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없음 2024/02/09 21:49:38 ID : vBcMi6Y9y43 10
세상이 끝나기 55분 전이래요, 다들 뭐하실 거예요? 맞은 편에는 나를 꿰뚫듯 노려보는 태풍의 눈이 있었다. 눈싸움하느라 힘겨웠다.
베스트 레스 3
이름없음 2024/02/15 22:11:13 ID : vBcMi6Y9y43 1
언젠가 글을 정말 흐르듯이 쓰고 싶어서 말하듯이 쓴다는 내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글을 읽을 때나 쓸 때 80%의 확률로 묵독을 병행하는데, 그러다 보면 글이 튄다. 뜬금없이 흘러나오는 다른 마음까지 치밀어서 그대로 받아 적는 느낌이 된다. 불현듯 춥다거나 배고프다거나 글의 전반적인 주제와 상관없는 곁가지가 치고 나올 땐 퇴고하면서 잘라낸다. 말하듯이 쓴다는 것에도 장점이 있다면 큰 걸림이 없는 글이 써진다는 점? 물론 나는 내 글이므로 애정 가득한 눈으로 봐서 그리 보일지도 모른다. 아 진짜 애플 비공개 릴레이 켜지면 작성 안 되는 거 어떻게 안 되나. 별은 달기 싫고 글 날아가서 부분 복사만 됐다;
이름없음 2024/05/20 04:55:09 ID : mIIE7hxTRu6 1
물가에만 다녀오면 파랑 생각이 난다. 튜브에 온몸을 기대고 어느 먼바다까지 가려나 걱정이 돼 시선 끝에 고정시켜두었던 그 여름. 송어가 종종 기생충을 쫓기 위해 펄떡펄떡 수면을 박차던 장면을 함께 보던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는 말을 했더니, 그들은 참사랑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랑이란 말 이렇게 쉽게 써도 되는 걸까? 싶어 큰 목소리로 웃었는데 일기를 쓰다보니 뒤미처 깨닫는다. 이런 감정도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거지. 4월의 마지막엔 거짓말처럼 당신을 만나러 갔다. 늦기 싫어 미리부터 가서 동네를 둘러보고 일하는 곳 근처의 카페에 자리를 잡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흐름이 끊겨도 아쉽지 않도록 단편소설집과 필사 노트를 펼쳐놓고 자주 듣는 트랙을 들으며 집중하고 있었다. 좋은 문장이 많았다. 느티나무와 버스정류장, 사찰, 그리고 여름을 그려낸 잔잔한 분위기의 장면은 아직까지도 상상한 심상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초조한 듯 설레서 발을 떨었고, 가방 뒤에 숨겨둔 선물은 재포장하며 잘 챙겨왔는지 몇 번이나 다시 살폈다. 그때는 하나 놓고 왔다고 아쉬워했는데 실제론 깔끔하게 다 챙겼었다. 두 편 반 정도를 읽었을 무렵 왼편의 출입구로 파랑이 걸어들어오며 두리번거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반가운 인사를 나눴지만 살짝 어색한 기류는 감춰지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작년 여름에 봤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충 마실만한 것을 사시길래 쭐래쭐래 따라갔더니 식사대용 빵 종류를 하나 사주셨다. 이미 배불렀지만 맛있게 먹었다. 이야기는 별 거 없었다. 바쁜 일을 정신없이 해치우고 온 파랑과, 느긋하게 오긴 했지만 침착하지는 않은 나의 주파수가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잡음이 껴 있었다. 그래도 근황을 나누고 얼굴을 보니 매우 좋았다. 나갈 때가 되니 분위기도 풀려 제법 말랑말랑해진 상태였다. 새로 리필해온 물까지 바닥이 날 때쯤 산책을 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셔서 승낙했다. 상쾌한 건지 조금 축축한 건지 제대로 분간하기 힘든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의 날씨였다. 낮엔 까딱하면 더웠고 비가 오면 언제 여름이었냐는 듯 일교차가 심해 변덕이 죽 끓듯 하던 날들이었다. 다행히 아침부터 흐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약간 찝찝한 정도의 습기가 있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사실 날씨는 크게 상관없었다. 밤이었고, 함께 걷는 사람의 반가움이 나의 마음까지 넘실거려 왔으므로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초록불로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내딛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코너를 돌자마자 보이는 언덕에 바로 경쾌함이 무너지기는 했지만, 보이는 것보다는 오르기 쉬운 축에 속했다. 동네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던 것은 생생하다. 다만 나의 엄살이 그 정적을 깨트리자 그가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다며 웃었던 게 떠오른다. 좋은데요, 괜찮은데요! 나는 가쁜 숨을 밭으며 맥없이 좋다는 말만 반복했다. 실제로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어렵다기보단 빡센 느낌이었다. 짧고 굵게 경사도가 높은 느낌으로 산 넘어 산처럼 구성된 길이라 다 왔나, 싶으면 장난처럼 한 번 더 거슬러 올라야 해서 웃었다. 웃겼다. 차 없이 오르는 건 파랑도 오랜만이라고 했다. 그는 길도 모르는 나의 뒤를 받치며 함께 올라왔다. 주춤거리며 동 앞에서 기다리려는데 들어오라고 하셔서 얼떨결에 집까지 구경했다. 티비 대신 한쪽 벽면 전체를 점유한 서가에 먼저 눈이 갔다. 이사를 다니며 줄이고 줄인 책들은 마치 정수精髓처럼 느껴졌다. 놀랍게도 한국 작가의 취향이 나와 많이 겹치길래 몇 권은 탐나기도 한다고 장난스레 웃어보였더니, 파랑은 파트너가 주로 읽는다며 소개해주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이 가득했고, 구석에는 헤어질 결심 각본도 있었다. 어정쩡히 서 있는 동안 바삐 움직이는 파랑은 도대체 무얼 하는지 궁금했다. 이것저것 챙겨오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취향이 이렇게 겹칠 수도 있구나 감탄하며 거실에서 손떼가 묻은 책들을 눈에 담기 바빴다. 어수선하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정렬은 확실히 되어 있는 공간이었고, 그게 누구의 손길인지는 함부로 단정할 수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귤까지 꺼내오시는 걸 막지 못했다. 괜찮다고 아무리 손사레를 쳐봐도 씨알도 안 먹혔다. 뭘 이런 걸 다 들고 와요, 라는 말만 해주셨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드린 것 이상으로 되돌려받아서 손이 무거웠다. 지하주차장을 잠깐 헤매다가—차를 매일 끌고 나가면 잘 알텐데…—가벼워진 몸으로 뒷산을 올랐다. 저번 여름에 내가 그랬듯, 파랑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지명에 숨겨진 설화를 알려주었다. 뿌듯함이 숨결 끝에 묻어나왔다. 그 설명을 듣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을테지. 나무데크를 턱턱 밟아나가며 한없이 높은 건물에서 빛나는 조명이 별처럼 보이는 장면도 눈에 담았다. 이토록 조용한 산책길이 집 뒷편에 있다는 게 내심 부러웠다. 파랑은 요새 뛴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 매일 나가지는 않겠지만, 통통 뛰며 앞뒤로 날개를 펼치듯 팔을 휘젓는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밀려나왔다. 얼마나 뛰는지, 어떤 운동화를 신는지 물어볼 걸. 어디선가 흘러오는 꽃향기를 라일락향이라고 알아채는 모습이 좋았다. 하이라이트처럼 제일 매료된 순간의 리플레이를 뽑아낸다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근 한 달 간 헬스하고 돌아오면 늘 깊은 경사가 있는 내리막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유는 오로지 화단에 핀 라일락의 나뭇가지를 손으로 살짝 내려 폐의 가장 깊숙한 부분까지 향을 쌓아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핀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나누다 라일락인 걸 바로 깨닫는 게 신기했다. 활짝 핀 꽃과 함께 5월이 성큼 다가섰다. 등꽃도, 그 사람도 아니었지만 반 정도는 맞춘 셈이다. 라일락의 파랑이라 어쩌면 더 좋았다. 지위나 역할에 귀속되는 대화가 없었으므로. 짧은 만남은 함께 오른 언덕과 엇비슷했다. 반가움이 끝날 때쯤 되니 산책과 라일락으로 한 번 더 설렘으로 환기되며 변주됐다. 투정 아닌 투정을 서로 부리고, 작년의 일을 떠올리고, 다음 여름을 기약하는 일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별다른 임팩트가 없던 일상에 강력한 방점으로 찍혀 있다. 그때의 감각을 머릿속의 영상으로만 남겼다면 전부 휘발될까봐 황급히 옮겨적었더니 아직까지 생생하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귀결되는 취향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들에 자석처럼 끌려다니는 지 휘갈기며 적어둔 문장들은 너무나도 적확하다. 떠오르는 얼굴들의 생김새가 일정한 게 아니었다. 추출해 뽑아둔 특징을 이리 대보고 저리 대보면 개연성이 생겨났다. 이래서 좋아하게 되었구나. 색다른 순간에 꽂히면 그 이후로는 프리즘을 갖다 대고 분광했다. 내가 그들과 기억하는 비중이 다른 이유도, 여행이 끝나자 파랑을 기억하는 데에만 용량을 써서 그랬던 거였다. ‘진짜’ 여름을 손꼽는다. 땀이 삐질삐질 흐르다 못해 손수건 없이 나갔다가 후회하는 그런 여름, 몸의 어느 부분들은 조금 더 날렵해진 채로 파랑을 다시 만나러 가고 싶다. 그래도 닭가슴살 한 끼에 두 덩이는 진짜 못 먹겠는데, 만나기 이 주 쯤 전에는 완전 무탄수를 해야할 지도 모른다. 단백질 덩어리 우걱우걱 씹으면서 올리브유 삼키고. 바라고 바라는 진짜 여름은 쉽게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두 세뼘 정도는 성장해야 한다, 이번엔 정말로. 어떻게 하면 더 잘 듣고, 더 잘 쓰고, 더 잘 이끌 수 있는지 아직까지도 감이 안 온다. 감을 잡진 못해도 무언가 이뤄낸 타이밍 이후에 볼 수 있겠지. 그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길고 긴 하천변을 따라 함께 뛰게 될까. 그러잖아도 심장은 열렬히 일하겠지만. 보고싶다, 누가 보고싶은지 한참을 생각해도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어 이게 외로움이구나, 실체를 보고 있다. 수면패턴도 망가져서 꿈이 현실보다 더 현실같을 때가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대해 예측하는 장면이 나온다거나, 강렬한 감각이나 감정을 느껴 땀에 절은 채로 깨치는 일이 잦아졌다. 분명 다른 글을 쓰고 싶었는데 밝은 장면을 쓰다 보니 어떤 어두움을 묘사하려 했는지 잊었다. 그러니까 하여튼, 보고 싶다. 그리고 당신 말이 다 맞다. 뒤돌아 앉아 달의 뒷면에 골몰할 필요는 없다. 지구에선 무슨 짓을 해도 보이지 않고 닿지도 않으니까.
이름없음 2025/09/16 11:39:15 ID : ze3TWmFbg5e 1
아무래도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2 이름없음 2024/02/09 22:14:35 ID : vBcMi6Y9y43 0
둥지를 옮겼는데 백업이 귀찮아서 결국 돌아오게 된다. 연어같다. 글은 안 쓴다 안 쓴다 말하면서도 글을 읽다보면 쓰게 된다. 차라리 소설을 쓸 줄 알았더라면 덜 아팠을까. 갑자기 창문 너머로 매미 소리 넘어오고 킴의 깊은 눈에 빠진다. 눈, 눈, 눈이 무어라고 5분만에 매료된다는 표현을 하는 걸까. 2년 만에 만났던 임과는 역시나 죽이 잘 맞았다. 열 한 시간이 아니라 스물 두 시간을 떠들었더래도 할말이 배꼽까지 차있었을 걸. 그와 밖에서 만나서 참 다행이었다. 여운이 오래갔으면 했으므로. 연애감정만을 지칭하는 좁은 의미의 사랑은 우정보다 한 층위 아래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던데. 우리는 산이 섬처럼 둥둥 떠 있는 동네로 가, 관광객들이 많이 간다는 찻집의 지하 한가운데 탁자를 점유한 채 수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주제는 다채로웠을지언정 종국에는 세 개 정도로 귀결되었다. 결국 돌고돌아 사랑했던 이야기, 사랑하는 이야기, 앞으로 꿈을 어떻게 하면 잘 좇을 수 있을지에 대한 얘기. 그러다가 우정이 사랑보다 높은 층위에 있다는 나만의 결론에 대해 동조해주는 사람을 찾은 것이다. 그게 임일 줄 알고 있었다. 사실, 그 누구에게 말해도 이상한 이야기였다. 미심쩍어할까봐. 연애를 쉬지 않고 하는 그와 사랑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는 내가 맞닿아있는 게 웃겼다. 우린 그런 모습이 닮아 있었다. 다만 연애로 다다르는 방식만이 다를 뿐. 임은 과감했고, 대담했다. 나는 마음에 든다면 제일 안쪽의 바운더리에 놔둘 뿐 대담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건 핵심적인 부분을 갈랐다. 아니, 사랑이 관계와 동의어는 아니라지만. 왜 ‘관계’라는 표현으로 에둘러 말할까를 성찰하다보면 금세 진지해진다. 필요조건일까? 그런 것까진 아닐텐데. 나는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고 그와 나는 조금 더 시내에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안주로 시킨 우동에는 잘못 해동한 냄새가 나는 닭다리살이 들어있었다. 그게 유일한 오점이었다. 3차로 택한 가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앉아있는 동안 테이블이 비어있지 않았고, 관광객인지 주민인지 모를 사람등이 엉켜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다. 사실 그런 구분을 하는 것조차도 요상했다. 나는 관광객이고 싶은 원주민으로 갔고,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술집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뜨끈한 사케 같은 걸 시키고 싶었다. 마실 수만 있었다면, 오랜만에 아랫입술을 가볍게 씹었다. 안된다는 건 임도 알고 나도 알고 가게의 여사장님까지 알았다. 수많은 이름의 준마이다이긴죠들이 메뉴판에서부터 나를 비웃었다. 충동을 참기 힘들었던 쪽은 초록병이었다. 그야말로 뒤흔들렸다. 하얀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꼴꼴꼴 채워지는 소리가 들리자 손가락 끝에서 발가락 끝으로 전극이 느껴졌다. 머금기만 하고 뱉어내면 입안 점막만 취할텐데 그런 것도 안돼? 장난스레 말했더니 그가 웃었다. 유난한 칼바람은 임의 담뱃불을 더욱 낭만적으로 보이게 했다. 절대로 내려다볼 일이 없던 친구를 내려다보는 맛도 있었다. 바람이 그리 세지 않았다면 코를 찡그려야 했을텐데 연기가 세찬 바람을 타고 그의 얼굴을 갈랐다. 추운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볼이 다 패이도록 태우는 모습은 몇 해 전이나 그때나 여전했다. 맛있어? 얼마나 맛있길래 태우는 거야. 1차로 갔던 보양식집—그래봐야 장어덮밥이지만— 주차장에서 나는 흡연자의 중독이 어떤 과정으로 순환되는지를 또 물었다. 임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담배를 맛깔나게 피우는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물어봤던 건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도 나도 매우 혼란스러웠던 술집에서였는데, 가까이에서 친한 친구가 피는 담배를 보다니 참 신선했었다. 그런다고 해서, 담배를 태워야겠다는 생각은 또 해본 적이 없다. 같이 따라가야만 한다면 성냥갑을 들고 가 불을 붙여줄까 싶기는 했어도. 설혹 내가 흡연자들의 소굴에서 일하게 된대도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태울 생각은 없었다. 찐담배 역시 접근성이 매우 좋아 피워볼까 하는 수십차례의 갈등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뇌의 천공동맥이 좁아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담배 태우다가 담배연기 같은 혈관 얻기 싫으면— 그런 논리로 술도 담배도 커피도 좀처럼 입에 대지 않았으나 충동은 늘 있어왔다. 피곤할 때면 남들처럼 쉽게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빨아제끼면서 의존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아도 밤은 새지만. 남들 다 하는 건데 왜 나만 못해? 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걸까. 아직도 모르겠다. 중독이라는 점에서 기호식품들을 소비하는 것과 사랑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끊어야지, 하면서도 뒤를 돌아본다. 끊어야지, 하면서도 돈을 기꺼이 지불한다. 왜 쉽게 끊어지지 않는 걸까. 질겨 죽겠어. 질려 죽겠어. 한탄하면서. 언제는 하도 그런 것들이 떠오르길래 아저씨들이나 한다는 은단이나 구해야 하나, 하며 웃었다. 은단. 은단이라는 단어를 아주 먼 기억의 방에서부터 기어이 끄집어와서 시도하게 할 정도로 충동은 강했다. 한 번만 시도해보고 바로 끊을 수 있을 것 같은 자만심까지 들게 하잖은가. 그래, 이런 느낌들이 전부 비슷했다.
