니...?"
소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급히 쪽지를 접어 가방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평온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마 티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영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웃어 보였고, 우리는 카페를 나와 함께 걷기 시작했습니다.
햇살이 참 야속했습니다. 따스하고 평화로운 빛이, 그림자를 기울여 놓았습니다.
소영이가 사는 곳은 찬우 씨도 예전에 살았던 곳이라고 했지요. 찬우 씨가 쓰던 방을 나중에는 제가 쓰게 될 예정이라고, 소영이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녀는 걷는 내내 사소한 이야기들을 이어갔습니다. 저와 함께 살게 되면 아침은 어떻게 먹을지, 파자마를 입고 진실게임을 한다면 과자는 무엇으로 할지, 책상에는 새로운 사진을 찍어서 두면 좋겠다고... 그 말들이 다정했지만, 어쩐지 노력의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집은 생각했던 그대로였습니다. 찬우 씨와 살던 집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두 사람이 지내기에는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와 정갈한 소품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소영이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사진이 혹시 더 있나 찾아볼게요. 편히 쉬고 계세요!"
"그럴까?"
"원하는대로 둘러보셔도 되고요. 삼촌 예전 방까지, 정리도 다 해놨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말대로, 집은 먼지 하나 없을 만큼 깨끗했습니다. 정돈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런 아이에게 정말 가정부가 필요하기는 한 걸까요. 외로울까 봐, 단지 그 이유 때문이라면... 왜 하필 저였을까요.
그 의문이 마음속 깊은 곳에 고요히 가라앉은 채로, 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어디를 둘러볼까요?
1. 거실
2. 주방
3. 찬우 씨가 쓰던 방
4. 소영이의 방
5. 욕실
일단 이걸 말하는 시점부터 스토리텔링이 박살나긴 한 것 같은데...
스레주 혼자만 알고 있으니까 레더들이 읽기에는 어색할 수도 있는 부분 같아서 얘기하는 tmi (괜히 혼자 찔려서 쓰는거 맞음)
1. 매일매일 이벤트 같은건 정해져 있어요
앵커에 따라서 이벤트가 변할수도 있긴 한데 기본적으로 그래도 주변인물 행동패턴은 정해져 있다! 그래서 스레주 마음대로 갑자기 연출하는 이벤트는 없습니다 (쪽지라던가)
2. 찬우씨 안그래보여도 현재진행형으로 철저하게 ★공략★당하는 중
미연시? 성공적. 다만 사람이 너무 쑥맥임
3. 스레주가 봐도 현대물 치고는 너무 다이나믹하다
킹정합니다
4. 등장인물들 행동패턴이 어색하다?
찬우씨=얼굴에 다 티나서 거짓말 잘 못함
지은씨=눈치 엄청 빠름
소영이=주변이 잘 안보이는 편
이게 서술이 잘 안돼서 그렇게 느껴질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거실에는 많은 물건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벽에는 작은 그림들이 가지런히 붙어 있었고, 그 안에는 섬세한 선과 부드러운 색감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직접 그린 거야?"
"취미로요..."
소영이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시선을 피했습니다. 그 미소에는 조용한 자신감이 느껴졌습니다. 취미라고 하기에는 붓 자국이 부드럽고, 색감의 조화가 정갈했습니다.
거실 한켠에는 노트북과 책들이 얌전히 놓인 책상이 있었습니다. 노트북에는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었지만, 여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소영이는 그것이 찬우 씨가 대학생 때 쓰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꾸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녀는 "아직 잘 되는데 굳이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는 절약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오래된 기계 하나에도 누군가의 시간이 담겨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의 말투였습니다.
책상 구석에는 소설책과 문제집들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단정히 정리된 그 배열 속에서, 저는 규칙적인 습관과 진지한 의지를 보았습니다. 학교 교재는 아니었지만, 스스로 공부하며 길을 만들어가는 흔적들이었습니다.
"검정고시?"
"네, 집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소영이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말 속에는 어딘가 단단한 결심이 숨어 있었습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연 씨도, 찬우 씨도 소영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소영이는 어린이집에 다녔을 때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만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설명이라기보다는, 이미 오래전부터 받아들여진 사실처럼 들렸습니다.
그녀는 지금 검정고시를 준비 중이라고 했습니다. 초등 졸업 시험도 아직 치르지 않았지만, 언젠가 한꺼번에 시험을 보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어쩐지 막연하게 들려, 조용히 책표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습니다..
"사진 찾았어요...!"
소영이의 목소리가 밝게 튀어 올랐습니다. 손에 쥔 것은 길거리 포토부스에서 찍은 네 컷 사진 한 장과, 증명사진이 든 봉투 하나뿐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찬우 씨는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고, 눈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습니다. 지금의 부드러운 인상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컷 사진 속에서의 찬우 씨는 어딘가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사진 찍히는 것이 어색한 사람 특유의 경직됨 속에서도, 그 안에는 미묘한 따뜻함이 스며 있었습니다. 렌즈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진 속에는 찬우 씨뿐 아니라 어린 소영이와 낯선 여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나연 씨라고 했습니다. 사진 속의 나연 씨는 생각보다 훨씬 젊었고, 표정에는 활기가 묻어 있었습니다. 찬우 씨보다 여섯 살 위라고 했고, 그때의 그는 고등학생이었다고 했으니, 사진 속의 그녀는 20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였을 것입니다. 사진 속에서도 서로에게 정이 느껴져서, 어딘가 따뜻하면서도 복잡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언가를 물어볼까요? 아니면 둘러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방 구경해도 돼?"
"제 방이요?"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영이는 망설임 없이 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울리자, 그 사이로 은은한 물감 냄새가 흘러나왔습니다.
방은 단출했습니다. 하지만 눈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곳이 단순한 어린아이의 공간은 아니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잘 닦인 팔레트와 물통, 크고 작은 붓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캔버스 위에는 덜 그린 스케치 자국이 있었습니다. 16살이 쓰기에는 꽤나 전문적인 장비들이었지만, 찬우 씨가 대학생 때 쓰던 물건이라고 했으니 쉽게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유난히 아껴 쓴 흔적이 묻어 있었고, 값싼 재료를 먼저 사용한 듯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깨끗한 모래와 입자가 작은 자갈, 마른 지푸라기 같은 것들이 병에 담겨 있었습니다. 마치 작은 자연들이 조용히 모여 앉아 있는 듯한 풍경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병을 하나 들어 올려 보았습니다. 내용물이 흔들리며, 잔잔한 울림이 손끝으로 전해졌습니다. 소영이가 그린 그림을 떠올려 보니, 물감에 이런 것들을 섞어 질감을 표현하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그건 찬우 씨가 쓰던 방식과 같았습니다.
그러다 제 시선이 한 병 앞에서 멈췄습니다. 희고 얇은 조각들이 병 속에 차곡차곡 담겨 있었습니다.
"...손톱?"
"아, 그거... 제 거에요."
"왜 모으는 거야?"
그 순간, 찬우 씨가 정해두었던 규칙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손톱을 깎으면 미니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건 찬우 씨가 직접 치운다는 규칙. 별 의미 없이 넘겨왔지만, 지금 그 병을 보니 어쩐지 마음 한켠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그때부터 이런 걸... 모으고 있었던 걸까, 하고.
"언젠가 자화상 그릴 때 쓰려고 했어요. 삼촌 따라하는 건데... 손톱을 곱게 갈아서 가루로 만든 다음에, 물감이랑 섞어서 쓰던데요."
"왜?"
"그 사람을 온전하게 담는 느낌이래요. 저런 모래나 자갈 같은 것도, 물감이랑 섞어서 자연을 그림에 그대로 담아내는 거라고 했어요."
저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질감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찬우 씨만의 철학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생명이나 존재, 아니면 남아 있는 흔적을 어떻게든 붙잡아 두려는 마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습니다. 찬우 씨가 그 이야기를 제게 직접, 조금만 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면... 저는 그 사람을 지금보다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었지 않을까요. 그러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물어보거나 둘러볼까요?
(앵커가 달리지 않은 채 24시간이 지나면 자동진행)
이번에는 찬우 씨가 예전에 쓰던 방을 보기로 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낡은 경첩이 조용히 소리를 울렸습니다. 그 소리 하나에, 어딘가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실, 손톱 이야기가 괜찮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설명이라도 해주었다면... 미리 이야기라도 해 주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지금 이 낯선 감정들이 조금은 덜 복잡했을지도 모릅니다.
“...”
...아니에요. 괜히 이야기했다가 제가 이상하게 볼까 봐, 말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저릿했습니다. 소영이는 이런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어릴 때부터 찬우 씨를 봐왔기 때문에, 그에게 익숙해진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시선을 이해하면서도 완전히 닮을 수는 없었습니다.