3 이름없음 2024/02/09 22:57:25 ID : vBcMi6Y9y43 0
너. 정말 끊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치료가 필요한데. 공교롭게 노래도 테라피다. 어떤 테라피를 받아야 나을 수 있을까 싶어 선생님께 여쭤봤다. 화면 밖으로 데리고 나오고픈 선생님. 활자로 오는 회신도 음성으로 만들어낼 줄은 알았지만, 언젠가는 면대면이기를 원했다. 그럴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상대가 달가워하지 않을까봐 꾸욱 참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 언제가 언제일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나의 (알 수 없음)을 (알아냈음)으로 바꾸어주는 게 좋아 메일을 드릴 뿐이었다. 그것도 전적으로 상대의 호의에만 기댄 이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안 된다면 보답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의 생존? 이젠 바쁠까봐 답장을 채근하지도 않는다. 2주라니. 이게 무슨. 다음엔 한달 뒤로 예약해주세요. 할 지도 몰라. 혼자 웃었다. 말도 안되는 편지를 읽고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창백할 정도의 벽, 형광등, 두껍고 명랑한 둥근 안경테. 휴대폰 사진첩을 정리한답시고 녹화를 떠 두었던 영상의 썸네일을 보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의 표정까지는 상상하려고 하지 않았을텐데. 요사이에는 이러한 상상들이 글로 치환되지 않고 동영상으로만 넘어가 스스로를 편집증 환자라고 진단해버렸다. 의사도 이렇겐 안 할 걸. 진짜 의사를 만나러 가야 하나. 선생님은 그러라고 하겠지. 그 약들이라도 써서 눌러보라고 하겠지. 매일 먹지 않아도 되는 약을 주세요, 하얀 가운의 사내에게 요청한다. 차라리 위약을 줬으면 좋겠어. 손에 들린 건 나를 몽롱하게 만드는 약한 수준의 향정신성의약품이겠지. 그래, 너, 2월은 초입부터 괜히 긴장한다. 겨울은 1도 싫고 2도 싫고 12도 싫고. 3부터가 좀 안정적인 것 같아. 두렵다. 봄으로 쉽사리 넘어오질 않는다. 제일 따뜻한 곳에 와 있으면서도 더 따뜻하길 바랐다. 서래와 해준이 마주보고 싸운 섬과 형상이 비슷한 바다를 본다. 섬, 바다, 짙고 무거운 남색의 호흡을 한동안 계속해서 따라했다. 스트레스는 걷기로 풀었다. 10K는 만보와 10Km 둘 중 하나라도 달성하자는 의미였다. 절치부심, 그래. 그거라도 해야지. 멋있잖아. 임과 했던 대화는 스스로에 대한 예언이었다. 앞으로 이렇게 살아나갈거야, 하면 거의 다 그 궤적에 맞춰서 살아졌다는 걸 이젠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나의 변태變態도 아주 멀지만은 않은 미래였다. 그와 동시에,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특별하지도, 특이하지도, 않은 그런 꿈. 이루기 참 쉬운데 왜 이렇게까지 돌아왔을까. 물론 젊은 하얀 가운의 사내를 이겨내야 한다는 게 마지막 난관이다. 차라리 가족친지지인기타등등을 이기는 건 어떻게든 하겠지만, 피곤에 절어 있는 얼굴로 날카롭게 물어보는 교수 앞에서 환자는 하염없이 작아질 뿐이다. 이래서 이름처럼 시원하게 수술하라고 했구나. 앞날의 중대한 선택에 장애물이 되니까. 나의 뇌는 차라리 지금 당장 수술하는 게 가장 성공률도 높고 예후가 좋았을 것이다. 이제는 그게 유일무이한 치료 방법이라는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질질 끄는 쪽이 시한폭탄 양성이다. 가장 젊을 때 가장 진행이 덜 되었을 때 치료하는 것은 사실 당연하다. 그걸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다. 교수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다시 수렁으로 떨어질까봐 그랬다. 환자들이 모인 카페에서 수술 후기를 주욱 읽으니 그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그렇게 하고 나서 알을 깨트려버리면 되지 않나. 그래. 그러자. 너무 강압적이지만은 않게 설득할 것이다. 그걸 끝내고 이름 끝 자 음가의 초성과 종성을 뒤바꿀 것이다. 완벽해. 두 번 수술인지 세 번 수술인지도 모를 거면서. 무모하다는 쪽이 리스크테이킹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제야 수술을 권한 젊은 의사의 말이 부드러워졌다. 좋아, 어짜피 할 거라면 이번 여름방학때라도. 그동안 얼굴을 뺀 피부 전체에 열꽃이 피었다. 자가면역질환들은 사실 다 연결돼있는 거 아닐까? 아토피가 올라와 오른손을 굽혔다 폈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었다. 한포진도 아토피인 거에요? 그렇단다. 새로 생긴 피부과 전문의는 친절했다. 죄송해요,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에요. 그 기다림을 감수할 정도였다. 우습게 그 열꽃들을 죽이는 데에는 스테로이드보다 운동이 더 잘 먹었다. 그러게 우선 걸으랬잖아. 모교의 교장선생님이 웃는다. 찾아가야 하는데, 하는데…. 그리고 임은 자신이 잠시 동안 살고 있는 동네에서 그토록 미웠던 담임선생님이 나고 자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은 한명이지만, 제자들의 수만큼 세로로 슬라이스를 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입체적인 사람이었다. 그걸 잘해서 승진도 잘 한거겠지. 그게 고삼담임의 생존전략이었겠지. 이름처럼 순도가 높게 잘 깎인 보석은 어느날 갑자기 툭 떨어지는 게 아니니까.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선생님의 궤적을 어림짐작한다. 10년 후에도 빛을 잃지 않을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죽을 때까지 보석일 것 같아. 그런 사람도 내 친구에게는 보석이 아니라 날카롭기만 한 깨진 유리조각이었다. 교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한계라기엔, 사람들이 다 그렇다. 나한텐 좋아도 너한텐 쓰레기일 수 있는 거잖아.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4 이름없음 2024/02/09 23:25:35 ID : vBcMi6Y9y43 0
그래. 모두가 누군가에겐 보석이기도, 또 다른 이에겐 날카로운 유리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 다른 사고를 치지 않으려나. 그런데 어떡해. 인생은 사고치고 해결하고의 연속인데. 나는 곧이어 있을 겨울의 마지막 12일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올해를 반으로 가르면… 여기까지 생각하고 시간을 멈추고 싶다. 내가 쓰레기인 이유를 다 말해봐, 이런 예의 없는 이야기나 할까봐 아찔하다. 차라리 줄글따위 갖다버리고 어떻게 지내. 라는 말만 보내는 게 정답에 가까웠다. 거기서 대답 안 하면 이젠 싹 비워버리고 도망치면 되니까. 넌 겨우 한다는 말이 이거야? 나한테 그런 몹쓸 짓을 해놓고. 라는 원망이 듣고 싶었다. 네가 상처입은 만큼 너에게 나를 상처입혀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무릎을 꿇고 빌고 싶다. 차라리 다 아프면 시원하게 아물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데 이 미적지근한 죄책감은 나를 일 년에 두 번씩 옥죄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까진 아니어도. 봐, 이런 식이다. 담배같다. 하, 시발. 끊어야지. 하면서 한 개피를 더 꺼내든다. 찰칵, 셔터 대신 라이터를 점화한다. 호흡을 안쪽으로 당겨 점화시킨다. 내뱉는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작은 별. 짧아지는 꽁초. 후우. 비벼끈다. 다시 습관처럼 베란다로 나간다. 피우면 안 되는데 핀다. 생각하면 안 되는데 생각한다. 질기다. 나만 혼자 질기다고 생각하는 걸까봐 두렵다.
5 이름없음 2024/02/10 22:36:34 ID : vBcMi6Y9y43 0
너. 끊어야 하는데 정말. 그러지 못하고 습관처럼 돌아왔다. 네가 1월 1일에 그런 글귀를 올리지만 않았더라도 이러지 않았을 거야. 사실 우리 상태가 無의 상태라는 건 되레 호재처럼 다가온다. 평행선처럼 정반대라는 사실조차 K와 이야길하면서 다 깨달았다. 단지 너다움에 자석처럼 끌려다니는 나를 즐기고 싶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의 흐름조차, 지구의 중력조차 뒤집어버릴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길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만 싶을 뿐이었다. 너도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이뤄지길 원하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질 정도로 점점 결정화가 되어 가는 이 마음도 사랑이라는 얄팍한 포장지에 감추어두길 바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너는, 하, 너라고 말하는 것조차 어색하군. 그래도 너는, 가장 이상향인 존재였다. 세상에 너만 한 백명 쯤 더 있었으면 해. 그럼 난 네 커튼에 깔려버릴테니까. 그 발언 이후로 영화를 봐도 다시는 볼 수 없을 행인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도 눈의 속눈썹 길이부터 체크하곤 한다. 너는 내게 딱 그런 존재. 내 사랑도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이다. 연애감정이라니, 그런 불결함을 들이밀지마. 이별이라는 이벤트를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렇게 우정이 어떤 방식으로 사랑의 상위 층을 점유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 내가 나락 갔을 때 네게 집착했던 기억 때문에 이런다고 믿었었는데. 아니더라. 내게 있어서는 네가 무얼 해도 백발백중이었다. 하다하다 힘이 풀려 택시를 타고 돌아가야 할 만큼. 네가 알려준 무가 좋다. 부담스럽다는 걸 안다. 그런데 평생을 걸쳐봐도 다신 없을 것 같다. 그냥 이 미적지근함이 좋아. 늘 백지인 상태, 좋다고. 나? 경탄驚歎할 뿐 너의 바운더리 안으로 내가 깊게 관여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단지 일년에 한번, 안된다면 이년에 한번이라도 밥 먹어줘. 충전하게. 이것도 별로니. 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으려나. 다시 우연히 만난다면 잘 말해보고 싶다. 연애감정 아니야. 잘 들어봐. 너무 높이 있어서— 혹은, 아예 다른 우주야. 너, 은하수 촥 펼쳐진 광경 보면 우와~ 하지. 딱 그 정도야. 그런 감탄은 감탄이라고도 못해. 경탄이지. 박수 짝짝짝 치고 손 털고 다음 번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는 거라구. 자연경관으로 남아주었으면 해. 사귀자고 하는 마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어. 건들면 유리처럼 부숴져버릴까봐 전전긍긍한 적은 있어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순수한… 감탄? 육각형이 너만큼 꽉 찬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딱 이런 느낌. 절대 넘볼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들어가서 깨트리거나 방해하고 싶지가 않아. 너의 너다움이 좋아. 지켜볼 수 있게만 해줘. 너, 내가 지난번에 좋아한다고 말 한 게 은근히 신경은 쓰였을 것이다.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도 이미 이해하고 있다. 모두가 총체적인 너라는 걸 깨닫고 난 후 홀가분해졌다.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여도 아까운데, 진짜 그냥 그뿐이더라고. 감탄하고 박수 짝짝 치고 우와~. 이런 사람도 살아 숨쉬고 밥 먹는구나? 마주보고 앉아서 밥을 먹으면, 차를 마시면, 모든 요소를 잘게 쪼개곤 충만감에 정신을 잃게 된다. 넌 뭐지? 너에게 난 그냥 선배라는 거 알아. 나한테 너는— 한 단어로 가둘 수가 없어. 정말 이런 마음이다. 나는 숨을 고른다. 너의 차분함이 좋으니까. 평소의 나처럼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흐름을 길게 가져간다. 회로도 맛탱이가 가긴 한다. 찰나의 순간조차 즐겁다. 정교하게 그린 육각형. 이게 딱이네. 석영 보는 느낌. 자연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잘 깎아낸 인위적인 보석인데. 그럼 입을 약간 벌리고 코로 숨 쉬는 방법도 잊은 채로 흘러가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쓰게 된다. 정말… 웃기겠지만, 이런 마음이다. 살다보니 사랑에 제한을 안 거는 쪽이 백 번 옳았다. 포괄적인 스펙트럼이다. 프리즘을 통과한 너는 언제나 단일한 색상 하나로 좁힐 수 없었다. 색과 색 사이 희미하게 벌어진 틈새까지도 사랑해보라고 하면 5분 안에 사랑한다는 글을 적어낼 수 있어. 글이 길어졌군, 아찔해. 롤러코스터 훅 떨어지는 순간의 짜릿함. 그게 다야. 그걸 위해 네게 요구하는 그 무엇도 없어. 앞에 앉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자. 일년에 한번쯤. 어때. 정말. 그게 다다. 눈만 감아도 영화인데. 다음 일년치 충전시켜준다 생각하고 숙성회의 길게 빠진 꼬리부분을 한번 이로 끊어달란 말이야. 화요 한 잔 기울여달란 말이야. 너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으면 좋겠다. 온갖 상상을 해도 나는 딱 이정도가 최적이고, 최선이고, 가장 행복한 지점이라는 걸 안다. 아주 잘 안다. 이 선 안에서 놀게. 봐줘. 어장도 아냐. 내가 들어가서 물고기? 물고기도 아냐. 그냥 눈으로 널 볼 뿐이니까. 하여튼 대단하다. 평생을 걸쳐 이런 사랑을 해볼 수 있게 하다니 영광이야. 그래, 언젠가는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백지이길 바라. 계속. 그런 편이 좋아. 어쩌면 평행선을 계속 달리는데도 참 즐겁다. 여기 위선은 단 한 문장도 없다. 재밌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이런 흐름마저도 싫어할 표정이 떠오른다. 근데 어떡하냐고. 진짜 ‘사귀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는데.
6 이름없음 2024/02/11 04:50:53 ID : vBcMi6Y9y43 0
그니까 이런 사랑도 사랑이라면 사랑이고, 이런 사랑도 우정이라면 우정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난… 이런 것도 가능할 줄 몰랐어. 어떻게 연애감정을 하위로 치부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지난한 연애를 해봐서? 이미 관계의 허무함을 느껴서? 그냥 네가 다 부수고 들어와서? 사랑이라… 정말 뭐라 설명하긴 힘들다. 단어 안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꽤 많다. 어디선가 선물받은 청을 숙성시키지도 않은 채로 마시면 떠오른다. 비타민C 메가도즈*를 한 덕분에 가벼운 신맛과 쓴맛을 즐기게 된 내가, 차에 들어 있는 껍질을 씹어 삼키며 웃는다. 물어봤었잖아요. 이거, 왜 먹어요. 매력 있지. 아마 다시 찾게 될 걸. 그 말은 나의 귀를 웅웅 울렸다. 고통에 가까운 아린 맛도 났었는데, 얼굴을 한껏 찡그려도 묵묵히 먹고 있었다. 씨는 뱉어냈다. 산미에 대해 다른 말을 나누었던 날도 기억이 나는데, 고작 5년 정도의 사이클을 돌아 새로운 인연을 만나니 ‘그런 고통스러운 맛’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총체적인 경험 모두를 그냥 사랑으로 가둬? 말 안 되지. 해가 져버린 동쪽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짠 공기였다. 그래서 더더욱 매력이 있는 과육이었음은 분명하다. 그치만 그때 먹은 레몬 색의 과일, 혼자 찾아 먹으라고 하면 절대 안 먹었을거예요. 나는 그가 어떤 얼굴로 까고 있었는지보다 어떤 손길로 까고 있었는지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바람은 밀려오고, 풀벌레 소리가 옅게 퍼져 있고, 짜디짠 바람이었다. 반대쪽에서 선풍기로 밀어내도 역부족이었다. 무슨 얘길 했더라? 이런 흐름들은 쉽게 휘발된다. 한겹 덧붙어야 꺼내기 수월하다. 쓴맛, 짠 냄새, 오소소 소름이 돋았던 촉감. 그리고 껍질을 까내면서 작은 분자들이 만들어내던 시트러스향. 이걸 왜 먹어요, 그야 매력있으니까. 당신이 아는 매력을 내가 이해한다는 게 참. 이해를 못할 때의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열매에 대한 에피소드들로 벌써 노랑과 주황이 지워졌다. 파랑도 지난 여름에 획득했었다. 남은 색 중에 빨강은 내꺼고, 남은 색에 적합한 인연들과 또 마주치게 될 것이다. 고작 이정도가 전부다. 아직 정의하지 못한 인물들도 있는데 굳이 끼워맞춰내지 않아도 어울리는 색이 있을 테니 그때까지 지켜보고 싶다. 난 항상 조들렸다. 그리 급하게 가지 않아도 때가 되면 척척 일이 풀리기도 한다. 언제나 채찍을 휘두르며 채근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서두르는 게 습관이었다. 그러다 우울로 빠져 회복해야 했었고. 극과 극으로는 떠나지 말자, 기분도 체온마냥 항상심을 유지해보자. 남들보다 혈압도 체온도 높은 편이긴 하지만. 너의 시간으로 달려가고 있다. 들은 이후 잊어버린 적은 없다. 챙기지 못한 적은 많았지만. ㅋㅎ. 코웃음친다. 생일을 기억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적어도 나한테는 공간을 만들어 리소스를 할당하고 그걸 유지시키는 이 모든 마음이 사랑이었다구. 신경을 써야 하고, 종종 기억을 해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나밖에 모르는 나를 많이 깨부숴줬었다. 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회화가 된 건지. 이래서 깨져봐야돼. 그만큼 다시 큰 그릇을 만들고, 파도치면 다시 와장창 깨지고, 또 새로운 그릇으로 만들어내잖아 결국. 바다는 언제나 파도를 친다. 인간의 눈으로나 파고가 높을 때는 안전에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영원히 일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돌발성 이벤트라도 태풍은 불어야 하고, 휩쓸리면 차차 복구하게 되며, 그것들까지도 모두 자연의 일이었다. 자연의 순환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겠어. 흐르는 대로 놔 두는 거지. 아, 산으로 올라 가야 하겠다. 역시 보고싶어.
7 이름없음 2024/02/11 05:22:02 ID : vBcMi6Y9y43 0
그게 종종 생각이 났어요. 다음번에 볼 때 몇개 생각 나면 던져주세요. 혼자 까서 먹어볼게요. 그건 어디서 사먹지도 못하잖아요. 팔지도 않는 과일을 까서 주시니까 여름만 되면 다시 먹고 싶어지더라고요. 왜 그랬대. 그땐 안먹는 게 나을 정도로 셔서, 써서 다시 안 찾게 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선물받은 댕유자청으로 환기한다. 아, 이거 좋아하실텐데. 보고싶군. 가능하다면 시차를 오래 둔 뒤에. K가 올해를 반환점으로 설정한 만큼 나도 그러고 싶었다. 슬슬 준비해야 하는 시점임은 분명했다. 생각난 김에 타서 마셔야지.
8 이름없음 2024/02/11 05:32:19 ID : vBcMi6Y9y43 0
아, 추워. 진짜 감기 걸렸어. 어젠 너무 무리했다. 두 눈으로 사라진 반지의 행방을 똑똑히 보아야 안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한 것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난 뒤에야 바지 주머니에서 찾을 수 있다.
9 이름없음 2024/02/11 05:33:17 ID : vBcMi6Y9y43 0
팍 때려줬다. 그렇게 소중한 건 몸에 계속 지니고 있어. 반지는 자국이 남으니까 잃어버렸을 때 더 아파진다고. 하, 오늘 왜이렇게 할 이야기가 많니. 다시 자야하는데.
10 이름없음 2024/02/11 08:38:21 ID : vBcMi6Y9y43 0
아주 오래 전부터 나를 지배하고 있는 큰 틀이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생각의 흐름이 이분법으로 흐르는 방향도 지켜보면서, 어쩔 수 없지. 나는 “원래” 그렇잖아. 그런데 원래, 란 없다. 원래란 없는 거다. 어떤 책의 글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이걸 깨트려야 개명을 할 수 있을 거야. 글을 쓰면서 다짐한다. 항상-그럴 필요는 없다. 당연함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라고 공부를 해왔는데, 난 성찰도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H가 흘리듯 이야기한 말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확실히 물어볼 걸. 이제는 그럴 수 없지만, 다른 글을 읽으며 그가 떠오른다. 생각의 전환이 아니라 사고관의 전환이 필요했다. 전환이라는 말도 진부하면 원래 내 방식대로 그냥 두드리고 부시고 밀쳐내서 꺾어버리면 된다. 마지막의 마지막 관문은 H의 문장을 뛰어넘는 일이다. “변태를 해도 너는 완벽한 —일 수는 없어.” 이건 적확했다. 어릴 적 읽었던 우화만 떠올려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집착하면 안 되잖아. 웹툰짤로 돌아다니는 이야기 중 하나를 그래서 좋아한다. 인삼인 줄 알고 좋아했던 고구마가, 자신을 고구마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4컷 만화. 중요한 건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세상이 어떻게 날 보는가? 에 매몰되어 있다면 어떤 종류의 평안도 일시적일 뿐 오래도록 지속할 수 없다.
11 이름없음 2024/02/11 08:43:39 ID : vBcMi6Y9y43 0
원래라는 건 없다, 절대도. 당연하지도 않고.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자연스러움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그냥 그렇고, 단지 그렇다. 규정을 지으려는 행동을 많이 해왔는데 해방감이 밀려온다. 그럴 수도 있지, 어쩔 수 없지, 그랬구나. 같은 표현들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내가 나를 보는 시선에 이런 표현들이 필요했다는 걸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지.
12 이름없음 2024/02/11 09:01:07 ID : vBcMi6Y9y43 0
의 네가 아니지만, 나중에 내가 읽을 때 헷갈릴까봐. 아, 호칭 정리 진짜 하든가 해야지. 그리고 이 이야기 끝엔 언제나 네가 서 있는 기분이 왜 들지. 넌 도대체 뭐였길래 나를, 또 너를, 그렇게까지 생각했을까. 뒤를 돌아본다. 너에게 난 뭐였을까. 넌 나를 고민하는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었을까. 뭐길래. 진짜 뭐냐. 너한테 난 그냥 나였잖아. 단지 나였잖아.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나를 견디기에 그때의 나는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도 나라는 사람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가 잦다. 그걸 어떻게 나누어 들어줄 생각을 한 건지. 그것도 사랑인지. 그렇다면 내가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한 건지. 시간을 10년만 전으로 돌리고 싶다. 앞으로는 그런 사람 만날 수 있을 거 같냐고 나를 앉혀놓고 물어보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오랜만에 다시 이 건물이다. 10년 전의 시계면 스무번의 계단만 내려가면 된다. 엘리베이터는 좋지만, 성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다. 호실의 키를 주머니에서 찾는다. 여깄다. 철커덕 열고 들어선다. 당연히 그때의 나는 30분 정도 늦게나 찾아 올 것이다. 언제나 약속시간에는 늦었으므로.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아침 약속에는 더더욱 약한 친구였다. 방안을 빙 둘러본다. 교복도 걸려 있고, 펜던트가 태양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땐 정말 넥타이가 매고 싶었었지. 생각에 잠긴 사이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 노크 좀 해주면 안되겠니? ㅋㅋ 웃으면서 깜짝 놀랐다고 말하겠지. 어린 나는 아, 죄송해요. 뚜벅뚜벅, 조금은 쭈뼛쭈뼛한 자세로 의자에 앉는다. 나도 마주 본다. 음료는 녹차 뿐이다. 그때도, 지금도. 녹차를 권했지만 딱히 마시고 싶진 않은 눈치다. 인터뷰나 해볼까 싶어서. 네? 무슨 인터뷰요. 띠껍다. 이새끼, 원래도 그랬지만. 나는 차분(?)히 설명한다. 오- 그렇군요. 네. 좋아요. 해볼게요. 그때의 나에게 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본다. 내가 이름으로 거론하자 깜짝 놀란다. 네? —요??? 이런 느낌. 물론 질문은 어린 내가 더 하고 싶겠지만 대답에 응하다니 용케도. 너는 나와 같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다. 그땐 지금보다 더 의젓한 눈빛이었다. 방안에도 걸려있는 교복을 완전히 정복차림으로 입고 있으니까 이게 나였지, 싶어 갑자기 웃기기도 했다. 몸도 마음도 가장 날렵할 때의 나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어선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기다린다. 때가 오고 있다. 내일이면 대답할 수 있겠군. 마주 앉은 채로 그를 압박할 수 없어 그럼 생각해보고 내일 즈음엔 답을 해줘, 한 뒤 나간다. 이런 글을 쓰면 정말 잠깐동안 평행세계의 어린 나와 맞닿은 기분이 든다. 미래를 다 알고 있는데도 아련한 기분이다.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나에겐, 정말 너라는 사람은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한참동안 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나왔다. 그 눈 속 소용돌이가 이 시점이면 언제나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의 힘이 아무리 좋아도 나의 글과, 나와, 너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런 것이다. 생각에 잠기는 게, 연락을 하고 싶은 게, 자연스럽다면 받아들여야지. 행동으로 옮길 필요는 없지만. 나, 내일 돌아와서 같은 호실의 문을 열어버릴테다. 1407호 쯤 되지 않을까? 이번엔 늦지마. 전해주고 나온다는 걸 잊었다. 내일 바쁘려나. 그래도 저녁 8시 쯤엔 보고 싶다.
13 이름없음 2024/02/11 21:54:00 ID : vBcMi6Y9y43 0
왜 근데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못할까 난
14 이름없음 2024/02/11 21:54:45 ID : vBcMi6Y9y43 0
모르겠다 솔직히~ 나 살기 급급하다는 것도 말이 좋아 그렇고. 솔직히 피해를 안 주고 좋아할만한 대상이 있으면 이제는 시선을 옮겨주는 게 예의겠지
15 이름없음 2024/02/11 21:55:00 ID : vBcMi6Y9y43 0
왜 이렇게 모르는 게 투성이야 세상이
16 이름없음 2024/02/11 21:56:06 ID : vBcMi6Y9y43 0
삶의 의미를 나한테서 찾는 일부터 해야 하나? 급한 일을 잔뜩 만들어? 뭔가 또 글을 써버릇하려니 괜히 여기 와서 기웃거린다니까. 이럴거면 시간 그냥 버려도 괜찮다
17 이름없음 2024/02/11 21:58:15 ID : vBcMi6Y9y43 0
그니까 난 날 불러놓고 대화를 해도 거기서 멈출 뿐 더 나아갈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된다. 어쨌든 돌아오는 피드백에서 또 멋대로 기대하면 나만 또. 거봐 의미부여 말랬잖아, 이게 문제라니까. 하면서 가볍게 털려고 노력한다. 살만하니까 또 생각에 여유가 있어서 이래. 바빠져야 된다.
18 이름없음 2024/02/11 21:59:52 ID : vBcMi6Y9y43 0
이럴 땐 밤산책 한답시고 생각 좀 밖에다 비워두고 와야 하는데 자꾸 쌓아놓으니 문제가 생긴다. 명상하자 명상… 생각은 소거돼도 괜찮다. 만드니까 치우는 과정까지 일이 된다. 일 늘려서 뭐할래. 결국 뒤만 돌아보는 꼴인데. 안그래?
19 이름없음 2024/02/12 02:12:56 ID : vBcMi6Y9y43 0
뒤를 안 돌아본다고 말은 해봤자 효력이 없었다. 사람의 뇌는 부정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단 말이 딱 이 상황을 두고 하는 것이었다. 코끼리! 생각하지마, 생각하지 말라고. 등만 안 돌린 거지 아주. 다짐하면 다짐할수록 반대편의 저항이 거세진다. 나도 생각하라고 프로필 바꾼거긴 해 유치하지. 알아. 계속 이렇게 유치하게 굴 거야? 연락 한 번 해줘. 라고 하는 건 혼자만의 짜증일 뿐이다. 칭얼거릴 곳이 없어 이런 곳에 칭얼이라니. 이런 애새끼야. 오늘이 나를 애처럼 하는 걸까. 작년이 일요일이었군. 다시 한 사이클이 완전히 돌아 월요일부터 시작이다. 아냐, 두 사이클이네. 같은 요일*은 4년마다 한번씩인데 윤년도 있고 하면. 이걸 왜 셈하고 있냐고 제발. 그냥 하는 김에 또 다 해? 이 지겨운 돌림노래? 돌림노래 부른 가수의 다른 노래가 흐른다. 이런 야심한 밤 그런 걱정은 왜 해 물어볼 뿐이야 오해는 왜 해 티비 드라마로 끝내기엔 저 달이 너무 밝아서까지만 같이 읊조려본다. 뭐? 달이 밝아?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고. 은근하게 붕 뜨면서 짜증도 나고 끌어당겨지는 기분이 별로다. 자꾸만 눈이 가 날 못 살게 구는 게 나도 어지러워 도와줘 정말 상황은 다른데 기분은 이리도 같을 수가 있는지. 어지럽다. 아 그냥 생각나면 생각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냐고. 난 지금 누구랑 싸우고 있는 거고. 왜 또 노래는 죄다 산뜻한 알앤비냐고. 이쯤되면 그냥 내가 쓰레기인 거 아님? 고작 같은 날이라고 연락하고 싶어하는 거? 독심술사 불러서 듣고싶다. 뭐라고 해야 되는데? 아니지,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정답이지. 졸립고 피곤하고 오늘따라 팔에 닿는 바람이 차다. 감기에 걸린 건 아닌데 이상하게 긴팔 옷을 찾고 싶다. 왜 이렇게 춥지, 분명 따뜻해야 되는데. 내가 지금 어디있는건지. 오늘 다녔던 곳에서 스치듯이 본 신부상이 떠오른다. 신이 정말 있다면 이런 방식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거, 집착이다. 알면서 왜 그러는지 알려주라고. 난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나. 여기서만 난리치면 모르잖아. 모르는 게 좋아. 양가감정 사이를 핑퐁하듯이 오고간다. 테이블도 참 작다. 스매시 한번 때리기 힘든 경기장이다. 때려봐야 나만 손해를 본다는 사실은 불보듯 뻔했다.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데 손님이 와 있고, 내일도 역시 모시고 다녀야 한다. 피곤하다. 혼자 걷고 싶다. 나이 뭐 많지도 않지만 한살 한살 먹을 때마다 외향적이었던 지난날의 나는 얼마나 체력이 좋았던 건지 궁금해진다. 그땐 진짜 하루종일 얘기하고 운동해도 쌩쌩했는데. 몸도 무겁고 마음에도 먹구름이 잔뜩 껴있다. 이런 몰골로 살아갈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 호실 찾아가는 게 무서울 정도다. 난 아직 나를 사랑한다거나 자연스러움을 이해한다거나 하는 모든 일에 익숙하지 않다. 오늘은 유난히 스트레스라는 말을 많이 쓸 거다. 하, 스트레스 받네. 표명하면 효과가 배가 되는데. 나도 유치하고 그냥 다 유치하다. 그만하고 싶다. 차단하고 도망칠래. 아니지. 이걸 해도 되나. 도망쳐봐야 무슨 소용이야? 연락 그렇게 받기 싫던 ex놈한테도 연락이 처오는 마당에. 보기 싫은 사람은 억지로 보게 만들고, 보고 싶은 사람은 안 보이게 만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살거나 나를 보기 싫다고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가마니가 좋고 나는 조금만 더 버티다가 가야겠다 너무 같은 노래만 갈고 닦았더니 새로운 노래 추천이 잘 안 된다 헤어질 결심은 수면제로 쓰면서도 마지막 장면 전에서 잠든다 끝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지가 않다, 졸리기도 하고. 사실 서래와는 영화에서조차 완전히 헤어지진 못한다. 그녀가 해준과 헤어진 것은 비교적 명확하나, 서래는 해준이 자신만을 느끼길 바랐다. 해준 또 신발끈 묶으며 올려다본다. 뭘 깨달은 건지. 떡국 열 번만 더 먹으면 알게 될까. 언젠가는 해준이 서래의 죽음 방식에 대해 힌트를 줬다는 사실을 깨달은 줄 알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아리송하다. 그래 지금 절멸하기 3분 전이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어떻게 쓸까. 진짜 3분 전이면 전화할텐데 말이지? 어우. 55, 56, 시간이 흘러간다. 아— 그냥 이대로 죽고 싶다. 잠에 스르륵 빠져갈란다. 나는 모르겠다.
20 이름없음 2024/02/12 05:56:08 ID : vBcMi6Y9y43 0
꿈을 꾼다고. 왜? 참 기분이 별로인 꿈이다. 오랜만에. 이런 방식으로 받는 벌도 나쁘지는 않아. 꿈이라. 선명한 가닥으로 심장이 뛰며 먼저 깨고 싶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하. 꿈이었군. 다행이다. 이야기의 첫맛부터 끝맛까지 좋지 않았고 화를 내고 있어서 그대로 깨버렸다. 잠에는 정말 들고 싶었었다. 그러지 못해서 탈이었지. 모호필름의 총소리와 해준의 첫대사를 듣고 집중하다가 의식이 옅어졌다. 오늘따라 전애인이 보고싶다는 둥의 글은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죄다 네가 아닐 건 뻔한데 왜 나는 미쳐가지고. 차라리 바빠서 다행이다. 아니라잖아. 생각이 나? 그럼 생각을 해. 방금 해준과 수완이 총을 쏘고 권총 약실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디테일 차이를 느꼈다. 표적지. 해준이 10점에 가깝다. 수완은 검은 원 안에만 박아넣은 수준이다. 이걸 유심히 볼 생각을 이제야 했네. 내가 영화를 몇번이나 돌려봤다는 건 거의 의미가 없다. 장면의 재발견은 이런 식의 사소한 계기로 발생한다. 오히려 익숙한 대사와 익숙한 그림이기 때문에 처음에 봤을 때처럼 날을 잘 갈아서 꿰뚫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미세한 차이가 여기서도 보이네. 모호필름 로고의 총소리에서 긴장하거나 소리를 줄이기만 해왔었는데. 결국 영화 초중반부에서 다시 총을 쏘는 사람은 해준이었다. 연습을 제외하고 총을 격발한 사람은 해준 한 명 뿐이다. 산오가 다리를 맞았지만, 제압은 못 한다. 머릿속으로 장면들을 뽑아 재구성해보니 해준도 참 불쌍한 사내다. 의심하는 역할을 가졌을 뿐인데 둘러싼 상황이 가혹하다. 기도수-산오-임호신-해준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동안 134만 서래의 남편 분류로 묶은 글들을 봐와선지 13의 행동을 4가 갖고오는 부분만 봤다. 하지만 산오 역시 해준과 대칭관계다. “이젠 이놈하고 친해져버렸다.”는 대사도 있다. 만약 수사 비리가 어떻게든 걸려버렸다면 쫓는 건 연수일텐데 연수가 해준을 죽인다? 이건 말도 안 되고. 수치심은 자살하고 싶은 감정을 강하게 자극한단다. 끝장면 이후 연수와 그가 끌고 온 경찰은 서래를 찾지 못하겠지. 미제사건이 되어 다시 벽면에 붙여지게 되고. 더 큰 건으로 치고 나가라는 압박을 견디면서 해준은 매일 새벽이 내도록 사건을 재구성할테다. 어디 있을까. 어디 있는지만 알아도 그렇게 답답하진 않을 텐데. 철저하게 해준 입장에만 입각하여 이야기를 읽는다면 서래가 증발한 이후 완전히 미궁이 된다. 그곳이 관광지라면 모래가 유실되어 그녀가 드러날 가능성도 있지만, 관객에게까지도 서래의 행방을 보여준 건 아니다. 술 먹고 들어가서 긴장하는 숨소리만 들릴 뿐. 어디 갔을까? 이 영화가 일종의 신화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서래가 영화의 막을 들어올려 아예 ‘영화’라는 공간 자체를 빠져나오길 바란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도 서래는, 해준은 어디엔가 있다. 좋은 의미로 미친 거지, 송서래, 장해준. 둘 다 어디서나 행복하길 바란다.
21 이름없음 2024/02/12 09:42:01 ID : vBcMi6Y9y43 0
하여튼 나도 참 예의가 없어. 많이 다듬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멀었다.
22 이름없음 2024/02/13 02:00:42 ID : vBcMi6Y9y43 0
쓴 글이 날아간지 꽤 됐다. 생각이 나는 날도 아닌 날도 똑같은 하루라는 걸 알게 됐다. 단어로 옮겨적진 않았지만 호실로 방문은 해봤다. 그땐 —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못된 짓만 했던, 앞으로도 할 나를 곱게 보기가 힘들다. 아직도 태풍이 두어번 더 있다. 사실 무수히 많다. 예견된 미래를 겪은 내가 어렸을 때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다니. 다 변명인데 미안해. 이런 모습으로 크길 바라지 않았을텐데. 불안해서, 위태로워서 미안하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한다. 그래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한테만 올인하라고, 지금 올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자만이라고, 진짜 최선을 다하라고 강하게 말하고 싶다. 여건이 어려운 건 알지만서도. 그때 썼던 안경테에는 가장 두꺼운 부분에 날개 모양 피스가 박혀 있었다. 눈동자와 날개를 번갈아본다. 이렇게나 반짝이는 청춘이었군. 그리고 어째선지 글만 쓰러 들어오면 넘어와가 순번이 된다. 아까 차에서도 한참 생각하다 지워진 글이 넘어와였다. 이런 야심한 밤,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보고 나를 만나러 간다. 현재를 사는 게 맞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 너는 안 그렇겠지 나도 알아. 기왕이면 나도 변한 모습으로 앞에 서보고 싶다. 네가 못 알아봤으면 좋겠어 나를. 나조차도 이게 나라고요? 물어봐줬으면 해. 의문스럽다고 두 눈 비비는 모습이었으면 해. 예전엔 인간관계 다 끊어먹어야 할까봐 겁 많이 먹었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니 놀라는 모습들 하나씩 수집할 기회였다. 거기서 떨어지면 아웃인거고 어쩔 수 있나 서로 존중이 안된다잖니. 오늘은 서래가 해파리 수면법을 하는 부분부터 잠에 빠지자. 뮤비 곧 나온다던데. 핸들 잡고 있는 옆모습에서 속눈썹만 한참 쳐다보다 나왔다. 어지러워.
23 이름없음 2024/02/13 02:03:32 ID : vBcMi6Y9y43 0
생활을 유연하게 하는 세 가지 단어: 그럴 수 있지 어쩔 수 없지 그러려니 해
24 이름없음 2024/02/13 02:05:00 ID : vBcMi6Y9y43 0
하— 진짜 자야지.
25 이름없음 2024/02/13 10:53:13 ID : vBcMi6Y9y43 0
아직도 호칭 정리가 안 돼서 우리 대화는 서로를 부를 단어가 없다 너말고는 없었지. 항상 그 호칭이 생략된 채로 이야기하는 기분 문득 생각났다.
26 이름없음 2024/02/13 10:58:26 ID : vBcMi6Y9y43 0
그야 진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난 거니까. 그냥 어색해도 이름 부를 걸. K도 *다른 사람에게 그랬댔는데. 그땐 호칭 자체가 나를 옭아매는 기분이 싫었다. 이제야 이름이라니. 돌 정도는 아니지만 한번 후회하니 묵은 것들까지 옷장 바닥에서 머리카락이 길게 뽑아져나오듯이 쏟아진다. 신정에는 반지 찾으려고 힘으로 옷장을 밀어 넘겼는데, 묵은 먼지들이 가득했다. 청소기로 쓸고 물걸레질 했더니 훨씬 말끔해졌다. 지쳤는데도 개운했다. 널 떠올리는 내 감정도 그에 못지 않은 명징함으로 남았으면 한다. 투명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란 생각은 안 한다. 너는 어떨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일련의 과정을 시간이 해줄 거라고 믿으며 가만히 손 놓고 있기도 싫다. 마스크 쓰고 장갑 다 끼고 만반의 준비를 한 뒤 해체해야지. 나도 변해야겠지만, 언젠가는… 돌아봤을 때 어떠한 감정인지와는 관계없이 사사로운 번민으로 시야가 왜곡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많이 바라나.
27 이름없음 2024/02/13 11:01:45 ID : vBcMi6Y9y43 0
막상 이렇게 생각은 해도 만나면 몸이 흔들린다. 네 중력보다는 나의 상태가 불안정해서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감정의 도로가 다 갈라지는 기분. 애써 세멘질 했던 길들이 바닥에서부터 균열을 낸다. 네게 중심을 잡아달라 말했지만 그 말을 되돌려 내게 해야 했었다. 그랬다면, 은 생각하지 않을란다. 반성 좀 해. 성찰도 더 하고. 넌 멀었어. 이건 정말 관문이 될 거다. 굳이 상담사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내가 나를 해체하고 뜯어보고 하나하나 다 닦아 기름칠해서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다. 가동될 때에 삐걱삐걱 소리가 나거나 폭발한 뒤 망가져버리지 않도록. 고장은 확실하지만 그간 유야무야 대강 넘기며 살아왔다.
28 이름없음 2024/02/13 11:03:48 ID : vBcMi6Y9y43 0
그래 단순히 시간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고 좌시할 문제가 아니야. 다음 단계를 밟아 나가야겠다면서.
29 이름없음 2024/02/13 11:04:28 ID : vBcMi6Y9y43 0
이런 부분에서까지 보조를 받고 싶지는 않고 보고는 해야겠다. 별로 필요도 없는 보고일지언정 의미는 쌓아두면 생기지 않겠어?
30 이름없음 2024/02/13 22:22:45 ID : vBcMi6Y9y43 0
사주 보는 중인데 애정관계에 대한 부분들이 맞아떨어져서 웃기다. 1월 : 경계 옛추억을 떠올리는 시기입니다. 마음이 심란하고 우울한 달이지요. 마음을 특히 잘 잡아야 합니다. 연인이나 기혼자들은 현실과 추억 사이에서 크게 혼돈할 수 있는 달입니다. 2월 : 활용 감성이 발전하는 달입니다. 우정으로 여겼던 마음이 사랑으로 발전 할 수 있습니다.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이성을 느끼게 되는 달이지요. 둘 다 맞았구만 아 ㅋㅋ 근데 이제 3월 금방 오니까 뭐. 올해는 그냥 순탄하게 지나가고 소업인지 대업인지 큰 흐름만 뚫어놓으면 인연이 또 오겠지. 지난 인연에 목맬필요도 없이 나만 갈고 닦으면 그만이다.