찬우 씨가 쓰던 방에서는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이곳을 비켜간 듯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싸늘해질 동안 아무도 머무르지 않았겠지요. 그런데도 방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침구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책상 위엔 먼지조차 없었습니다. 마치 누군가 금방이라도 돌아와 겉옷을 벗고 다시 앉을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오래도록 기다려온 흔적이었습니다.
그때, 제 눈이 한쪽 벽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어린아이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얼굴, 아직 어색한 색의 농도 속에 따뜻한 손길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린 소영이겠지요. 그림 속 아이의 눈동자는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잠시 흔들렸습니다.
그림을 더 자세히 살펴보려 몸을 기울였을 때였습니다. 캔버스 뒤편에서 종이 한 장이 조용히 미끄러져 나왔습니다. 바람도 없었는데, 그 얇은 종이는 천천히 공중을 떠돌다 바닥에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그 종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찬우씨랑 둘만 있을 때 한번 떠보자. 자신을 만나기 전에 다른 이성이랑 만난 적 없는지. 쪽지는 알리지 말고.
결심했습니다. 찬우 씨와 단둘이 있을 때, 한 번은 떠보기로. 머뭇거리면 안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단단히 묶어두었습니다. 이번만큼은,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조용히 울려 퍼진 그 소리에 소영이가 먼저 반응했습니다. 그 애가 문을 열자,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찬우 씨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 손에는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고, 그 안에는 알록달록한 봉지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삼촌, 그거 뭐야?"
"과자. 먹을래?"
짧고 소박한 대화였지만, 분위기는 부드러웠습니다. 과자를 뜯는 소리가 작은 웃음처럼 방 안을 맴돌았고, 바삭거리는 소리 사이로 웃음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렇게 셋이 함께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찬우 씨는 내일 출근을 해야 했으니까요. 소영이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지만,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마음이 저릿했습니다.
차에 오르자, 차창 밖으로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었습니다. 손끝이 자연스레 가방으로 향했습니다. 안에는 아직 쪽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매만지는 손끝에 그 종이의 모서리가 느껴질 때마다, 미묘한 긴장감이 일렁였습니다.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그 안에 담긴 말들이 떠오르는 불안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찬우 씨는 운전석 옆자리에서 조용히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전에도 가끔 그렇게 쳐다보곤 했지만, 이번에는 그 시선이 유난히 오래 머물렀습니다. 아니, 어쩌면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거나, 안전벨트를 매어주는 행동들. 그 모든 것이 평소보다 더 다정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안정감이 낯설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도로 위의 불빛이 차창에 부서지고, 그 빛이 찬우 씨의 옆얼굴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곤한 하루를 마친 사람의 조용한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틈에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적어도 제 물음에 솔직하게 답해줄지도 모른다고 믿었습니다.
"...찬우 씨.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요..."
"네."
그의 대답은 짧았지만, 한결같이 부드러웠습니다. 그 한마디에, 무엇이든 물어보아도 괜찮다는 허락이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저 만나기 전에... 혹시 다른 이성이랑 만난 적 없어요?"
"연애 얘기라면, 한 번도 없어요. 지은 씨가 처음이에요."
찬우 씨의 목소리는 꾸밈이 없었습니다. 담백하게 떨어지는 그 말은 거짓의 낌새를 전혀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원래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순간이면 표정이 어딘가 어색하게 굳거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쪽지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어느 정도 안정되기 전까지는 돈 벌 생각만 했거든요. 연애에 관심 가질 시간이 없었어요."
"학생 때는요?"
"그때도 돈 버느라 바빴어요."
말은 여전히 단정하고,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진심이 담긴 말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찬우 씨에게서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거짓도 스며들지 않은 투명한 표정이었습니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이번에는 찬우 씨가 제게 물었습니다. 그의 물음은 불안이나 궁금증이라기보다, 제 마음을 알아차린 듯한 다정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평소라면... 조금 더 긴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요.
1. 대답하지 않습니다.
2. 얼버무립니다.
3. 쪽지 이야기를 합니다.
4. 나연 씨 이야기가 신경 쓰였다고 둘러댑니다.
5. (기타)
"나연 씨 이야기가 신경 쓰였어요."