31 이름없음 2024/02/13 22:24:26 ID : vBcMi6Y9y43 0
헉 배우자 운은 올해 들어온다고 나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요
32 이름없음 2024/02/14 06:15:18 ID : vBcMi6Y9y43 0
허리가 뜯어질 수도 있나. 오랜만이야. 비가 와서 그랬나. 비 오면 근골격계로 다쳤던 곳이 돌아가며 통증을 유발한다. 늙었단 말 싫은데 허리와 발목이 시큰거리면 체감하게 된다. 안그래도 비오는 날 더 긁는다거나 하는 표지가 있었지만 긁는 거야 일상이니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요통에 방사통은 약으로 버티려 해도 영 힘들다. 진작에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지위가 변동하고 신분을 정리할 때가 되니 전반적인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남는 사람이 없다. 누구나 그렇지만, 다섯명만 건지고 가도 성공이라고 보는데 선뜻 카톡할 다섯명이 있긴 해도 왠지 찝찝하다. 뿔뿔이 흩어진 느낌이랄까. 연결되었다는 안도감은 없다. 막상 쌩으로 혼자 다녔을 땐 개의치 않았는데. 잘못 산 건 아니지만 인간관계에 자신했던 시절도 옛일이구나… 한다. 고향친구가 좋은 셈이니. 머릿속이 뒤엉켜 어느 한 화두를 꺼내 면밀히 다루진 못 한다. 보이는 족족 나를 정리하려 하는 친구가 뇌속에서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인가. 근데 그런 거랑은 관련 없이 사람 정리를 참 못한다. 매사에 깔끔할 필요도 없지만 기겁하며 행동에 옮길 필요도 없잖아? 그런 의문도 들고. 의 너는 지나치게 방어태세를 취한다. 보면 언제나 그랬다. 쭉 친하게 가져가는 사람들 외에는 의문이었다. 기본적인 내향 외향의 차이인 거겠지만서도, 철두철미하고 빈틈없는 모습이 여러 방면으로 더 다가가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다고 먼저 다가오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러면서 날 알고 있었다는 말은 왜 해선. 걔가 의미부여 하지 말라고 할 때 하지 말 걸 그랬어ㅡㅡ 난 의중을 전혀 모르겠으니까 살려고 좋은 쪽으로 해석하긴 했지. 다른 걸 다 떠나서 이젠 다른 쪽으로 포커스를 옮겨 잡아야 한다. 그게 인물이든 닿을 듯한 미래이든 간에. 말하자면 나의 허물은 억지로 벗어 던지려고 해야만 벗어지는 무언가인데, 하염없이 누굴 좋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시간도 감정도 낭비고 킴이 말했던 ‘그런 거’를 할 여유가 나지 않는다. 지금은 어찌됐든 간에 계획-목표-달성의 세 과정만 우직하게 밀고 나갈 시기인가보다. 올해 대운이라던데, 귀찮은 일이 풀렸다가 다시 얽혀가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졸업해야지. 공부를 더 하겠다는 다짐은 좋았으나 결과 예측이 힘들다. 그래도 꿈으로 일단 부딪히는 거야. 가장 최선의 시나리오로 뛰어들 뿐이다. 그 방법이 아니라면 변태든 개명이든 멀어진다. 이 죽일 놈의 껍데기가 뭐라고. 못 벗으면 내가 죽을까봐 그러는 거겠지만.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가 삶의 의지를 잃는 거보다야 당연히 허물만 벗는 쪽이 낫지 않겠어? 확인해보니 나방이라 하더라도. 그런 점에서 H는 틀린 거다. 나는 단지 나를 찾는 거였지, 이분법의 규칙에 매몰되기 위해, 혹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그래. 생각하면 항상 그런 방식이었어. 당연히 나를 찾는다는 뜻속에는 타인의 인정도 없진 않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타인이 심지어는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행인에게까지도 내가 어떻게 인식되느냐의 문제일 뿐인거지. 정말 특정 몇명 좋으라고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자기만족인데, 정도가 심해 자기혐오로 수렴해서 허물 못 벗으면 그냥 일찍— 그럴까봐 어떤 방향으로든 실현하길 바랐던 거였지. 어렵긴 어렵다. 누가 생을 날로 먹는지 좀 알고 싶네. 삶이란 게 어떨 때는 계란 까듯이 쉬워보여도 먹다가 퍽퍽해서 사레도 들리고 토하기도 하나보다. 예전처럼 간단명료하지가 않다.
33 이름없음 2024/02/14 06:30:00 ID : vBcMi6Y9y43 0
탕웨이기 아이유랑 뮤직비디오라니. 요 사이에는 이 이슈가 가장 나를 설레게 한다. 운전대를 잡은 서래의, 아니지, 탕유의 잘 짜여진 속눈썹. 코. 그리고 분위기. 꼿꼿한 아우라를 지닌 사람이 피폐하면 참 재밌다. 박수 짝짝 치고. 30초짜리 티저도 몇번이나 돌려본다. 나는 중독될 무언가에 깊게 잠식되고 싶다. 정신 못차리게. 그런 상태가 최상의 행복이라고 느낀다. 특별히 이뤄진 건 없는데도 내일이 기대되잖아. 습관인지 버릇인지.
34 이름없음 2024/02/14 19:18:34 ID : vBcMi6Y9y43 0
나는 맥락이라는 단어를 몰라서 맥락+맹이라는 합성어조차 맹락맹, 맥랑맹 등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싫다. 특히 커뮤니티 댓글에 남을 까내릴 의도로 쓸거면 좀 제대로 알던가. 욕은 하기 싫고 고상한 척하면서 명예는 훼손시켜야 하니 고를대로 고른 단어인데다가 틀리기까지. 저기, 부디 그렇게는 살지 마세요. 차라리 쌍욕을 해야지 꼴이 웃기잖아요. 경험칙에 의하면 댓글로 지적했을 때 오타라고 둘러대는 전형적인 인간 군상일 확률이 높았다.
35 이름없음 2024/02/14 19:58:46 ID : vBcMi6Y9y43 0
와 근데 이거 비슷한 내용으로 쓴 적 있는 것 같다. 아닌가? 이 기시감 뭐지
36 이름없음 2024/02/15 08:31:34 ID : vBcMi6Y9y43 0
근래에는 다른 커뮤는 잘 안 간다. 슬슬 커뮤 중독에서 나오고 싶었던건데 여기를 안하면 저기를 하게 되고. 아무튼, 그러다 눈에 확 들어오는 고민을 봤다. 다시 만나긴 힘든데 그렇다고 아무나 좋아지지도 않는다 영감을 줬던 상대가 사라져버린 것 같다 고착이 된 상태는 이 지점인 것 같다. 아무나 좋아지지가 않는다 단지 그뿐이다. 억지로 좋아하다가 나는 심지어 다치잖아; 해봐야 는 곤란하다는데 내가 밀어붙일 이유가 전혀 없고, 누군가에게 전해줬듯 1의 노력에 100의 정신력으로 돌려줄 필요도 전무하며, 솔직히 내가 살려고 했던 거였으므로. 생존의 문제를 부차적으로 던져두면 과연 앞으로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는가? 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필요하다. 정답일 필요도 없고. 나는 공통으로 끌리는 포인트가 있었지만 그걸 전부 연애감정으로 치환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너라는 사람을 두고 분광기를 끌어오면, 우정이 사랑의 하위라고 느끼게 할만한 진정한 사랑이라는 생각에 얽매여있게 된다. 그런 마음을, 정확히는 마음이 들게 하는 인물을 다시 못 찾을까봐 괜히 새벽이 되면 손톱을 잘근잘근 씹게 된다. 나타날 거라고? 만나 봤는데 아니던걸. 그런데 영감이 무어라고 하나의 느낌만을 찾아 헤매는지, 매우 바보처럼 느껴지다가도 그런 감각이 아니라면 굳이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넘어가버린다. 헤어진 뒤의 치료과정에서는 장난—얘의 내일이 궁금하지 않는다면 나는?—으로 아무나 좋아하는 상태이긴 했지만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진 않았다는 결론으로 마무리 짓곤 했다. 그니까 그때는 헤어진지 얼마 안돼서 그냥 너 아님 안돼 따위의 일차원적 고민인 줄 알았지. 시간이 많이 지났고, 종종 네 이야기가 내 입에 아무렇지 않은 정도로 자연스레 오고갈 때마다 느낀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닌데도 기분이 붕 뜬다는 점, 어떤 X와는 뒤지게 엮이기 싫은데 너는 엮여져 있었으면 한다는 점. 그 외에도 W의 지적대로라면 내가 대화에서 가장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부분은 네 얘기를 할 때였다. 아마 다른 사람도 그렇게 말할 걸. 왜 그런 거지? 라는 간단한 의문은 조금 치워두고, 어찌되었던 간에 n번째 연애를 할 때 방해가 될 정도로 시작의 단추를 요상한 꼴로 꽂아두었다면 첫단추까지 다 풀어볼 수는 없느냐는 거다. 물론 어떠한 에피소드/이벤트 이전으로 절대 돌아가진 못한다. 도대체 너는 뭐길래 나한테 이런 감각을 제공하는거지. 아직도. 헤어지고 나서도 미련 철철 풍기는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다시 얼굴 볼 수 있다면 어떤 방향으로든 더 나은 사람이 되게끔 채근한다. 설령 그것이 어릴 때의 치기 같은 승부욕이라고 할 지언정 떳떳하고 싶다. 계속 그래. 나락으로 가고도 싶지만 어찌저찌 악착같이 살아서 가장 최상의 상태를 증명하길 바란다. 나는 너와 달리 아무것도 없거든. 공부 더 해야하잖아. 막연한 공상을, 아무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일을 닳고 닳을 정도로 기원해서 꿈으로 삼은지 이제 벌써 20년이라는 사이클이 돌아가는데. 너도 이겨야(?)겠고, 내 꿈도 지켜내는 걸로는 모자라서 이뤄내야겠어. 근데 왜 너는 내 이야기 끝에 있느냐고. 시간의 흐름을 떠나서 무슨 결정적인 이유가 나를 너의 흐름에 매여놓게 하는 건지는 정말 알고 싶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한데. 그 가능세계를 연다는 것도 미친 짓 아니니?
37 이름없음 2024/02/15 08:42:00 ID : vBcMi6Y9y43 0
그냥 그런 상태이다. 보고싶으냐고? 맞다. 그래봐야 해후나 나눌 뿐 생산적인 논의가 아니라는 데에도 동의할 수 있다. 고착된 심리를 뛰어넘고 싶다. 내 상황을 내가 뛰어넘어서 다시 보고픈 느낌에 더 가깝다. 누가 그러냐? 인연인 거면 언젠가 만난다잖아. 그런 희박함에 기대면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나를 이렇게 만드냐고 그것만은 좀 알고 싶다. 역시 대화가 모자랐어 우리; 나만 너무 일방향적이었다. 쫓아갈 수 있다면 쫓아가서 개패주고 싶어. 그것도 아니면 K를 친구로 일찍 만나서 고민이나 상담해볼 걸. 야 어떻게 하면 소통을 잘 할 수 있냐? 그는 말한다. 듣기나 해. 이게 정답이었는데ㅡㅡ 이게 의 느낌과는 다르다.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너를 잊으려고 네게 쏟았던 에너지를 올인한 거니까. 그러지 않았으면 미쳐버릴 뻔했다. 사실 그 친구에게로 흘러가야만 했던 마음을 전부 우회로로 토해냈다. 이거, 좀 이상하긴 하지? 그래서 더 공허했던 차였고. 왜 이렇게까지 좋아하지? 라는 생각이 나에게도 그 애에게도 닿아있으면 예의가 아니다. 내가 먼저 알아채고 회수했어야 마땅한 문제였는데, 우회로로 뱉어내지 않으면 너한테는 지는 느낌이었어. 5의 문제도 점점 풀린다.
38 이름없음 2024/02/15 09:19:56 ID : vBcMi6Y9y43 0
“단지 너다움에 자석처럼 끌려다니는 나를 즐기고 싶었다.” 인 거잖아. 내뱉는 대로 크게 수정하지 않은 문장에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경탄驚歎할 뿐 너의 바운더리 안으로 내가 깊게 관여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이 문장 쓸 때 약간 헷갈렸는데 관여하길 원치 않는다는 말이었다. 너와의 차이점은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데에 있다. 여전히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강하게 부딪히고 싶기도 해. 죽도 밥도 좋으니 한번 더 부딪히고 깨져도 좋겠다. 무슨 차이지? 단순하게 사랑이니 우정이니 가둬놔서 생각의 틀이 제한됐나. 사람으로 보면 감정의 크기나 밀도나 심도가 전부 밀리긴 한다. 그 이상 파고 내려갈 수 있을까? 막말로 너를 만날 때엔 아르헨티나까지 밀고 갔다고. 지각 맨틀 외핵 내핵 다시, 그리고 하늘을 보면서 웃는다던가 남반구에서는 변기물 내릴 때 거꾸로 돈다는 말만 들어도 재밌었다고. 내키지 않아도 네가 시키면 그 빌어먹을 아르헨티나에서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도 있었어. 근데 왜 이런 걸 한번도 예견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부러뜨렸나. 부러트리다보다는 뜨리다가 더 알맞는다. 뚝, 하는 소리를 내고 완전히 꺾여버린 이후 잘못 치료돼서 겨울만 되면 비만 오면 시큰거린다. 괜한 오기에 더 잘 걸어보겠다며 씩씩대도 아프긴 아프다.
39 이름없음 2024/02/15 09:23:03 ID : vBcMi6Y9y43 0
너한테는 애초에 내키지 않는다는 느낌이 아예 안 들었거든. 아예 그런 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엑스를 만나고 또 기타등등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다보니 내키지 않은 일이 훨씬 많아서 내키는 일만 처리하기에도 고역이었다. 눈에 띄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대화하다보면 5분만에 감이 왔다. 차라리 그 정도의 마음으로 색채로 짝사랑이라도 하게 해줘봐. 하나의 색에 가둘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억지로 닮았다고 생각해왔던 5를 제외하면 분류가 불가능한 사람도 없었다. 두 색에 걸치는 누군가는 있었나? 자신이 없네. 뒤를 돌아본 상태였다는 걸 최근에 깨닫기도 했지만. 아성을 무너뜨릴 사람이 나타나주길 바란다는 게 오만인가?
40 이름없음 2024/02/15 09:25:18 ID : vBcMi6Y9y43 0
그리고 문제가 다 해결된다면 내 역린은 오로지 나의 안에서만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해야겠어. 누구 탓은 아니다. 내 탓마저도 못 하겠다. 할아버지가 보신대로 그저 쥐고 태어난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건강해. 누가 건드렸든, 누가 발견했든 간에 잘못된 개념이 아니다. 난 지금도 나의 자연스러움보다는 시대나 사회의 혹은 병리의 정상성에 목을 맨다. 지니고 태어난 건 기질이라며. 그걸 바꾸려고 노력해볼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아니 그냥, 괜히 진단명이 있겠냐고. 나만 이런 고민하는 것도 아닌데다가 이걸로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나를 싫어했다. 이제는 좀 뒤집어 생각도 해보자고. 개명이 머지 않았으니까 남은 기간동안만이라도 이 상태를 즐겨야지 어쩌냐. 내 허물까지도 일단은 나인 걸; 내가 물이 모자라서 바다랑 친해지라는데 보려면 어쨌든 건강해져야 한다니까 보러 간다. 신분증은 또 잃었다. 이쯤되면 지금의 모습일 때는 신분증이 도망가는 게 더 잘 어울려서 달아나는 건가. 하여튼 마음에 안 들긴 하니까.
41 이름없음 2024/02/15 19:41:26 ID : nPjAp866rtc 0
운동하며 고칠 거 없나 본 건데 강아지가 도통 가질 않아서 일어났다. 주인이 줄을 빠짝 잡아당기는 데도 움직이질 않아서 내가 당황했다. 17이라는 노래는 반복해서 들어도 이런 친구가 있을까 싶다. 엄청난 행운인 거겠지.
42 이름없음 2024/02/15 22:11:13 ID : vBcMi6Y9y43 1
언젠가 글을 정말 흐르듯이 쓰고 싶어서 말하듯이 쓴다는 내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글을 읽을 때나 쓸 때 80%의 확률로 묵독을 병행하는데, 그러다 보면 글이 튄다. 뜬금없이 흘러나오는 다른 마음까지 치밀어서 그대로 받아 적는 느낌이 된다. 불현듯 춥다거나 배고프다거나 글의 전반적인 주제와 상관없는 곁가지가 치고 나올 땐 퇴고하면서 잘라낸다. 말하듯이 쓴다는 것에도 장점이 있다면 큰 걸림이 없는 글이 써진다는 점? 물론 나는 내 글이므로 애정 가득한 눈으로 봐서 그리 보일지도 모른다. 아 진짜 애플 비공개 릴레이 켜지면 작성 안 되는 거 어떻게 안 되나. 별은 달기 싫고 글 날아가서 부분 복사만 됐다;
43 이름없음 2024/02/15 22:13:51 ID : vBcMi6Y9y43 0
모르겠다. 뉴스를 자주 보는데 이슈가 너를 겨냥하는 기분이 들어 괜히 욕부터 들이민다. 하여튼 감정카드 중에 분노부터 선제 발동하는 버릇도 언젠가는 치료해야 하는데. 난 진짜 답이 없나. 아니 있겠지만 이걸 고치고 싶은 생각이 진짜 있기나 한 거니? 별것도 아닌 유행어에 버튼 눌리는 거 싫단 말이지. 전등이 켜지면 경계부터 한다. 아직도 언급된 장소에 가면 긴장한다. 예민은 체질이야? 물 많이 바람 많이로 완화 좀 시켜야해? 누가 내 불에 소화기 촥 뿌려줬으면 좋겠다. 이래서 상극이랑 잘 맞고 동질이랑 파국인가보다. 불과 불이 어떻게 시너지로 작동하겠어. 아예 나를 포섭시키는 불은 이제껏 딱 한 사람 봤다. 푸른 불꽃이었잖아. 어떻게 빨간 불꽃이 이기냐고. 오늘 뵈러 가려고 했는데 멀쩡히 버스 정류장에 앉은 나를 무시하고 유턴으로 슥 올라가서 놓쳐버렸다. 예의 있는 옷차림도 아니었다마는. 내일은 아예 운동 코스를 그쪽으로 짜든가 해야지. 좀 추워졌으면 좋겠다. 더우니 도로에도 아지랑이가 일고 눈앞에도 비문들이 이글이글 모인다. 이 증상의 상관관계만 못 밝혔다. 배운대로 물은 아주 권장량을 마시고 있다. 어떤 운동이든 과호흡 심하게 유발하는 건 하지 말랬는데. 의사가 80%만 쓰라고 했었는데. 처방은 아직도 소화를 못 시켰다. 이제껏 120 밟고 달려왔다. 꽝하고 한번 사고 난 후로 50 미만만 밟아야 한다고 한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반항심이 드는지. 내가 아픈 건 내가 제일 받아들이기 싫은가.
44 이름없음 2024/02/16 13:18:34 ID : vBcMi6Y9y43 0
너일까봐 더 잘하게 된다.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지가 않다. 너한테 하는 거 10%만 했어도 인생이 윤택했을텐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상담 내용을 꽤나 흡수하고 살아왔다는 걸 느꼈다. 자연은 자연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은 그렇게 놔두면서 나다움을 지켜야지. 강의 하류에 서서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으면 서있기 점점 어렵게 된다. 수영도 못하니까 휩쓸리면 끝이다. 이젠 순방향으로 몸 전체를 돌린다. 튜브도 타면 좋다. 구명조끼는 믿음직스럽지 못하니까. 둥-둥- 뜬다. 사주에 물이 부족해서 물에서 깨달음을 얻었나, 작년 여름 바다에서의 깨달음이 흐르고 있다. 둥둥 떠. 그냥. 떠 있어. 몸을 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 모든 일이 전부 나를 흐르고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도 없지. 나는 나대로, 다른 이들은 다른 이들대로 흐르게 하고 안 되는 부분에 지나치게 마음 쓰지 말자. 이게 자연스럽다니깐. 이런 원리를 깨닫고 나니 스트레스 수치가 저절로 낮아진다. 인상 팍 쓰면서 이 일은, 저 일은 어떡하지, 그럴 수는 없더라. 흘러가게 두어야 흐른다. 나도 누가 준 튜브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기도, 모래사장 가까이 흘러오기도 한다. 짠 물에도 머리 넣어보고. 단 하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수영을 할 수 있게 돼서 물고기를 좀 보고 싶다.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꿈이지. 아잇 진짜. 왜 써지지도 않은 글에 중복이 뜨지. 물어봐야겠어.
45 이름없음 2024/02/16 19:00:47 ID : 5SFbdu2lfRw 0
은 정말로 그런 그림과의 기싸움이 있었는데 언젠가 쓸 시간이 있을 것이다. 파랑. 파랑이면 족하다지만, 전후 사정까지 포함해야 한다. 일기를 안 쓰고 있었을 시절이라 남은 거라곤 사진과 영상 뿐이었다. 어떤 여름이 그런 여름 같을 수 있을까? C도 보고 싶어. 아무래도 태생이 자유로운 사람이라 매력이 넘쳤나보다. 괜히 사장님 하는 게 아니야. 사람을 끄는 사람이 자영업을 해야하는구나 느끼기도 했다. 겨울에 보는 C라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파랑도 봄에는 꼭 연락을 드려야지. 아; 귤 진짜 사고 가든가 ㅡㅡ 왜 연락을 머뭇거리게 된 걸까? 내가 예의가 없었을까봐?
46 이름없음 2024/02/16 19:09:52 ID : 5SFbdu2lfRw 0
다시 돌아올 계절이나 순간이 없다. 예전부터 잘 알았다면 시간을 더 지혜롭게 썼을까? 나는 왜 지혜라는 단어에서 네 이름의 뜻을 되감는 걸까? 돌이켜보면 너도 참 닉값 잘했지. 겨울이라서. 단지 겨울 타는 거겠거니 심호흡한다. 노을도 매직아워도 끝나버린 밤에는 섣불리 담배 펴댔다가는 한 개비로 그치지 않는다. 이거 진짜 중독이라니까. 도대체 어떤 상태에 대한 중독인지 모르겠다.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거 이제 좀 진부해질 때 되지 않았니. 그런데 나, 진짜 일상의 이야기로 길게 적는 법을 잊었다. 사실 그렇지. 누구에게나 평범한 순간이 길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 손꼽는 거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때로 돌아가면, 그런 너와의 순간을 잡아채기 위해 단순히 세줄 씩 혹은 몇 단어씩 끄적이던 소소함에서부터 시작이었다. 별거 아냐, 지금도 별거 아니지. 단지 습관이 무섭다고 올해로 꼭 일기 쓴 지 십년이니까 최초의 목적대로 훑기를 반복하나보다. 아무 말인데, ~거라는 말 진짜 빼기 힘들다.
47 이름없음 2024/02/16 19:11:20 ID : 5SFbdu2lfRw 0
단지 습관이 무섭다고. 널 떠올리는 일이란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다고. 추우니까 괜히 더 몸을 크게 움직여봐도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다. 이게 다 추워서 그래.
48 이름없음 2024/03/02 01:32:05 ID : A2HDumtuk8o 0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그 애’의 모음집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휘둘리는지에 대한 깨달음의 반복이 닳긴 닳아버렸구나 싶기도 하다. 너에 대한 얘기는 쓰고 써도 마르지가 않았다. 사실은 마르길 바라지 않았다. 톱니바퀴 좋아, 다 뜯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의 일기처럼 나에게로 흡수된 너의 부분까지 내가 어쩔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열등감의 총체를 ’그 애‘로 놔두지 않고 확장한 것은 나였다. 나의 나, 너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아닐 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나. 이주 쯤 뒤에 나는 영화 해빙에 나온 의사처럼 미쳐버린 채 책이 쌓여있는 방안에서 거울상으로 너를 만들어놓고 역린의 탓을 하고 있겠다. 왜곡된 상像. 이젠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하면 애를 써야 하는 네가 서 있다.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니야. 어떤 핑계를 갖다붙여도 이렇게 만든 건 나였다. 또 다시 이분으로 쉽게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불건강의 구획을 하면 좋겠지만 그건 낡은 방법이란다. 어디선가 읽은 글 속에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이분의 사고방식을 가진 캐릭터를 마주할 때도 나이스한 방법을 쓴다고 느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나이브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야지. 이분의 굴레에 얽어놓는 자가 ‘나’라는 걸 알면서도 멈추어 있다. 어떤 티키-타카였을까? 아무것도 안 해도 그 애는 파장이 된다. 길고 길다. 마루와 마루 사이의 진폭도 크다. 아무리 성찰해도 너는 다만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사고의 흐름이 이미 왜곡되어 있다. 투명하게 하고 싶다. 말하자면 제로의 상태로 돌려놓고 싶다. 범인 색출해서 총 들고 겨냥해봐야 자백만 길지 실질적으로 이벤트가 발생하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공으로는 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쓴다. 닳고 닳은 쇠공이 반질반질해진 채로 낡은 형광등의 빛을 반사한다. 가만히 지켜본다. 한번도 제대로 된 손수건으로 닦아준 적 없다. 광택제를 바른 후 천천히 말려 마른 수건으로 깔끔하게 해보려고 시도는 했었다. 그럴 때마다 도리어 탁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근원이 뭘까? 탈피를 원한다면 그 애를 소설처럼 벗겨내듯이 있는 그대로만 가지고 잠가버려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네가 촉발이든 시발이든 하나의 극점이 되어서 파장을 만드는 걸까? 골이 깊어서. 시점이 지나치게 과거라. 할말이 많다. 왜 많은데? 언젠가는 명경지수의 법을 따라 네게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지겨운 노래가 떠돈다. 이 노래만 들으면 ‘그런’ 마음가짐에 고착된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다. 언젠가는.
49 이름없음 2024/03/02 01:35:24 ID : A2HDumtuk8o 0
놓고 보니 따옴표가 뒤집혔다. 뒤집힌 따옴표 좋다. 지금의 상태는 딱 저런 느낌이다. 방향이 틀렸고, 앞으로도 틀린 방향을 억지로 순방향으로 맞추지 못하는 상태. 나는 용을 써서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놓고 싶다는 욕심에 부정 이외의 스탠스를 취한 적이 없다. 다만 추악한 마음은 욕망일 뿐이었다. 절대로 정답이 아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되, 버려야 한다. 부정하는 순간 싸우게 되니 지친 거지. 다시 마크를 해서 돌아오고, 새로운 정보는 쌓아둔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잖아. 04:20 그래도 싫긴 해. 더욱 정확히는 별것도 아닌 변화에 휘둘리는 내가 싫은 거야. 그걸 즐기는 척 하면서 오만 신경을 다 쏟고 있잖아. 그냥 몸의 반절 혹은 반의 반절은 걸쳐있는 상태인 게 일종의 놀이인 거다. 시선을 돌릴 누군가가 나타나주길 바란다는 건 오만이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하되 에너지의 총량을 줄일 수 없으면 1/N으로 나눠서 여럿에게 돌리라는 조언도 있었다— 신경이 빼앗기고 싶다. 그럴만한 사람이 오고 있다. 스스로 봄을 불러오고 있잖냐. 경거망동 같은 건 할 수도 없는 계절이 봉오리를 틔우고 있다. 벚꽃의 지옥이 들크름하게 느껴질 거라고 괜히 기대한다. 괜히 실망하고 싶다.
50 이름없음 2024/03/04 02:19:43 ID : 3Bfala8mHu4 0
왜 하필 오늘일까?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면 이 글은 쓰여질 수 없으므로 몇 개의 편린을 줏어 가까이 맞춰본다. 킴이 보고 싶다. 이외엔 길게 늘어뜨릴 이유가 하등 없다. 회원제로 변경되는 동안 망설이다가 올리지 못한 일기에도 짧은 순간의 만남이 못내 아쉽다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모든 글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고. 제대로 안부를 나누지 못해 씁쓸했다고. 당신도 나와 동류의 마음이었을까? 얽혀있지만 가까이 다가가 풀어보면 간단하다. 짧은 인사로 훅 다가온 킴과 나의 거리는 가까웠고, 불과 몇 달 전에 만났던 것만 같았는데 아니었으며, 경황이 없었다. 내 심장이 어떤 감정을 연료로 해서 빠르게 달음박질 치는지 궁금했다. 답을 찾는 대신 뒤돌아서 시트러스 향을 떠올렸다. 지나치게 시큼하다. 향긋해 보여서 손에 닿으면 미묘하고, 더욱 가까이 가져가면 후회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을 때 불현듯 당긴다. 그가 아니라면 어디서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오랜만에 듣는 당신의 성문聲紋이 고막을 예리하게 흔들고 있다. 한달음에 뛰어오길 잘했어. 난 잠깐 서 있는 동안 무심하게 닫히는 자동문이 미웠다. 내 이름은 왜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는 거야? 죄다 기분 좋게 상큼하다. 나는 거기에 얽혀 있을 뿐이었다. 모르겠어. 이 감정에 라벨링을 해야 할까? 이걸 설렘이라고 하면 웃기잖아. 인간적으로 사랑한다는 말도 성급하고. 그냥 난 예전부터 그런 어른들이 좋았다. 특별한 기분이 들었어. 어른들이랑 말을 섞는 게 좋았지. 그게 그냥 좁혀진 건가? 아니면 습관처럼 애정을 먹고 털어버리는 걸까. ” 이미지를 묶어놓으니까 계속 동일한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이것 역시 일종의 고착인데…… 달리 표현하자면. 그래, 그는 지나치게 수수했고 매우 흐린 복장이었다. 옷차림이 칙칙하다. 옷장 깊숙한 곳에서 꺼낸, 퀴퀴한 냄새가 *날 것만 같은 자켓이었다. 옷깃도 몇 년 전에나 유행했던 모양새였다. 짧은 순간 옷감의 결까지도 눈여겨 보면서 별의 별 생각을 다 했다. 이곳저곳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어 제대로 된 말을 못했다. 괜히 허둥지둥 대지만 않았어도 500자는 더 썼을텐데. 흥미로운 문장은 또 있다. “그니까 나는 이미 기에서 밀려 있었다.” 그놈의 압도감은 눈 여겨 보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였다. 분위기니 대기니 아우라니 떠들어 댔던 건 대화할 때 깃발이 빼앗겼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대화에서는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쓰지 않고 자연스러운 티키타카를 하는데, 판별하기 위해 애를 쓰느라 그랬는지, 아무튼 좀 특이하다 싶으면 꼭 ‘압도되었다’는 말을 써놓는다. 상대는 보통 나의 템포가 커지지 않게 한다. 말은 느리게 고르고, 생각은 두어번 더 꼰다. 그래봐야 제대로 되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과 대화할 땐 종종 허를 찔렸다며 웃는다. 그때는 내 마음이 아스팔트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 위에 서 있는 것 마냥 투명하게 비춰져 함께 내려다보는 장면이 불쑥 떠오른다. 모두에게나 공평하게 걸어두는 바리게이트가 해제되고 단숨에 꿰뚫린다. 불편함 속의 편안함이 정확한지, 편안함 속의 불안감이 적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알 수 없음)의 상태로 불문에 부쳐 두자. 실은 그것마저도 즐겁다는 뜻이다. 모든 영감은 다 이곳에서부터 온다. 이거면 됐지.
51 이름없음 2024/03/07 02:26:50 ID : Pg3U0oJWjct 0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와 좌측 계단을 타고 506호를 찾고 있었다. 그는 저 먼 복도에서부터 걸어왔다. 어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는지도 들리지 않았다. 당신 뒤에는 학생 두 명이 보였다. 더 가까워지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인삿말은 어떤 게 좋을 지 몰라 헤드폰만 벗었다. 506호 아니에요? 504호에요. 만으로 1년이 돌았을텐데, 이제서야 그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 되감는다. 서면이었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 쯤 엘리베이터에서 나눈 게 가장 마지막 ‘대화’다. 그는 안부를 자세히 물었다. 괜찮다고 대답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 지를 간단히 덧붙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고맙다고 하며 나갔다. 뭐가 고마웠던 걸까? 그저 Thank you 같은 인삿말이었나. 차라리 성격이 아주 발랄했다면 그 귀여운 후배처럼 >_<의 느낌으로 인사했을텐데. 그러지 못하고 말만 계속 고르고 있었다. 덕분에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래도 좋다. 이걸로 여름까지는 날 수 있을테니. 그러나 당장은 미래고 뭐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터져가는 머릿속을 복구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여기저기서 자꾸 나사가 풀렸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 헛짓거리를 할까봐 입을 다물었다. 그토록 바라던 사람을 보다니. 설렘에 손이 떨렸다. 종종 그의 결혼 반지가 반짝였다. 처음 신문訊問 받을 때 서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양치를 끝내고 반지 자욱이 남은 손가락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는 황급히 반지를 꺼내 낀다. 해준은 좀처럼 결혼반지를 빼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과 대조된다고 생각했던 거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산 나의 것은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소지에 끼다가 잃어버릴 뻔한 적이 있어 약지로 바꾼 후 가장 뿌듯했던 순간으로 기억될 장면이 남았다. 한동안 집중하는데 슬라이드가 익숙한 빈칸으로 넘어오고 그는 이름을 외우지 못한 다른 학생들 대신 내게 질문을 던졌다. 당황스러웠다. 당신이 날 주목할 줄은 몰랐다. 위에서 꽂히는 눈빛에 압도를 당했다면 바로 이 순간이다. 훅 치미는 설렘을 억누르고 말을 골랐다. 70점도 안 되는 답변이라니. 그렇지만 그는 늘 앞에서 잘 말해주었듯이, 라며 긍정의 피드백을 돌려준다. 다른 이들도 물론 그렇지만, 그의 대답은 훨씬 부드럽다. 입에 달큰하고 말랑하게 들어와 삼키기 쉽다. 참 오랜만인 느낌이었다. 고작 일 년인데, 멀고 먼 시간을 건너 온 듯 아련했다. 글을 쓰고 고쳐 써도 여운이 길다.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다만 1시간 반 정도를 함께 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한참 생각해본 결과는 이렇다. 오늘이 그의 색을 분광기로 낱낱이 살펴본 날이라 그랬던 건 아닌가 한다. 당신의 파장은 적어도 내게는 머리와 꼬리가 긴 보랏빛으로 보였다. 드디어 색을 결정하게 된다. 짙은 와인색까지 파장이 펼쳐진다. 매직아워의 양 극단을 연결하고 있다. 빨강이다! 싶은 부분 직전에 끊어진다. 이 관심을 여럿에게 분산시키고 싶다. 그러지 못할 걸 안다. 그래서 월요일까지 사랑해버린다면 그래도 좋다. 어디서 월요일까지 좋아져버린다는 글을 읽었는데, 상대가 유부라서 퇴사했다는 사람이 쓴. 그 마음을 아주 잘 안다. 너무 치달아서 임계점을 넘을 게 눈에 보이니까 얼른 등을 보이고 도망칠 수밖에. “신경이 빼앗기고 싶다. 그럴만한 사람이 오고 있다. (그가) 스스로 봄을 불러오고 있잖냐. 경거망동 같은 건 할 수도 없는 계절이 봉오리를 *틔웠다. 벚꽃의 지옥이 들크름하게 느껴질 거라고 괜히 기대한다. 괜히 실망하고 싶다.”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의 지옥이다. 정말. 들크름하다 못해 한바가지 다 쏟아서 들이키고 싶다. 아직 개화하려면 멀었다. 이제야 매화의 꽃잎이 하나둘씩 낙화하고 있다. …아니, 사실은 머잖다. 중간고사를 지나면 등꽃의 계절이다. 그때 당신의 향기를 등꽃잎과 비교할 수 있게 될까. 조금 더 대화하고 싶다. 보고싶었다고 고하고 싶다. 열망이 발을 동동 구르는 통에,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 그럴 일이 아냐, 이건 서막일 뿐이야. :) 그 특유의 씩 웃는, 씨익도 아니고 씩 웃는 모습이 선명하다. 아무래도 미쳐버리기로 작정했나보다. 이건 사랑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고 아주 오묘한 감정이야. 마침 무대의 서막이라는 어절을 쓰게 되어 다시 황을 떠올린다. 통찰이란 멀리 있지 않다. 단지 무대 뒤를 들춰보기만 하면 된다. 어떤 것이든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여 관점을 다양화시키는 거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이라는 틀 안에 갇혀서 사고의 확장을 막지 말고, 감정의 스펙트럼으로 치환해서 생각해보자는 거다. 이제는 이것이 연애감정인지 아닌지 판별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연정이 시초가 되었든 아니었든 간에 지금은 누구에게 해명해야 할 상황도 아니다. 틀에 가둬놓으면 뻔해지니까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널어두되 스스로 납득을 하면 된다. 이곳 저곳 펼쳐둔 빨래를 걷는다. 걷어가다보면 아! 느낌이 온다. 감정만큼 흑백논리 안에 가둬둘 필요가 전혀 없는 게 또 있을까. 내 마음도 시시각각 변하며 고정돼있지 않은데, 누군가에게 닿는 마음이 어찌 일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라벨을 붙이는 순간 떼어내야 한다. 즉 라벨링이나 카테고리화는 의미가 없다. 고정된 채 영원한 건 없다. 내가 틀을 만들어 프레임화 시킨 게 아니라면. … 상처받을 너를 먼저 생각해야 한발짝 물러날 수 있다. 나의 안위보다는.