사실은 쪽지를 들키지 않기 위해 둘러댄 거짓말이었지만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면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가로등 불빛이 얼굴을 스치고, 어두운 유리에 제 표정이 겹쳐졌습니다.
찬우 씨는 전혀 저를 의심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오히려 잔잔한 목소리로, 미묘한 안타까움이 섞인 눈빛으로 저를 흘깃 바라보았습니다.
"소영이가 말해줬나요?"
"네."
그 짧은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차 안의 분위기가 천천히 변했습니다. 바깥의 불빛이 사라지면서 정적이 유리창 사이를 스쳤습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가르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습니다.
"나연 씨는 그냥 보호자였어요. 그냥... 엄마나 누나보다 더 가족같았던 사람. 그뿐이에요."
찬우 씨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속에 묘한 온기가 스며 있었습니다. 그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말했고, 그때마다 미세하게 눈빛이 흔들렸습니다. 그 말대로라 하더라도, 그 관계에는 분명히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렇게 쓸쓸한 표정을 지을 리 없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서조차 왜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던 걸까요.
차창 밖으로 스치는 불빛이 스쳐갔습니다. 빛은 잠깐 찬우 씨의 옆얼굴을 밝혔고,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와 후회, 그리고 말하지 못한 무언가가 고여 있었습니다. 원래도 숨기는 것이 많았지만, 지금은 달랐습니다. 그는 평소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나쁜 건 나쁜 거라고 가르쳐준 사람이 나연 씨였다고. 그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마음속에 오래 감춰두었던 부드러운 자국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조용히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제가 말 안듣고 있는 거에요. 아직도."
그 웃음에는 진심 어린 자조와, 어쩔 수 없는 체념이 함께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가슴에 남았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기로 한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것도 말해줄까요.
무언가 물어볼까요, 아니면 그냥 이대로 있을까요...
그저 이대로 있기로 했습니다. 굳이 물어보는 대신, 고요한 분위기 속에 머무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느꼈습니다. 찬우 씨는 한동안 무표정하게 운전대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입 안에서 무슨 말인가 맴돌듯 작고 의미 없는 소리를 흘렸습니다. 그 짧은 소리조차 차 안에서는 선명하게 들려왔습니다.
어느새 차는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엔진이 꺼지며 생긴 정적 속에서, 찬우 씨의 얼굴에는 깊은 생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서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습니다.
우리는 소파가 아닌 식탁에 마주 앉았습니다. 그가 식탁을 택한 이유를, 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소파처럼 기댈 수 있는 편안한 곳이 아니라, 서로의 눈을 피할 수 없는 자리를 선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단단한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찬우 씨는 마치 숨을 고르듯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거짓말 해서 미안해요. 평소에도. 오늘 회사에서 부른 거 아니에요."
"그러면..."
"누나가 불렀어요. 연락처는 또 어떻게 알아냈는지..."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습니다. 저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감긴 붕대를 매만졌습니다. 그 누나라는 사람은... 제게 여전히 무서운 존재로 남아 있었습니다. 마음이 천천히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왜 부른 거에요?"
"그쪽에서 아쉬운 게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그는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명확하게 설명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캥기는 것이 있어 숨기기보다는, 저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가 섞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더 큰 긴장감을 만들어냈습니다.
"누나가 저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던데, 왜 모른 척 했어요?"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바에서 일하는 사진이라던가, 더럽다는 말이라던가, 병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그 모든 건 유쾌할 리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습니다.
"저 거짓말이 능숙한 사람도 아닌 거 알아요. 지금까지 의심스러운 부분들도 많았을텐데... 그런 이야기까지 들으면, 경계 정도는 하는 편이 좋잖아요."
"..."
"그런 표정 짓지 말고요. 이번엔 밀어내려는 거 아니에요."
그는 제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 시선은 흔들림 없이 제게 닿았습니다. 긴장은 되었지만,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지은 씨랑 생활하면서, 딱 미움 받지 않는 정도가 목표였어요. 좋아해주는 것까지 기대하지 않으니까, 미움만 받지 말자, 하고. 좋은 사람도 아니니까. 그런데 행복해지는 이야기나 아이 얘기도 그렇고, 소영이한테 한 말도 그렇고... 어제 그런 얘기 들은 사람 치고는 경계하기는 커녕, 더 다가오고 있잖아요."
찬우 씨의 손끝은 작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 떨림 속에서 저는 그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제게 닿으려 하는지, 얼마나 망설이고 있는지를 느꼈습니다.