52 이름없음 2024/03/20 04:56:36 ID : 3Bfala8mHu4 0
“눈앞엔 안경 쓴 당신이 날카로운 눈으로 업무하고 있다. 그러다 내가 그를 보는 눈보다 훨씬 따듯한 눈이 돌아온다. … 바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보다 더 힘드셨잖아요’라는 말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하진 못했다. … 분명 아까까진 날카로운 표정이었는데 나를 보더니 일순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 이런 꿈도 있나.” 꿈에 대한 메모가 어디 있을텐데. 이젠 당신이 나오면 꿈인 줄 안다던. 거짓말이다. 이렇게 생생한 현재의 감각을 보내고, 지금 쓰는 휴대폰을 가진 채로 교복을 입혀놓으면 꿈인지 알 수 없다. 익숙하게 들어서는 향기까지 모든게 완벽한 세팅이다. 마침 자리에 없어서 맞은편에서 기다리는 나, 그런 나를 보는 당신이라니. 여느 때와 같은 세팅이다. 바뀐 건 나 하나다. 그래, 그걸 위로해주겠다는 듯이 나왔다. “소식 듣고 깜짝 놀랐잖아요.” 라니, 왜? 당신이 더— 나는 아마 당신에게만 보인 모양이다. 그러니 “투명 망토”를 쓴 채로 얘기를 엿들을 수 있었던 거다. 따뜻도 아니고 따듯한 눈에 흠뻑 빠져서 정신을 잃고 있는데 간신히 녹음을 누른다. 이럴 때가 아니지, 기억도 다 못 할 거면 나중에 듣기라도 해. 그러기엔 꽤 짧은 대화였다. 꿈이 산으로 가기 전에 여기서 일어나면 되겠다 싶어 깨쳤다. 와르르 무너져가는 성벽 사이로 당신만 보인다. 그리고 새끼손가락. 누구의 것인지 확실치 않은 새끼손가락이었다. 이상하지. 전반적으로 다 꿈의 편린을 엮어낸 이야기인데 반사적으로 깼다. 중간에 무너뜨리는 방법을 알고 있어서인지, 수면 리듬 상 깰만한 시간대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일어나자마자 날카로운 모습과 따듯한 눈빛의 대비는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끼손가락도. 얘기하니까 보고싶네. 우리 사이 거리가 이렇게 멀 줄이야. 몇 번이고 보러 간 게 다행이었다. 한번도 보러 가지 않은 계절에는 후회했다. 한 번은 보러 갈 걸. 지금은 그저 더 보러 갔어야 했나 한숨 정도다. +18:12-19:28 그간의 꿈을 거슬러 오른다. 기억을 하는 장면도 있고, 아닌 씬도 있다. 파편을 주울 때마다 느끼지만, 요상하다. 말이 안 되게끔 요상한데 꿈에서는 자연스럽다. 자유도도 꽤 높다. ‘이젠 당신이 나오면 꿈인 줄로 안다’는 내용은 어떤 시에서 영감을 받은 메모였다. 특히 몽중몽인 듯 꿈에서 꿈을 복기하는 꿈을 적은 일기는 신묘하다. 꿈일기를 쓰다보면 꿈인지 아닌지 알게 해주는 장치가 있다. 예전에 아주 잠깐 자각몽에 대해 공부할 때, RC로 하나의 토템(인셉션식 개념)을 정해두면 좋댔는데 그런 지경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예를 들면 “그 옷 한번도 밖에 입고 나간적이 없는데.”라고 묘사하는 어떤 자켓은 내가 꿈임을 인식할 수 있는 토템이 된다. “된장찌개?”도 마찬가지. 아니면 장소 자체가 이상할 수도 있다. “이탈리아였고 눈이 왔다.” 가본 적도 없는 이탈리아를 상상한다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007 요원의 미션 해결일 때도 있었고, 꿈의 막바지에 들어서 깨기 직전에 “녹색과 분홍색의 테니스공이었다. 연습구.”를 코트 밖으로 멀리 던지며 일어나기도 했다. 당신이 “희한하게 노란 알배추의 알부분을 덥썩 베어물고 있었다. 그 소리가 좋았다.” 사소한 부분을 전부 기억하려고 애쓰는 내가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수만가지로 갈라진 이미지의 그를 취하는 내 무의식은 얼마나 의식의 범위에서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 했는가. 늘 기억하려 했다. 계속해서 나만의 공간에서라도 숨을 쉬길 바랐다. 단 하나, 늘 타오르듯 뜨겁게 살라는 약속만 했던 우리 사이에서 내가 지킬 수 있는 불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당신의 눈에 나를 배이게, 내 눈에 당신을 데이게” 했다. (돌이키면 다른 약속들 많다. ‘평범하게 걷기’와 잊을 수 없는 꽃의 추억이라든지. 그때는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도 하나의 약속이었다.) 오늘 꿈의 녹음은 2년 전의 것과 이어진다. “회의 시작 전에 내 휴대폰에 당신이 뜰 때 난 왜 녹음을 안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자동녹음 방법을 찾고있었다 결국 실패했지만” >> “이야기 한 거 녹음하는 장면까지 있다 왼손으로 빨리 녹음따는 장면 그건 또 왠지 지금 휴대폰이었어” 긴 글로 늘여 뽑으면 이런 식이다. “아까 말했던 파일 출력을 좀 하라 그랬나. 사소한 부탁이었다. 프린터기 앞에서 다시 혼이 빠져선 허둥대고. 회의 시작 5분 전, 자리에 앉아서 멍 때리는데 왜 당신과의 전화에 자동 녹음이 설정 안 돼있지, 하곤 구글에 휴대폰 기종 자동녹음 검색해본다. 검색해도 방법이 안 떠. 속으로 욕하면서 찾아봐도 없길래 포기하지.” >> “짧은 이야기였는데 전부 기억하고 싶어서 황급히 왼쪽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 거린다. 자동녹음이 안 되면 수동으로 하면 되잖아. 얼른 버튼을 눌러 액정을 감춰버린다. 익숙한 파동의 그래프가 손 안쪽에서 붉게 흐르고 있다. 별 이야기 안 했다. 그저 내 얘기, 인데 다만 내가 걱정됐다는 종류로. 내 소식을 듣곤 당신이 깜짝 놀랐다면서 호흡을 평소보다 더 끌어온다. 다른 이에겐 나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닳도록 말하던 투명 망토의 현현顯現 아닌가!” 당신이 나오는 꿈에 대한 일기는 다 봤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닌 모양이지. 아쉽다. 모든 꿈을 다 주워서 언어화시킬 수는 없었을테니까. 어쩌면 이상향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긴 하다. 기억도 그래. 우리가 나눴던 말도.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서로의 눈 속에서 타오르고 있던 불꽃의 주파수가 일치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나만 그렇게 느낀대도 할말은 없다. 아직 그만큼 크려면 한참 남았지만 그래도 잘 할 수 있겠지. 오늘도 장작을 팬다. 불꽃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언젠가부터 당신을 떠올리면 나는 이런 식으로 정체화를 하고 있었다.
53 이름없음 2024/03/24 20:32:10 ID : XAqqlzTTVhB 0
새벽에 깨어 있다면 많은 글을 쓸 텐데. 이맘때쯤부터 졸리기 시작해서, 동이 틀 때 쯤 눈을 뜬다. 자동으로 떠진다. 덕분에 꿈이란 꿈은 다 꾸고 있다. 가장 불만인 건, 1:1의 독대가 아니라 다수가 있는 상황 속 뜬금없이 당신이 있다는 거 정도. 독대하는 꿈도 간간이 꿔왔는데 빈도가 밀렸다. 날이 아주 더웠고, 얼굴이 새빨갛다며 운동 중 휴식 시간에 요구르트를 받아 마셨다. 엘리베이터 속 거울로 보니 옷보다 더 빨간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루종일 혈색이 좋아서 탈이었다. 필사에 다시 맛을 들였더니 이 문장도 좋고, 저 문장은 미쳤다. 자의로 이렇게 오래 새나라의 어린이 모드에 들어가게 되다니. 어제 이 시간 쯤엔 당신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글을 썼다. 노래를 들었다. 별보다 먼 사람, 별보다 먼 그대. 일본어는 잘 모르지만 가삿말은 잘 아니까 따라불렀더니 엉킨 발음 끝무렵에 당신이 서 있었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이룰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어. 그럴 때에, 이룰 수 없는 사랑도 있다며 붉은 꽃잎을 가리킨 손가락만 아니었더라면. 당신의 입술 밖으로 터져나온 사랑이라는 한 단어가 순식간에 나의 감정을 사랑으로 감싸버렸다. 정의된 것인지 학습된 것인지 그 구분이 모호했다. “이룬다는 게 무어냐고 되물어도 내 목소리만 돌아오는 현실이 무척이나 버겁다. 당신은 별보다 더 멀리 있으므로 도무지 닿을 수 없었으니까. 여전히 수용이 안 돼서 돌고 돈다. 산 중턱을 힘겹게 오르고 내린다.” 그래서 보고싶었다. 이렇게 말하면 꿈에 나오던데, 하고 피식거리며 빌려온 소설책을 펼치지도 않고 잠에 빠졌더니 진짜 나온 거였다. 그렇다면 오늘도 나오는 건가? 오늘은 다른 사람에게 몇 시간을 붙들려 있었으므로 할당량을 다 채워서 안 나오려나. 필사해둔 문장이 정돈되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다. 기억이 한 발자국 씩 내 감정으로 스며든다는 뉘앙스는 생각이 난다. 섬광처럼 일순간에 심장에 내리꽂지 않았다. 눈 온 벌판에 한 발자국씩 신중하게 내딛듯, 그렇게 당신의 기억이 나를 돌고 돈다. 분명 나보다 작은 발자국으로 왔겠지. 너른 발자국으로 덧찍으면 사라지니 옆을 밟는다. 자야겠어, 아무래도.
54 이름없음 2024/04/10 22:41:41 ID : 9thdRA6lyIG 0
0325 왜 당신이 아프단 사실에 지나치게 신경쓰는지. 어쩐지 피곤해보이고 졸린 기색이 역력한 느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눈동자엔 총명함 대신 잿빛이 꽉 들어찼다. ‘초인이로군.’ (…) 손목 어딘가에서 길이 끊겨서 끝의 끝부분까지 팍팍 전달되지 않는 느낌. 왜 안 돌아오는 거지? 좌절과 공황 사이를 빠르게 쏘다닌다.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사거리 한복판에 주저앉게 된다. 글씨도 흐트러진다. 마음은 물에 젖은 휴지처럼 갈기갈기 찢어졌다. 0327 엘리베이터 문 닫히는데 눈앞으로 지나치는 옆모습 0328 지나친 이상화가 눈을 가린다. 태양도 오래 쳐다보면 일시적으로든 영구적으로든 시력을 잃게 된다는데. 그림자가 짧아진 채 고개를 바짝 들고 올려다보고 있다. 그러지 말고 좀 더 가까이 가되, 태양의 위치를 내릴 수는 없어? (…) 타버리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수록 거리가 멀어진다. 눈에 끼워둔 필터 때문에 본질에서 비껴나가있다. 성찰하라잖아. 그 험난한 과정을 해본다면, 이건 욕망도 열망도 아니고 버릇의 발현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을 타깃으로 삼아두고 내 쳇바퀴를 굴리는 습관. 정작 없어도 잘 사는데. 부담감은 내려두는 게 좋지 않아? 0401 만우절 너의 거짓말이 되고 싶다. (…)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할 일이 없어서 영원히 저편은 닫힌 세계일 거 아냐. 우린 태어났을 때부터 열려 있었어. 죽을 때까지 이쪽저쪽 오가면서 살아야겠지. 언제까지 닫힌 세계를 바라다보기만 하는 사람의 언질에 휘둘리며 살 수는 없잖아. 이러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이대로 땅에 처박힐까봐, 수면 아래로 무한히 하강할까봐, 두려워. 원래 불안은 형체가 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구체화할수록 비처럼 내리던 것이 폭풍우가 되어 휩쓸어버린다. 자고로 불안이란 눈을 감으면 나타나는 어둠같은 건데. 이대로—. 0403 오늘은 돌아가는 뒷모습이 찍혀 있다 0405 23:27-23:34 네 꿈을 꿨다. 쓰기 싫어 미뤄둔 글자가 머릿속에서 도저히 나가려고 하질 않아 뱉어낸다. 새삼스레 여보세요가 웬 말이야? 니가 먼저 전화했잖아. 방아쇠라는 걸 알면서도 당겼다. 아침 여섯시에 개같이 깼다. 0409 머리를 말린다 잘라도 밀어도 자꾸 자라난다 너는 그래 내 생각의 끝으로 가면 늘 네가 서 있다 이 느낌이 싫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 싫다 나한테 너는 뭘까, 라는 되도 않는 순환식 의문이 고개를 든다. 백만번을 상상해도 다 다른 답, 결국 끝으로 모아보면 하나 뿐인 답이 나온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아? 로 귀결된 대답은 스위치를 차단한다. 나는 겨우 너의 방에서 나간다. 의식의 반응이든 무의식의 반응이든 나타나는 반응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필터를 거친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라는 도식을 통해 산출된 결과물 같다. 프로필 사진이 바뀌면 그게 또 화가 난다. 왜? 를 파고들어본 적은 없다. “너—>부정적 감정으로 치환하라”는 명령문이 언제부턴가 머릿속에 제1원칙으로 자리잡아서 도망가지 않는다. 이 도식을 깨본 적도 없다. 오늘도 늘어진 테이프를 들고 앉았다. 리모콘을 들어 하는 짓이란 되감기의 되감기다. 이 시점이지, 대사도 다 외웠어. 나 하나만 돌리면 되거든. 그런 일방향적 소통 속에 우리가 뭘, 아니 내가 뭘 미결로 놔두고 도망쳤길래 아직까지 이렇게 힘들까. “이게, 사람으로 사람을 덮어야되는 게 있는데. 난 그걸 못 한 것 같아.” 과연 그럴까? 너는 누군가로 ‘덮여질 수’ 있을까?
55 이름없음 2024/04/13 00:01:50 ID : yGraq6mE5Qs 0
돌아오며 뜨문뜨문 네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손톱달이 뜬 밤에, 겨우겨우 불어오는 뜨뜻미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하는 일이라곤 너와 평화롭게 지내고 있을 평행세계를 상상하는 일이라니. 씻어내지 못한 땀마저 전부 선선한 공기에 휘발되어버려 개운함이 백에 가까워져 있었다. 달에서 딱 손톱만큼을 제외한다면 전부 나로 오롯이 채워진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에도 나는 너를 떠올린다. 조그맣고 날카롭지만 둥근 부분을 품고 있는 너의 영역이 얼마나 따스했던 건지를. 발목 내측에서 무릎으로 올라오는 통증 때문에 마지막 2.5km는 걷지도 못하고 내려와버렸다. 돌아오는 길이 전혀 힘들지 않았던 것은 운동으로 소진됐어야 할 체력이 절약됐던 탓이었다. 그래서 초승달에 홀린 듯 언덕을 올랐고, 더 이상 이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는 데에는 숨이 차지 않는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잘려진 손톱 같기도, 누군가의 눈웃음으로 보이기도 하는 달과 건물을 구도에 맞춰 몇 장 담았다. 360도 펼쳐진 풍광을 4:3 비율에 맞춰 잘라내기란 어떻게 해봐도 어려운 일이었다. 불만족스러웠지만, 서서 더 찍어봐야 새로운 느낌을 주는 컷은 안 나올 거란 느낌에 조심스레 내리막을 탔다.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보폭이었다. 딴짓만 안했더라면 오늘도 그 사람을 봤을까. 운동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면 항상 마주치는, 요가매트를 들고 길을 오르던 그. 나는 헤드폰을 낀 채 내려간다. 어제만 해도 오늘도 올라가시네, 라며 속으로 웃기까지 했다. 저 사람도 나를 인식하고 있을까. 소소한 의문은 덤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보통은 아무런 생각도 안 하는데, 노래나 흥얼거리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한번 켜진 잡념의 스위치는 고개 몇 번 좌우로 주억거린다고 꺼지진 않았다. 처음엔 그저 그런 상상이었다. 언제 껍데기를 부수어 나갈 지 생각하다가 수단으로 흐름이 빠졌고, 자연스레 네가 연상됐다. 미쳤나? 웃었다. 당신이 했던 말은 여전히 유효했다. ‘설레는 표정을 감출 수 없는 것 같은데요?’ 4년이나 된 대화를 곧바로 꺼내올 수 있는 이유는 땡그란 안경 안쪽의 둥그런 눈으로 나를 꿰뚫어본 당신의 통찰력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은 날카롭지 않음을 충분히 위장한 부드러움으로 내 앞뒷면을 간파했다. 그래서 아직도 당신의 눈에, 언어에 휘둘리는 거겠지. 영역. 너의 영역. 삭월일 때가 종종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날에 밝게 떠 있는 너는 완연한 나로 기능할 수 없게 한다. 망월도 주기적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의식이든 무의식의 저편에서 너를 끄집어내오든 간에 하루 종일 떠 있는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글을 쓸 때도 있다. 그런 날엔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디로 뛰고 도망쳐봐도 달은 항상 떠 있다. 심지어 지구에선 달의 한쪽 면밖에 볼 수 없다는 점까지도 우리와 많이 닮아 있다. 내가 모르는— 아니, 영원히 알 수 없게 된 달의 뒷면에 가닿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도 다 옛날 말이지, 자조하며 훌훌 털어버리고픈데 지금 이 순간 한 글자 씩 써내려가는 현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서 못 하겠다. 로켓-트 타고 날아가서 너의 수면 아래를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될 줄로만 알았다고. 언젠가는 말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아닌 척 해봐야 소용없다. 시간이 됐다. 얼음을 담아둔 주머니 안쪽이 완벽히 유연해졌다. 체온과 열평형되고 있는 중인 거겠지. 열평형의 개념을 좋아했다. 온도가 서로 다른 두 물체는 반드시 중간 지점에서 만난다는 사실이 낭만적이었다. 따뜻한 사람과 차가운 사람의 손이 포개지면 냉기를 덮어버릴 수 있다는 것도 너를 통해 알게 됐었다. 손이 차갑다면 그건 마음이 따뜻해서 그렇다는 장난스러운 말에도 귀가 가려워 웃었었는데. 앳된 목소리가 더 앳된 나와 공간을 울린다. 기억을 기억하는 나는 허울 좋게 앞자리만 갈아치워버린 애였다. 탄산이 모두 빠져버린 콜라를 원샷했을 때 이별을 직감했어야 했는데. 목으로 넘어오는 액체는 달큰하기만 하지 전혀 짜릿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껴둘 거였으면,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시원해지자마자 바로 따서 아프도록 따갑게 넘겼어야 했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늘 그런 입장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판단하는 그 시점이 항상 두 발 늦은 때였다. 그래서 너의 어깨 너머를 알고 싶었다. 통찰이든, 미래시의 예지든, 뭐든 좋으니 지각하고 싶었다. 이별을 고할 때조차도 네가 감내하던 말을 내 쪽에서 참다 못해 터트렸던 거였다. 차라리 정말로 내가 먼저 질렸으면 어땠을까. 바보같은 상상도 해본다. 아이싱의 시간이 끝났다. 손목으로 전해지는 거센 진동과 함께 00:00의 표지가 눈에 띄었다. 더는 상상을 확장시킬 필요가 없다는 알람이겠지. 너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을까.
56 이름없음 2024/05/14 08:54:30 ID : A40lcq47Ap8 0
131, 당신의 상상 속에선 J가 죽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꿰뚫어본 사람은 없었다. 이제는 길가에서도 지워진 그 횡단보도를 건너 함께 식사를 했더라면 세계선이 조금이라도 균열을 내지 않았을까?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토요일 정오 무렵의 햇살이 너무도 더운 나머지 집에 가고 싶었나. 나는 왜 그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았지. 만약 건넜더라면 밥이라도 정말 아무렇지 않은 밥이라고 할지라도 따뜻한 술을 입안에 넣으면서 행복하다고 느꼈을텐데. 그러지 못한 세계선에서 소설을 읽으며 당신을 떠올리다 우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너무 지긋해서, 더 이상은 이러기 싫다고. 무뎌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심장을 울리는 고동으로만 메아리쳐본다. 여전히 과거의 한 공간에 갇혀 있고 가능하다면 그때 그 선명한 시간으로 나를 데려가고 싶다. 장면에서 내가 만질 수 있는 설정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편집을 맡은 사람처럼 키보드와 마우스, 줄줄이 달려 있는 기계장치 너머 모니터 속에서만 되감고 또 되감는다. 씬에 직접 개입해서 버스정류장 근처를 공사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길을 건너서 가도록 유도되었을테니. 하지만 나는 어떤 경우의 수를 집어넣어도 허무한 초여름에 그저 집에 돌아가는 평범한 일상에 당도했다. 어쩌면 당신이 주었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특별함을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당신을 탓한 적 없다. 잡아채지 못한 내 탓이라고, 그러니 이렇게 멀미가 나도록 떠올리는 것이라고. 멀고 먼 땅의 작은 방 안에서 넘실거리는 바닷물을 퍼올리며 적는다. 여전히 바닷속이다. 종종 숨을 참게 된다. 아주 먼 아래까지 내려다볼 수 있을까봐.
57 이름없음 2024/05/20 04:55:09 ID : mIIE7hxTRu6 1
물가에만 다녀오면 파랑 생각이 난다. 튜브에 온몸을 기대고 어느 먼바다까지 가려나 걱정이 돼 시선 끝에 고정시켜두었던 그 여름. 송어가 종종 기생충을 쫓기 위해 펄떡펄떡 수면을 박차던 장면을 함께 보던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는 말을 했더니, 그들은 참사랑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랑이란 말 이렇게 쉽게 써도 되는 걸까? 싶어 큰 목소리로 웃었는데 일기를 쓰다보니 뒤미처 깨닫는다. 이런 감정도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거지. 4월의 마지막엔 거짓말처럼 당신을 만나러 갔다. 늦기 싫어 미리부터 가서 동네를 둘러보고 일하는 곳 근처의 카페에 자리를 잡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흐름이 끊겨도 아쉽지 않도록 단편소설집과 필사 노트를 펼쳐놓고 자주 듣는 트랙을 들으며 집중하고 있었다. 좋은 문장이 많았다. 느티나무와 버스정류장, 사찰, 그리고 여름을 그려낸 잔잔한 분위기의 장면은 아직까지도 상상한 심상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초조한 듯 설레서 발을 떨었고, 가방 뒤에 숨겨둔 선물은 재포장하며 잘 챙겨왔는지 몇 번이나 다시 살폈다. 그때는 하나 놓고 왔다고 아쉬워했는데 실제론 깔끔하게 다 챙겼었다. 두 편 반 정도를 읽었을 무렵 왼편의 출입구로 파랑이 걸어들어오며 두리번거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반가운 인사를 나눴지만 살짝 어색한 기류는 감춰지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작년 여름에 봤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충 마실만한 것을 사시길래 쭐래쭐래 따라갔더니 식사대용 빵 종류를 하나 사주셨다. 이미 배불렀지만 맛있게 먹었다. 이야기는 별 거 없었다. 바쁜 일을 정신없이 해치우고 온 파랑과, 느긋하게 오긴 했지만 침착하지는 않은 나의 주파수가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잡음이 껴 있었다. 그래도 근황을 나누고 얼굴을 보니 매우 좋았다. 나갈 때가 되니 분위기도 풀려 제법 말랑말랑해진 상태였다. 새로 리필해온 물까지 바닥이 날 때쯤 산책을 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셔서 승낙했다. 상쾌한 건지 조금 축축한 건지 제대로 분간하기 힘든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의 날씨였다. 낮엔 까딱하면 더웠고 비가 오면 언제 여름이었냐는 듯 일교차가 심해 변덕이 죽 끓듯 하던 날들이었다. 다행히 아침부터 흐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약간 찝찝한 정도의 습기가 있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사실 날씨는 크게 상관없었다. 밤이었고, 함께 걷는 사람의 반가움이 나의 마음까지 넘실거려 왔으므로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초록불로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내딛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코너를 돌자마자 보이는 언덕에 바로 경쾌함이 무너지기는 했지만, 보이는 것보다는 오르기 쉬운 축에 속했다. 동네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던 것은 생생하다. 다만 나의 엄살이 그 정적을 깨트리자 그가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다며 웃었던 게 떠오른다. 좋은데요, 괜찮은데요! 나는 가쁜 숨을 밭으며 맥없이 좋다는 말만 반복했다. 실제로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어렵다기보단 빡센 느낌이었다. 짧고 굵게 경사도가 높은 느낌으로 산 넘어 산처럼 구성된 길이라 다 왔나, 싶으면 장난처럼 한 번 더 거슬러 올라야 해서 웃었다. 웃겼다. 차 없이 오르는 건 파랑도 오랜만이라고 했다. 그는 길도 모르는 나의 뒤를 받치며 함께 올라왔다. 주춤거리며 동 앞에서 기다리려는데 들어오라고 하셔서 얼떨결에 집까지 구경했다. 티비 대신 한쪽 벽면 전체를 점유한 서가에 먼저 눈이 갔다. 이사를 다니며 줄이고 줄인 책들은 마치 정수精髓처럼 느껴졌다. 놀랍게도 한국 작가의 취향이 나와 많이 겹치길래 몇 권은 탐나기도 한다고 장난스레 웃어보였더니, 파랑은 파트너가 주로 읽는다며 소개해주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이 가득했고, 구석에는 헤어질 결심 각본도 있었다. 어정쩡히 서 있는 동안 바삐 움직이는 파랑은 도대체 무얼 하는지 궁금했다. 이것저것 챙겨오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취향이 이렇게 겹칠 수도 있구나 감탄하며 거실에서 손떼가 묻은 책들을 눈에 담기 바빴다. 어수선하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정렬은 확실히 되어 있는 공간이었고, 그게 누구의 손길인지는 함부로 단정할 수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귤까지 꺼내오시는 걸 막지 못했다. 괜찮다고 아무리 손사레를 쳐봐도 씨알도 안 먹혔다. 뭘 이런 걸 다 들고 와요, 라는 말만 해주셨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드린 것 이상으로 되돌려받아서 손이 무거웠다. 지하주차장을 잠깐 헤매다가—차를 매일 끌고 나가면 잘 알텐데…—가벼워진 몸으로 뒷산을 올랐다. 저번 여름에 내가 그랬듯, 파랑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지명에 숨겨진 설화를 알려주었다. 뿌듯함이 숨결 끝에 묻어나왔다. 그 설명을 듣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을테지. 나무데크를 턱턱 밟아나가며 한없이 높은 건물에서 빛나는 조명이 별처럼 보이는 장면도 눈에 담았다. 이토록 조용한 산책길이 집 뒷편에 있다는 게 내심 부러웠다. 파랑은 요새 뛴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 매일 나가지는 않겠지만, 통통 뛰며 앞뒤로 날개를 펼치듯 팔을 휘젓는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밀려나왔다. 얼마나 뛰는지, 어떤 운동화를 신는지 물어볼 걸. 어디선가 흘러오는 꽃향기를 라일락향이라고 알아채는 모습이 좋았다. 하이라이트처럼 제일 매료된 순간의 리플레이를 뽑아낸다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근 한 달 간 헬스하고 돌아오면 늘 깊은 경사가 있는 내리막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유는 오로지 화단에 핀 라일락의 나뭇가지를 손으로 살짝 내려 폐의 가장 깊숙한 부분까지 향을 쌓아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핀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나누다 라일락인 걸 바로 깨닫는 게 신기했다. 활짝 핀 꽃과 함께 5월이 성큼 다가섰다. 등꽃도, 그 사람도 아니었지만 반 정도는 맞춘 셈이다. 라일락의 파랑이라 어쩌면 더 좋았다. 지위나 역할에 귀속되는 대화가 없었으므로. 짧은 만남은 함께 오른 언덕과 엇비슷했다. 반가움이 끝날 때쯤 되니 산책과 라일락으로 한 번 더 설렘으로 환기되며 변주됐다. 투정 아닌 투정을 서로 부리고, 작년의 일을 떠올리고, 다음 여름을 기약하는 일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별다른 임팩트가 없던 일상에 강력한 방점으로 찍혀 있다. 그때의 감각을 머릿속의 영상으로만 남겼다면 전부 휘발될까봐 황급히 옮겨적었더니 아직까지 생생하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귀결되는 취향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들에 자석처럼 끌려다니는 지 휘갈기며 적어둔 문장들은 너무나도 적확하다. 떠오르는 얼굴들의 생김새가 일정한 게 아니었다. 추출해 뽑아둔 특징을 이리 대보고 저리 대보면 개연성이 생겨났다. 이래서 좋아하게 되었구나. 색다른 순간에 꽂히면 그 이후로는 프리즘을 갖다 대고 분광했다. 내가 그들과 기억하는 비중이 다른 이유도, 여행이 끝나자 파랑을 기억하는 데에만 용량을 써서 그랬던 거였다. ‘진짜’ 여름을 손꼽는다. 땀이 삐질삐질 흐르다 못해 손수건 없이 나갔다가 후회하는 그런 여름, 몸의 어느 부분들은 조금 더 날렵해진 채로 파랑을 다시 만나러 가고 싶다. 그래도 닭가슴살 한 끼에 두 덩이는 진짜 못 먹겠는데, 만나기 이 주 쯤 전에는 완전 무탄수를 해야할 지도 모른다. 단백질 덩어리 우걱우걱 씹으면서 올리브유 삼키고. 바라고 바라는 진짜 여름은 쉽게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두 세뼘 정도는 성장해야 한다, 이번엔 정말로. 어떻게 하면 더 잘 듣고, 더 잘 쓰고, 더 잘 이끌 수 있는지 아직까지도 감이 안 온다. 감을 잡진 못해도 무언가 이뤄낸 타이밍 이후에 볼 수 있겠지. 그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길고 긴 하천변을 따라 함께 뛰게 될까. 그러잖아도 심장은 열렬히 일하겠지만. 보고싶다, 누가 보고싶은지 한참을 생각해도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어 이게 외로움이구나, 실체를 보고 있다. 수면패턴도 망가져서 꿈이 현실보다 더 현실같을 때가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대해 예측하는 장면이 나온다거나, 강렬한 감각이나 감정을 느껴 땀에 절은 채로 깨치는 일이 잦아졌다. 분명 다른 글을 쓰고 싶었는데 밝은 장면을 쓰다 보니 어떤 어두움을 묘사하려 했는지 잊었다. 그러니까 하여튼, 보고 싶다. 그리고 당신 말이 다 맞다. 뒤돌아 앉아 달의 뒷면에 골몰할 필요는 없다. 지구에선 무슨 짓을 해도 보이지 않고 닿지도 않으니까.
58 이름없음 2024/06/22 03:10:32 ID : e2E7dQskmtA 0
여름의 한 가운데에 서서 봄을 그리워하는 당신이 아니었다면 너를 떠올릴 일은 없었겠지. 달은 구름 뒤에 가려진 채 휘영청 밝았다. 잔디밭이 무릎 아래를 간질거려 툭툭 뽑았다. 이렇게 한 시절이 접히는구나. 조의 소설에선 늘 그런 구절이 나왔었지만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는데 알 것도 같았다. 봄도 하나의 학기도 아니라 시절을 접었다. 각을 맞춰 손톱으로 꾸욱 눌렀다. 자의였다. 접힌 선의 평행을 확인하며 웃었다. 분기점이란 이런 걸까. 조금 습했다. 비가 올 것도 같은 달무리에 상현의 달이 가리워진 채였다. 에너지를 잔뜩 흡수하고도 뭐가 아쉬워서 기약 없는 다음을 그리워했는지 모르겠다. 오늘이 즐거웠으면 그걸로 된 거라며 매듭 지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늘 미련이 남았다. 뒷통수가 헛헛한 감정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했다. 하나의 분기에서 서로 등을 보인 채 시원하게 헤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4년 전에도 이런 이별이 있었다. 인연이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기어코 다시 만났다. 그 사람의 마지막 차림새는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눈동자 안쪽에서 쉽게 꺼낼 수 있었다. 봄도 여름도 지독하게 짧다. 마음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해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했다. ”늘 혼자 뚜렷하게 서 있지 못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나를 구해줄 등 뒤의 벽을 찾아 머릿속의 방 한 켠을 멋대로 들락날락 거린다. 그의 경험이 종종 나의 사람들을 생각하게 했다. 꿈에 나와 나를 울게 하고 괴롭게 해도 다시 나와 달라 말하는데, 그런 것들도 기억하지 못한 채 쉽게 흘렸다. 종종 당신 생각을 한다. 여름이면, 잎사귀가 초록빛을 내뿜다 못해 쏟아버리는 한낮이면 창문 너머를 본다. 그 해 겨울은 눈이 아주 많이 나렸지, 엉망진창으로 눈사람을 만들었지, 그게 당신이 내려준 건지도 모르고 아파하느라 제대로 울지도 못한 채 꺽꺽댔던 나를 돌아본다. 사랑한다고 치기 어린 말이라도 해볼 걸 이게 사랑이냐고 그런 거라면 나는 왜. 등 뒤의 벽. 언제나 나와 같은 방향으로 앉아 있던 사람을 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그가 말하자마자 바로 떠올랐을 정도니. 그는, 자신을 이끌어준 은사님들이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맥주잔의 수면이 바르르 떨렸다. 애꿎은 병을 꽉 쥐었다. 보고 싶었다. 0429 가지말라고 했던가. 바다내음이 짙었다. 내가 가지말라고 해봐야 떠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젖은 모래만 남겨진 해변에서 나는 스러져갔다. … 마음을 많이 쓴 꿈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보고싶다. 너무 잔인하잖아 새벽 4시에 깨선 어벙벙했다. 연달아 꾼 꿈에는 책을 읽으며 당신을 그리워하는 꿈을 꿔야 했다. 돌겠다. 220516 지금 다시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내가 헤맬 때 정답이라며 머리를 쓰다듬고 다른 문제가 적힌 쪽지를 두고 사라진 당신을 찾고 있다. 찾고 있어. 이제 여름이잖아요, 더워 죽겠다고요, 저 여기서 녹아 내릴지도 몰라요. 다 풀면 온다면서. 그렇게 꿈 속에서 사라진 당신의 뒷모습만 애타게 찾는 내가. 나는 이제 뭘. 뭘 더 하면 좋죠? 시간은 항상 일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전혀 아니었다. 내가 무게를 잡으면 잡을 수록 길어지기도 했고 텅 빈 날이면 한없이 빨랐다. 그러니 매일을 충실히 살면 하루가 긴데, 뒤를 돌아보면 짧게 느껴지는 거다. 그냥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너무 멀리 왔다. 내 꿈에서 사라져줬으면 좋겠다가도, 매일 나와달라 소리치고 싶다. 언젠가는 만날까. 인연이라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할말이 많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눈동자 너머에 잠기고 싶다. 아주 조용히 침잠하고픈 마음이다.
59 이름없음 2024/07/26 11:02:21 ID : A2GrdWi2lg3 0
꿈에 당신이 나와 방방 뛰는 아이처럼 좋아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부터 비가 쏟아지듯이 내리다 말기를 반복하더니 호우주의보가 내렸다. 이것도 장마라고 해얄지 알 수 없는 날씨가 몇 년째 지속되고 있었다. 예전의 장마라 함은 하루종일 눅눅하고 치밀하지 않은 빗방울이 오래 내리는 날의 연속이었는데. 요사이의 장마는 치밀한 비가 쏟아져 잠시간 긴장되다 맥없이 풀리는 집중호우식이다. 장마라곤 하나 길지 않은 비 조각을 이어붙여 만든 듯하다. 세상이 어느 방식으로든 한 번은 접혔다. 과거로부터 비가역적인 선이 발생해버린 탓에 돌이킬 수 없다. 꿈을 많이 꾸었고 생각이 나는 꿈은 웬만하면 다 적어두었다. 개꿈도 많지만 체에 걸러내면 유의미한 반짝임은 남는다. 너의 강아지가 내게 찾아와 안긴다거나 집앞에서 당신을 보았다는 친구의 전언은 현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렬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로 오타가 나든 말든 받아적고 잠시 딴짓을 하고 나면 강렬한 느낌은 온 데 간 데 없고, CD가 튀듯 특이한 감각만 잔상이 된다. 주로 시각인데, 촉각인 경우도 있다. 당신이 입은 옷의 부드러움을 만지지도 않고 아는 건 공감각이라 해야 할까. 일상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게 신기했다. 복도 끝 아무렇게나 방치된 냉장고 너머 빈공간이라니 어릴 적 읽었던 동화처럼 나타나기는 또 처음이었다. 것도 내가 먼저 발견하질 않고 이제는 연락도 않는 친구가 나타나 야, 봤어? 라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꿈속의 내가 얼마나 기대했겠는가. 심장이 얼마나 뛰었겠는가. 고개를 돌려 멀리 바라다보면 그토록 찾던 사람이 서 있는데. 숨을 흡 들이쉬었다. 당신은 천천히 걸어온다. 그 부분만 느리게 감긴다. 다 늘어진 비디오테잎이라 지직거리는 노이즈도 있다. 실제의 내가 너무 많이 봐서 꿈속에서도 느려진 걸까. 이상하게 들은 지 오래된 노래를 직접 언급해서 하루종일 그 노래만 듣게 생겼다. 4 walls까지 나오는 플레이리스트를 듣고는 안목이 좋다고 칭찬했다. 실상 기억해야할 건 직전 노래인데 제목이 세 글자였다는 부분 빼곤 휘발됐다. 교착상태에 빠진 여름이다. 언젠가 네 생일에 다른 사람이 나오는 꿈을 꿔서라도 잊길 바랐는데 성공하다니 기분이 묘하다.
60 이름없음 2024/08/30 01:24:43 ID : PfXxU41Ckq3 0
이런 사랑도 사랑이었냐고 물어본 적이 없는데 당신이 내처 와서는 그렇다고 했고 너는 바람이라 했다. 정신적 바람에 대한 흔한 블라인드 썰이 있는데 딱 그 꼴이었다. 아내의 입장에서 쓰인 글에, 남편이 출근이 즐거워 싱글벙글 한다는 대목에서 웃었다. 월요일을 손꼽아 기다리던 이유가 비슷했으므로 찔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 3의 인물이 쓴 글을 보고나서야 정신적 바람이라는 입장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자신 외에 다른 이성에게 일반적 범주를 넘어서는 관심을 두면 그것이 바로 외도였다. 나는 이해를 못했다. 지금도 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동경이라고 열심히 포장해봐도 삐져나오는 마음이 있었으니 그가 꽃말을 소상히 알려주며 멀어지라 했던 게 아닐까. 사실 그 꽃말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아주 현명한 방법으로 나를 일깨운 것일 뿐이다. 어쩌면 나도 몰랐던 내 마음에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키고, 가만히 지켜보게 해 스스로 깨닫도록 한 건지도 모른다. 먼저 이 땅을 달아나버렸으니 영원히 물어볼 순 없겠지만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이랬을 거라고 헤아려본다. 너는 바람이라 했다. 그래선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거기서 혼란을 느꼈다. 부정행위라는 논리에 포섭이 되지 않자 네게 항변했을테고 너는 내가 무지 얄미웠겠지. 찾아와서 싸우고 싶었겠지. 우리 둘 중 누구도 제대로 싸움을 걸 줄 몰라 일어난 일이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뻔뻔하게 회상하고 있나. 하여튼 자기합리화에 도가 텄으니 너는 싸움을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균열이 가 있었고 영향을 줬을 거다. 이런 글 쓰려고 한 게 아닌데 발 한번 잘못 옮겼다고 또 여기까지 도랑을 파버렸다. 하여튼 전부 생략하고 이제는 사랑이라 말한다. 여전히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잊지 않고 꼬박꼬박 찾아가 인사하는 게 전부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 뿐이니 그리 한다. 갈 때마다 다른 사람을 마주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흐트러진 운동복 차림으로 인사라니 꼴 사납다고 면전에서 쏘아붙일 수도 있다. 어떤 인연으로 왔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이런 그리움이 있다고 소개할 자신은 없었다. 입밖으로 내밀 수 있는 얄팍한 관계성에는 방문을 정당화시켜줄 힘 따위 존재하지 않아보였다. 깊어진 그리움을 희석시키러 갈 뿐인데 이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왜 사랑이라 생각했는지 알고 싶었다. 서로 잘 지냈다 안부를 나누며 가벼운 대화를 하다가 괜히 폼 잡으면서 있잖아요, 라고 서두를 꺼내고 싶다. 있잖아요, 그땐 왜 그러셨던 거예요? 이게 궁금할 때마다 연락 드리고 싶었는데 꾹 참고 하루종일 당신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려고 해도 잘 안 됐다고. 그럼 그냥 장난처럼 한 거라고 답해도 마냥 좋겠지. 해묵은 사랑이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젠 완전히 끊어져버린 첫사랑 대신 영원히 마음 속에 묻어버린 미결 사건이 돼버렸다. 영화 속 서래는 증발해버려 그 누구도 자취를 알 수 없다. 당신도 내겐 단지 그런 것이라면 어떨까. 눈을 감으면 손쉽게 등 뒤의 벽이 전해주던 감촉을 떠올릴 수 있는데 현현하는 육체가 다 무슨 소용인지. 오늘도 내가 기억하는 한 당신은 살아있다며 평행우주론을 밀어제낀다. 이 순간 흘러가는 비디오테이프 속 무한히 반복되는 씬 위에서라면 호흡하잖냐. 내 걸음걸이를 고쳐주고, 가벼운 농담에 웃어주는데. 당신이 관통하고 남은 자리에 나무가 다시 등장했다. 그에게 나는 들판의 이름모를 새싹이었다. 훌쩍 커서 와 무진장 깝치니 재밌었겠지. 흥미 본위를 건드렸을까. 진짜 어릴 때 본 게 다였으니 못해도 세 뼘은 넘게 자랐겠지. 바짝 긴장해서 뻣뻣해진 몸동작까지 기억한다. 제가 당신 기억 속의 그 꼬맹이라고 스스로 소개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쉽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그땐 몰랐지 이렇게 될 지. 아니 자기소개한 거의 직후에 알 수는 있었던가. 불현듯 선명히 떠오르는 건 야근답지 않은 야근하고 돌아갈 때 꺼내던 신발이다. 처음 돌이켜본 기억이 왜 이리도 찐하게 남아있는 건지. 한국의 3인칭 대명사는 왜 이렇게 부족할까. 별칭을 붙이면 또 헷갈려지는데 그렇다고 진짜 호칭을 쓸 수도 없고. 하여간 보고 싶다 정말로. 언젠가 정말 힘들었던 여름에 나타나줘서 고마웠다 말했던가. 코 안쪽까지 톡 쏘던 새콤한 향을 기억한다. 뿌리자마자 날아가버리는 시트러스 향수도 당신이 나눠준 과육의 향을 재현하진 못했다. 얼굴살 구겨가며 억지로 먹었었는데 분명. 분명 그랬는데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굴게 된다. 또 생각날 걸 어떻게 알았냐고 지금도 혓바닥 안쪽에서 이렇게 톡톡대는데. 매력이 너무 있어도 문제라니까, 도통 구할 수가 없다. 둘 다 보고 싶다. 희석시킬 때가 됐는데 그러질 못하니.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사이를 연인이라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언제든 사랑한다 말해도 되는 사람을 너무 쉽게 잃어버렸다. 기어코 결론이 첫사랑에 대한 후회로 귀결되는 것도 지겨워 죽겠다. 그만해야 되는데. 새사람이 와서 덮어주기만을 바라는 게 마냥 하찮다.