그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마치 한참 동안 준비해온 문장을 꺼내듯 천천히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이에요?"
"밀어내지 않아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서, 확인 받고 싶어요. 안 밀어내면 싫어하게 될 것 같으니까..."
마지막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억눌린 떨림이 있었습니다.
대답... 어떻게 할까요.
팩트) 사실 맨 처음에 스레주가 의도한 스레 컨셉은 얀데레 스토커 남편한테서 도망쳐서 여러 사람들한테 호감도작 미연시 찍다가 행복한 새 살림 꾸리는 내용이었다 (남편이 원래는 메인빌런 역할)
남편 비호감 찍고 꽃집 남자 만날 때부터 슬슬 스릴러 미연시 시작해볼까 싶었는데 의도와는 달리 처참하게 실패하고 예정에 없던 남편 루트 생성
원래는 얀데레 스토커랑 이어주기 미안해서 남편 과거가 어느정도 나오기 전까지는 로맨스를 기피한 경향이 있긴 합니다... 허나 때가 되었다 여기서도 남편 로맨스를 원하신다면 스레주는 더이상 안말릴 예정이여요
스레주가 의도했을 것: 도망쳐서 딴남자랑 새살림을 차려가지고 새롭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리게 하자
내가 이해한 것: 아하! 지금 남편을 갱생시키면 행복한 결혼생활이 되겠구나!
사실 중간에 꽃집아저씨라던지.... 아무튼 오 싶은 인물이 좀 있어서 스레주 의도가 그쪽인거같긴 했지만
다들 얀데레가 취향인듯....
그리고 나도 얀데레가 취향이다.... 나는 밀어내지 않고 싶다...
암튼발판....
대답으로 'KISS' 갈길까 레스주들
어 레스 달렸네 내가 앵커네
쌓인 서사를 보면 답은 'KISS' 뿐이다
저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찬우 씨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습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체온이 제 손바닥을 통해 천천히 번져왔습니다.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시선을 마주쳤을 때, 저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입술을 맞추었습니다. 그것으로 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입술을 천천히 떼려는 찰나, 목과 머리 뒤쪽으로 따뜻한 손길이 닿았습니다. 그가 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멀어지지 못하도록 단단히 끌어당겼습니다. 그 순간 공기마저 무겁게 내려앉았고, 숨이 엇갈리며 불규칙하게 섞였습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심장의 박동이 귓가에서 울릴 만큼 커졌습니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감각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찬우 씨는 저를 놓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시선이 여전히 제게 닿아 있었기에,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반대편에 있던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림자가 제 위로 드리워졌고, 숨결이 뺨을 스치며 속삭이듯 낮게 흘렀습니다. 다음 순간, 그는 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더니 침실로 데려갔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품에 안고,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닿은 사람처럼 제 어깨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호흡이 목덜미를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고, 온기가 살결 아래로 스며드는 듯했습니다. 공기 속에는 눌린 숨과 옅은 향이 섞여 있었습니다. 조용한 방 안은 더 이상 고요하지 않았습니다. 거울 속의 스스로가 낯설 만큼.
그제서야 낮에 찬우 씨가 첫 번째 단추를 풀지 말라고 했던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목 아래쪽에는 희미하게 번진 자국이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 그가 저를 안아주었을 때 느꼈던 따끔한 감각이 바로 그것이었나 봅니다. 그때의 긴장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듯, 가슴 깊숙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감각은 몇 번이고 되풀이 되었습니다. 손끝이 어깨와 팔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마치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했습니다. 아프다고 직접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몸이 미세하게 떨렸기에 그가 모를 리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만, 달래주듯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마치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려는 것처럼 닿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햇살이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욱신거렸습니다. 어제 너무 무리했던 걸까요. 평소 운동이라곤 거의 하지 않던 터라, 제 체력이 이토록 약했나 싶었습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희미했습니다. 분명 씻고 눕기는 했는데, 잠이 들기까지의 기억이 몽롱하게 희미했습니다.
옆을 돌아보니 찬우 씨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작은 소리에도 금세 눈을 뜨던 사람이었는데, 오늘만큼은 깊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어제는 그에게도 긴 하루였겠지요. 그래도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마냥 재워둘 수는 없었습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습니다.
그제야 찬우 씨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잠시 저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얼굴을 문질렀습니다.
"잘 잤어요?"
"오랜만에요. 꿈도 안꿨어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스르르 번져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그는 손톱을 몇 번 물어뜯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욕실 쪽으로 걸어가더니 문을 닫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그 뒷모습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괜히 섭섭하다는 감정이 가슴 어딘가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 무렵이었습니다. 욕실 문이 다시 열렸습니다.
"얘기를 안 한 것 같아서요..."
제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찬우 씨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어조였지만, 그 한마디가 조용히 분위기를 바꿔놓았습니다.
"어제 일, 고마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 다시 문을 닫았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작게 느껴졌습니다. 부끄러워서였을까요. 그 순간, 조금 전까지 마음을 짓누르던 섭섭함이 사라졌습니다.
문득 오늘의 할 일이 떠올라, 핸드폰을 켜고 메모장을 열었습니다.
청소는 하면 좋겠고, 연락을 할 사람들도 있습니다. 밖에 나갈 수도 있고, 요리를 해도 됩니다.
우선, 2가지만 정해볼까요.
찬우 씨가 나온 뒤, 저도 천천히 욕실로 들어갔습니다. 문을 닫는 순간, 온도가 다른 공기와 함께 희미한 비누 냄새가 코끝을 스쳤습니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은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창백하고, 눈가에는 희미한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어제의 기억이 조용히 떠올랐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전해졌던 감정들이, 아직도 피부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찬물로 적신 손바닥으로 감싸며, 부드럽게 식혀내었습니다. 차가운 물줄기가 피부를 타고 흘러내릴 때마다 마음속의 미세한 떨림도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을 때, 찬우 씨는 이미 출근 준비를 거의 마친 모습이었습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그의 움직임이 바빴지만, 이상하게도 그 속에서도 고요함이 느껴졌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탓인지, 그는 서두르면서도 나름의 질서를 잃지 않았습니다. 셔츠 단추를 채우는 손끝에서, 익숙한 단정함이 느껴졌으니까요.
그는 식탁으로 다가와 봉지에서 빵을 꺼냈습니다. 포장을 뜯는 소리가 고요한 아침을 가볍게 흔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더니, 짧지만 따뜻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표정은 마치 세상 근심이 잠시 멈춘 듯, 아이처럼 맑았습니다.
"다녀올게요."
그 한마디가 그렇게 잔잔하게 들릴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무언가 가슴 깊은 곳이 부드럽게 흔들렸습니다. 그는 제 손을 잠시 잡아주고는,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었습니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습니다. 가방을 들고 현관문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끝이 허공을 더듬었습니다. 그렇게 찬우 씨는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닫히는 문 틈새로 스며든 바람이 그의 체온을 희미하게 데리고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문이 닫히자, 집 안은 고요했습니다. 남은 자리에는 여전히 은은한 향과 빵 냄새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부엌의 싱크대에는 물방울이 반짝이고, 거실 한 켠에는 찬우 씨가 그리던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어쩐지 그 흔적들 하나하나가 사람의 온도를 닮아 있었습니다.
저도 그를 따라 빵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습니다. 빵의 부드러운 결이 입안에서 천천히 녹아내렸습니다. 어제의 피로가 아주 조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 아침을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쉬웠습니다. 뉴스를 틀까 고민했지만, 아직 시간이 이르다는 것을 알고는 리모컨을 내려두었습니다. 대신 창문을 열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커튼을 스치며 방 안을 맴돌았습니다.
저도 이제 제 하루를 시작해야겠지요. 햇살이 테이블 위에 쏟아지며, 어딘가 새로운 하루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소매를 걷어올렸습니다. 청소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어디를 청소할까요?
1. 현관
2. 거실
3. 침실
4. 발코니
5. 배란다
6. 주방
7. 욕실
8. 드레스룸
9. 찬우 씨의 작업실
먼저, 침실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밤새 시트가 구겨지고, 미세한 체온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이불을 들추어보니, 지난밤의 기운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저는 차분히 침구를 벗겨냈습니다. 손끝에 닿는 천의 감촉이 부드럽고 차분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이불과 시트, 베개 커버를 모두 다른 것으로 바꾸고, 이전 것들은 세탁기에 넣었습니다. 세탁기의 문을 닫을 때, 마음 한구석이 살짝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구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기를 돌렸습니다. 청소기 소리가 단조롭게 울려 퍼지는 동안,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손끝이 바닥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어딘가 깊숙한 곳의 생각들까지 닦여 나가는 듯했습니다. 이윽고 청소를 마치고 나니 방 안 공기가 한결 맑아졌습니다. 유리창으로 햇살이 기울며 커튼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었습니다. 그 평화로운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고요함이 저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저 청소만 했을 뿐인데, 그것이 어딘가 뿌듯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다음은 작업실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찬우 씨가 들어가지 말라고 했지요.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지만, 이미 한 번 들어갔던 이후로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제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저는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그래도 문 앞에 서니 잠시 망설여졌습니다.
손잡이에 손을 얹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문을 밀었습니다.
문은 부드럽게 열렸습니다. 안쪽의 공기는 약간 서늘했지만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며칠동안 계속 닫혀있던 탓인지, 약간의 먼지 냄새와 함께 묵은 정적이 느리게 흘렀습니다. 불을 켜고, 한 발 안으로 들어서자 전에도 보았던 풍경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컴퓨터는 전원이 꺼진 채 조용히 책상 위에 있었고, 화구들은 바닥 한켠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듯했습니다.
방 한쪽에는 박스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각 박스에는 날짜가 적힌 메모가 붙어 있었고, 정성스럽게 정리된 흔적이 보였습니다. 그 옆에는 유리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투명한 병 안에는 은은하게 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무언가가 들어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손톱 조각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제 것이겠지요. 날짜별로 구분되어, 마치 추억을 정리하듯 정갈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진짜로 모으고 있었네..."
저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차분히 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미 각오했기 때문인지, 마음은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누군가의 마음이 이런 형태를 가진 채 남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 뿐이었습니다.
(복수 선택 가능)
1. 얌전히 먼지만 쓸어내기로 합니다.
2. 상자... 열어볼까요.
3. 문득 컴퓨터도 조금 궁금해집니다.
4. 역시 그만둡니다.
5. (기타)
조금만 살펴봐도 괜찮겠지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습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손끝이 긴장감으로 떨렸지만, 저는 결국 조심스레 상자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옷들이 차곡차곡 접혀 있었습니다. 마치 시간이 고요히 멈춰 있는 듯, 옷감 사이에는 오래된 섬유유연제 냄새가 은근히 배어 있었습니다. 손끝으로 하나하나 옷을 들어 올리며 살펴보니, 버린 줄 알았던 제 옷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날짜가 적힌 상자에는, 2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제가 입고 있던 옷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저 달리 입을 옷이 없었을 뿐인데, 그는 그 하루를 얼마나 오래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요. 손톱을 모아둔 병을 이미 본 뒤라서였는지, 이상하게 놀랍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상자들을 열었을 때는 조금 달랐습니다. 안에는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섬칫한 물건들이 어지럽게 들어 있었습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 부품 같은 것들과, 액체가 든 약통, 나이프와 밧줄, 청테이프, 그리고 손수건까지. 일상적인 물건조차 아니었습니다. 하나하나의 물건들이 가지는 무게를 가늠할 수 없어, 저는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가 이런 것들을 왜 모아두었는지, 그 안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제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낯섦이 천천히 번져갔습니다.
문득, 제 시선이 컴퓨터 쪽으로 향했습니다. 전원이 꺼진 채 조용히 놓여 있는 모니터 앞. 저는 결국 천천히 의자에 앉았습니다. 코드선을 꽂고 전원 버튼을 눌렀습니다. 작은 딸깍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화면이 켜지는 동안, 저도 모르게 손톱을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런 사소한 행동에도, 왠지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잠시 후, 화면이 완전히 켜졌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크게 없었습니다. 배경화면은 기본 설정 그대로였고,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디자인과 편집을 하기 위한 파일들 외에는 다운로드를 받은 것들도 없었습니다. 아무 흔적도 없는 그 단정함이 어딘가 차분하게 느껴졌습니다. 바탕화면에는 단 두 개의 폴더가 있었습니다.
[회사]
[새 폴더]
“...”
제가 봐도 참 심플합니다.
1. [회사]를 엽니다.
2. [새 폴더]를 엽니다.
3. (기타)
4. 그만둘까요...
저는 [새 폴더]를 열었습니다. 폴더 아이콘이 천천히 열리며, 하드디스크 특유의 낮은 진동음이 귀에 닿았습니다. 그 안에는 또 두 개의 폴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마치 오래된 서류함을 정리하듯 정갈하게 배치된 이름들.
[가족]
[그 외]
...여전히 심플합니다.
그런 생각이 속으로 조용히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습관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정리된 구획들이 오히려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가족] 폴더를 열었습니다. 화면에 불이 번지듯 서서히 폴더가 열리고, 이름 세 개가 나란히 떠올랐습니다.
[이지은]
[유소영]
[유나연]
이름 하나하나가 모니터의 푸른 빛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이상하리만큼 단출한 구성.
저는 마우스를 천천히 움직이다가, 다음 폴더로 향했습니다. [그 외]. 이름조차 모호한 그 제목이 왠지 더 마음을 끌었습니다.
클릭 소리와 함께 폴더가 열렸습니다. 그 안에는 낯선 이름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습니다. 6자리 숫자와 함께 한글 이름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 배열은 일정하고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6자리 숫자는 주민등록번호의 앞자리 같았습니다. 각 이름 옆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고, 대부분이 아주 오래 전에 생성된 폴더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군가의 기록이 이토록 오래된 형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어딘가 묘했습니다.
파일들은 한글 자음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 꼼꼼함에, 저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스크롤을 내리던 중, ‘ㅇ’ 열에서 익숙한 이름이 제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유유진]
[이 (이름만)]
이름이 눈에 들어온 순간, 가슴이 아주 천천히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여기에..."
그 말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왔습니다. 마우스를 쥔 손끝이 식어갔습니다. . 아빠의 이름이었습니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지만, 그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화면 속의 글자들이 갑자기 더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옆의 이름... 분명히 '유진 씨'일 것입니다. 유진 씨의 이름이 [가족] 폴더가 아닌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두 이름 모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분명히 그들의 이름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파일 이름들이 그저 기록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저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모든 폴더 안에는 사진들을 비롯한 여러 파일들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대체 뭘까요.
1. [이지은] 폴더를 열어봅니다.
2. [유소영] 폴더를 열어봅니다.
3. [유나연] 폴더를 열어봅니다.
4. [유유진] 폴더를 열어봅니다.
5. [이 ] 폴더를 열어봅니다.
6. 김소미 씨에게 연락해 여동생의 이름을 물어봅니다.
7. (기타)
8. 그만둘까요.
저는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커서를 움직였습니다. 폴더 목록 중 하나, 그 이름 앞에서 제 시선이 멈췄습니다. [이용석]. 어딘가 가슴 깊은 곳이 떨렸습니다. 너무나도 의외의 이름이었으니까요. 그것도 하필이면, 찬우 씨의 컴퓨터 안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우스를 두 번 눌렀을 때, 화면이 조용히 열렸습니다. 낡은 창문이 열리듯, 오래된 기억이 퍼졌습니다. 그 안에는 화질이 흐릿한 사진들이 차곡히 들어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남자는 제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거칠지만 정직한 눈빛, 손등에 묻은 기름때, 추운 날씨에도 꿋꿋이 서 있던 그 자세까지. 그 옆에는 어린 제가 손을 꼭 잡고 걷고 있었습니다. 바람에 머리가 흩날리고, 웃는 얼굴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습니다.
모든 사진은 '이용석'을 중심으로 찍혀 있었습니다. 그는 사진 속에서도 자신이 찍히고 있는 줄 모르고,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거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심한 표정이 오히려 더 진짜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아주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요. 그 시선 속에는 동정도, 미움도 아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는 듯했습니다.
폴더를 넘기다 보니, 어느 순간 사진이 아닌 문서 이미지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름과 주민번호, 결혼과 이혼 날짜, 딸을 보육원에 보낸 기록, 갚은 빚의 액수,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개인정보들. 한 줄 한 줄이, 누군가의 인생을 낱낱이 드러내는 기록이었습니다. '이용석'이라는 사람의 삶이 그 문서 위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마지막 기록은 '모든 채무 상환 완료'라는 문장으로 끝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찬우 씨가 왜 이런 자료를 가지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이야기임에도, 그는 왜 이 기록들을 간직하고 있었을까요.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요, 아니면 더 깊은 이유가 있었던 걸까요.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제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번졌습니다. 그것은 공포도 분노도 아닌, 차가운 물결처럼 천천히 스며드는 의문이었습니다. 좋은 이유로 시작된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머물렀습니다.
1. [이지은] 폴더를 열어봅니다.
2. [유소영] 폴더를 열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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