61 이름없음 2024/08/30 13:23:14 ID : Zhhy1u7dQts 0
무엇이든 간에 이 파장을 깨트리고 싶다. 지금은 잔잔하니까 과거의 일이나 곱씹는 거지. 단물 다 빠진 껌은 얼른 뱉어내고 새로운 껌을 씹든 사탕을 먹든 해야 하는 것인데.
62 이름없음 2024/08/31 17:56:05 ID : VfcNy3RzVgr 0
조가 말했듯 오래된 사랑은 형벌이다.
63 이름없음 2024/09/02 02:55:45 ID : 9thdRA6lyIG 0
당신은 믿지 않겠지. 언젠가 당신이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그리워 했을까? 라는 물음을 스스로 생각해내다 자책에 빠졌다. 도대체 내가 무어라고. 의문조차 가져서는 안 될 듯했다. 이미 완성해버린 문장은 절대 기억 속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IF란 그저 뇌내에서나 기능할 뿐으로 절반짜리겠지만 그래도 해본다. 찾아갈 수 있었더라면 평범한 인연처럼 추억 속에 묻어버렸을까. 연락해도 될지 아닐지 수회 고민한 후 마음을 거뒀을까. 그리 자주 찾아가지 않았음에도 눈만 감으면 생생하다. 일정 시간마다 정해진 용량이 분사되는 방향제의 향, 걸음 소리를 줄이기 위해 깔려 있는 푹신한 발매트, 따뜻한 색으로 덮여 있지만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대리석의 온도. 가면 갈 수록 닳는 것은 나인지, 더는 당신의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갑갑함을 느낀다. 이 죄책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두 명의 선생님은 말했다. 내가 모든 걸 바꿀 수 없었을 거라고. 당연하지만 가슴 깊은 곳까지 와닿지는 않았나보다. 아직도 용납이 안 된다. 그냥 용납 같은 건 못 하는지도 모르지. 화가 난 채로 씩씩거리며 돌려내라 할 대상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발사된 화살이 다시 내게로 향하는 이미지만 떠오른다. 돌아와 박히면 뽑아내면 그만이라지만,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더라. 그냥 그랬다. 누가 일부러 낸 생채기도 아닌데 지나치게 오래 아팠다. 남들은 금방금방 털어내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이러나. 그럴땐 말 그대로 병신 같았다. 내가 멀쩡하지 못해서 그저 유약해서 이런 건가 고민도 많았다. 시간을 기다리라며, 나이를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며, 매력적인 오답을 정답인 것마냥 말하는 어른들도 죄가 많다. 당신을 떠올리면 쉽게 그때로 돌아가버리는데 시간이 다 무슨 소용인가. 아직 나이를 덜 먹었나. 더 잡숴야 하나 정말. 그깟 기억이 뭐라고 누구나 그런 기억은 있는데 왜 나만. 항상 자책하는 방향으로 풀어내서인지 끝이 안 보이는 터널 속을 헤맨다. 트라우마의 어원은 '뚫다' '뚫리다'라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 τραῦμα라고 한단다. 누가 작정해서 뚫은 것도 아닌 구멍이라 쉬이 메워지지 않나보다. 그런데 꼭 메워버려야 할까. 소리 소문 없이 원래의 형태대로만 보이게 한다면 괜찮을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꼭 맞는 모양으로 된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뚫린 채로 놔두어도 나만 버틸 수 있다면. 사실 버티는 게 아니라 가만히 놔둔다. 아직도 준비가 안 됐다. 수용할 준비가. 어디로 돌아가버린 걸까.
64 이름없음 2024/09/18 23:43:33 ID : A2HDumtuk8o 0
가을이라고 찾아오다니. “여전히 난 그 기억의 여름 속에 있어, 너도 알잖아.” 폭염인 추석이라도 여름이라면 여름일테니 지금 읽어도 유효할까? 당신은 능글맞은 미소를 띤 채로 내게 잘 지내냐고 물었다. 분명히 본 적 없는 옷인데 너무 선명한 이미지로 나와서 의문이었다. 그보다, 안색이나 체형에 딱 맞는 옷을 입고 있어서 속으로 놀람을 삼키기도 했다. 짧은 순간의 호들갑을 입안으로 감추고 왜 맨날 잘 지내냐고 하냐며 괜히 투정을 부렸다. 꼬우면 먼저 가서 잘 지냈는지 물어볼 것이지 왜 그런 어리광을. 당신을 만나자마자 꿈인 걸 알아차렸다면 좋았을 걸. 꿈 속의 꿈에선 나무위키에서 자각몽 항목을 인상깊게 읽은 탓에 어설픈 리얼리티 체크를 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말랑거렸지만 쉽사리 손등에 닿진 않았다. 바보같이, 손등에 닿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꿈이라고 착각해버렸다. 그러니까 그 꿈 속에선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고 믿었다. 눈꺼풀만 꽉 감았다 열면 새로운 페이즈로 뚝딱 넘어갔으니까. 이젠 떠난지 오래된 초등학교의 복도를 떠돈다거나, 40층이 넘는 호텔 건물에서 쫓긴다거나, 하여튼 제법 꿈다운 장면들이 연달아 정신없이 휘몰아쳤다. 살다살다 권총으로 위협 당하는 기분을 느낄 줄이야. 그 호텔의 옥상에서 변변한 안전장치 하나 없이 번지점프를 뛰기도 했다. 오래오래 하강하다가 모래 밑으로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누가 우릴 그렇게 쫓았는지. 그리고 왜 하필 당신인지. 추석이라고 잘 지냈는지 궁금했다손 치더라도 멀쩡한 꿈의 구석에서 인사하면 좀 좋냐고. 여름이 도무지 물러나지 않는다. 깊은 밤은 얇디 얇은 커텐을 바꾸고나서야 겨우 찾아왔다. 그리하여 꿈꾸지 않게 된다면 당신도 볼 수 없는 건가.
65 이름없음 2024/09/19 03:49:21 ID : a9xPiknu2mp 0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다르게 흘러가고 있어, 당연하게.
66 이름없음 2024/09/19 15:24:11 ID : TRwso6kk5Wl 0
경계, 해가 될까 생각할 시간이 많아도 *글을 쓰기 위해선 결심이 필요하다. 듣지도 않은 노래의 제목만 가지고 유추한 내용은 보기 좋게 틀려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상대에게 해(害)가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 짐작했다. 실상은 해(日)가 될까였다. 햇빛일지 비로 나릴지 결정하는 권한은 화자가 아니라 상대에게 있어보이는데. 나는 해(害)가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읽었으므로 정반대의 해석을 꾸겨넣은 채 듣는다. 바깥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무거운 구름이 가득했다. 저 먼 대륙의 태풍이 영향을 미치는지 바람소리도 예사롭지 않다. 매일 작성하라 요청받은 기분이 드디어 가라앉았는데 정작 작성할 곳은 남지 않아 길을 잃었다. 고르고 고른 문장 속 진의를 탐색하기란 라면 끓여먹는 일처럼 쉽다. 문제는 소화에 있다. 거짓 한 톨도 없는 문장을 안부라는 포장지로 감싸 띄워보낼 때마다 홀가분해졌지만, 동시에 연락이 부담이 될 거란 믿음은 부채처럼 나를 쫓아왔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이리 와보라 손짓하면 꼼짝없이 앉아 셀 수 없는 지폐를 몽땅 다 헤아린다. 끝이 있는 기다림 속, 답장이 오면 방학숙제를 미루는 아이가 된다. 뿔어터진 컵라면마냥 면발이 국물을 쫙 흡수하는 시간을 기다린다. 거리를 두는 것이다. 설렘으로 치환시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긴장과 불안으로부터 다 도망치고 나면 천천히 글을 음미할 수 있다. 경계. 해악. 두 단어가 겨우 남았다. 해악. 급할 때마다 찾아가는 상황은 확실히 반쪽짜리 알약을 삼키는 것 같았다. 용량도 복용 기간도 깡그리 무시한 채 털어넣는—. 그래서 해악이라 했나. 때론 약도 독이 되고, 독도 약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건가. 소화를 위한 되새김질을 하다보니 내겐 최후의 보루라는 말과 등 뒤의 벽이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등 뒤의 벽만 있으면 반파로만 그쳤다. 그럴만한 사람과의 연결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었다. 단지 잘 살아있을 거라는 미신에만 기대서는 모자랐다. 복합적인 기대감이 안부 속에 뚝뚝 묻어났다. 어떤 마음으로 보내냐고 물었을 땐 얼이 빠졌다. 유보해도 되는 답장에 굳이 써넣은 진심은 호도돼선 안 되는 투명한 심리였다. 반쪽짜리 테라피를 위해 이어가는 건 아닙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하다 장담할 수 없었다. 이 연결이 안부를 가장한 생존여부를 확인하는 물음이 역린을 건드리고 있음은 확실했다. 답장이 안 오면 미친듯이 불안해하면서 또 땅을 파뒀다. 낡아버린 삽자루 자체를 갖다버리고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은데. 경계면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가 튕겨져 나가는 건 아닐까 겁을 낸다. 우르릉. 하늘이 요동친다. 마른 번개가 뒤쫓는다는 경고다. 낮고 단일한 경고음에 괜히 심장이 쫄린다. 잘 익다못해 조금씩 국물을 빨아들이고 있는 면발을 괜히 뒤적인다. 식욕이 없다. 입안이 깔깔하다. 정말 해가 되는 일이었을까. 어떤 가능성에 베팅했길래 당신은 기꺼이 내 손을 잡았는가. 어떤 착잡함이 머무르는 지 알곺다. 잘 닦인 문장의 뒷문을 연다. 맥락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한동안 이 방에 머물며 어떤 마음으로 보낸 건지 알아야 한다. 세찬 비가 내린다. 반쯤 열린 베란다의 문을 한틈만 남기고 닫았다.
67 이름없음 2024/09/20 03:51:13 ID : PfXxU41Ckq3 0
집안의 전기가 끊겼다. 가뜩이나 커튼을 새로 쳐 어두컴컴한 방안이 더 어둑해졌다. 쓸 말도 없는데 활자 좀 읽었기로서니 괜히 기웃거린다. 불면의 밤이면 매일같이 찾아와 썼었는데. 꽤 많이 지나왔다. 엄청난 거리감이 느껴진다. 지독하게 불안했던 나날을 찍은 필름은 열화시켜버렸다. 일부러 암실 바깥에 꺼내놓고 빛이 바래길 간절히 바랐다. 새벽이 싫었다. 이맘때쯤이나 되어야 멈추는 도시의 심장 한 가운데에서 연하게 톡톡거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방황할 때면 너는 어디서 뭘 하는 지가 미치도록 궁금했다. 어디서 뭘 하길래 나를 이렇게 좆같은 기분에 빠트리냐고 묻고 싶었다. 잘 알았다. 너는 너의 영역으로 돌아갔으며, 우리의 세계는 더 이상 부딪힐 일이 없다는 것을. 후드를 뒤집어쓰고 발 닿는 대로 걸었다. 자취방의 주인도 아니었는데 그새 편의점 사장님들과 안면을 텄다. 어딜 가나 그런 천성이었다. 제가 지금 면허증이 없어서요. 괜찮다며 삑삑 아무렇지 않게 계산해주던 투박한 손을 기억한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방 한가운데에서 찌질하게 과일소주 하나 얼음컵에 가득 담고 쭉쭉 마셔대기도 했었다. 뭐가 그리 속상했는지. 억울했는지. 더 좆같은 일들이 앞에 산적해 있단 걸 알았으면 그딴 감정소모에 쉽게 술 마시지 않았을텐데. 전기가 다시 돌아왔다. 전자제품들이 저마다의 숨을 뱉어냈다. 티비의 요란한 로딩 화면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글을 써뒀던 탓에 과거의 몇몇 장면은 도저히 열화되지 않은 채로 박혀 있었다. 좁은 방안에서 몸을 꾸겨 잘 때면 더 외로워졌다. 처지가 주는 공허감도 물론 있었지만 터도 별로 좋지 않았다. 재수생의 괴로움과 직장인의 애환이 한데 뒤섞인 미친 공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불면은 꽤 쉽게 왔다. 그때부터 일기를 죽죽 길게 써대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도 연습이라고 계속해서 어떤 틀이나 결이 만들어졌다. 지금 다시 돌아보니 좀 우습기도 하다. 5년하고도 하루 전의 일기. “ 라이터가 없으니 화구는 쓸모가 없다. 태울 것은 많은데 불씨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돌들을 부딪혀봐도, 남은 나무로 비벼봐도, 불씨가 생기기 전에 지쳐버렸다. 저 많은 장작들 내가 할 일에 하나 두개씩 갖다가 던지면 오죽 좋으련만 그러기도 쉽지 않은 상태다. 끝없는 우울이 저편에서 내 뒷목을 잡고 있는 것 같다. ” 쉼표를 남발하는 습관을 교정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 그렇게 찾아헤매던 라이터는 손에 넣었다. 사주에 불이 많아 그런가 불을 좋아했다. 고깃집에서 가져온 성냥 다음 단계가 필요했던 거라고 합리화를 한다. 의미부여 좋아하니까. 같이 맞췄다. 선물이라고 샀는데 네 달 넘도록 당사자에겐 전해지지 않았다. 내겐 이걸 막 굴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여기저기 기스 잔뜩 생겨서 빈티지로 만들어줄 수 있는. 아무리 해봐도 나는 품속에 라이터가 없으면 불안할 지경의 사람은 못 되겠거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쉽게 의존했고 쉽게 중독되는 성격이란 걸 저 자취방에서 깨달았다. 그래서 흡연은 시작조차 안했다. 전자담배든 연초든 태워보고 싶다는 욕망은 늘 품고 있었다. 사랑이 담배와 같다는 병신같은 비유도 할 줄 알던 때엔 진짜 피우고 싶었다. -4 주인도 없고 친구도 없는 방안에서 혼자, 둘 다 있는 방안이면 근처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서, 충동적으로 마시다보니 깨달았다. 돈 주고 몸 깎네. 더 병신 되기 전에 끊어야겠다. 그 뒤론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일 때만 마셨다. 그러다 확 끊었다. 술자리가 많지도 않았다. 앞으로 많아질 수도 있겠지만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늘 사이다나 물을 시켰다. 음주는 종종 트리거가 됐다. 그날의 아침으로 돌아가는 건 죽어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충동은 쉽게 사그라들었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좆같았을까. 묻고 싶다. 오랜만에 문 벌컥 열고 마주해서 앉아본다. 왜 스스로 안간힘을 써대며 나락으로 걸어갔는지 알고 싶다. 행복만 했어도 아까울 시간인데. 탐색 차 들쑤셔본 5년 전의 일기는 신변잡기가 덕지덕지 들러붙어있어 눈쌀이 찌푸려졌다. 누가 좀 체에 걸러줬으면 좋겠네. 괜찮은 문장 몇개 건져보려고 그랬는데 못하겠다. 이렇게 또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정확히 24시간 전엔 당신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분명 다짐했었다. 다짐이라. 결심도 다짐도 단어가 아까운 수준인 듯하다. 구름 낀 날씨 때문에, 비가 와서, 변화무쌍한 날씨가 전하는 백색소음을 익숙한 선곡으로 덮다 보니 밤이 왔다. 새벽이 찾아왔다. 30분 정도의 완전한 암전이. 이제 은은한 조명도 켜졌는데 그냥 돌아갈까. 오늘로. 눈 감으면 찾아올 내일로. 언젠가 볼 내게 묻고 싶다. 아직도 그렇게 좆같은지. 아니라면 어떻게 된건지. 시간이 약이라는 말 진짜 다 불태우고 싶다. 지나치게 자주 킨 탓에 하얗게 기능을 상실해버린 심지로는 짧은 불꽃만 타올랐다. 돌아가면 환기부터 시킨 다음에 경건한 마음으로 심지나 손봐야지. 다시 새것처럼 타오르라고. 애꿎은 부싯돌만 괴롭히지 말고.
68 이름없음 2024/09/24 01:33:49 ID : mIIE7hxTRu6 0
짧아진 심지 환기부터 시키고 앉은 채 숨을 돌리는데 아차. 정지하는 타이밍에 괜히 써뒀던 단어가 떠올랐다. 구속될 필요따위 없는 자그마한 실현적 예언인데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가방만 버려두고 달칵달칵 잘도 심지를 꺼내어 잘랐다. 예상보다 많이 짧아져 있었지만 이미 뽑아버린 심지를 썩은 무마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요령없이 한참 헤매다 빠른 속도로 콱 찌르니 쉽게 통과했다. 무엇이든지 한 번만 성공하면 익숙함이 손끝부터 배어든다. 더는 낯설지 않겠지. 비가역적 변화를 기쁘게 맞았다. 이유가 있는 불면이라면 좋을텐데. 수면 시간은 확보하지 못한 채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 잠이 몰아닥칠 줄 알았는데 그러질 않는다. 피곤한데 피곤하다. 과잉행동에 빠졌나. 습관처럼 체력을 빼서 쓴다. 충동적으로 쌓아둔 일정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이걸 다 할 수 있을까. 내가. 잘 참아왔던 누적 일수를 쌓아놔 함부로 도망치지 않고 싶었는데 임계를 넘어버릴까 두렵다. 하루를 닫는 느낌을 내다보니 더더욱 눈꺼풀이 무겁다. 문제는 퍼뜩 떠오른 생각의 꼬리를 콱 물어버리면 한 시간을 허비해버린다는 점이다. 이런 날이 또 있었지. 수험생들의 한이 모두 뭉쳐 하늘도 얼려버린다는 그날, 나는 잠을 설쳤다. 쓴소리와 특유의 필기체로 유명한 인강 강사는 말했다. 눈이라도 감고 있으라고. 눈을 감고 있으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심장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것 같았고 내면 곳곳에서 소용돌이가 솟구쳐 마음을 하나의 점에다 모으지 못했다. 자연히 잠과는 멀어졌다. 예전에, 휴대폰을 보다가 잠에 드는 쓰잘데기 없는 버릇을 들여놓기 전에, 그러니까-. 너를 만나고 있던 시절엔 평범하게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 눈앞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어 쉽게 잤다. 보통은 두 가지 방법이었다. 하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눈을 감고 있다 보면 짙은 오동색 나무 문이 떡하니 나타난다. 좀 헐거워진 금색 손잡이를 돌려 들어간다. 그 후로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문에 비하면 특이하다. 어디서 배웠던 건지 본 걸 따라한 건지는 모르겠다.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흑백의 나선형 소용돌이를 등장시킨다. 블랙홀처럼 가운데가 점점 빨려들어간다. 몸에 힘이 빠지며 자연스레 잠이 든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방식은 “잤다”에 가까우나, 이 방법은 “잠에 들어간다”가 적합하다. 그런 느낌이었었지. 설명도 해줬었는데(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잊고 있었다니. 나무 문은 이후에도 종종 써먹었던 것 같다. 소용돌이는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가위가 눌리는 느낌이 날 때에도 갑자기 등장했기 때문에 선호하진 않았다. 문. 그래. 항상 이쪽의 문을 닫고 저쪽으로 나아가면 내일이었는데 말이지. 너를 그리워할 때면 들었던 노래가 날 지긋지긋하게 한다. 거짓말이다. 노래는 죄가 없다. 내가 나를 지긋지긋하게 만든다. 네 얘기 안 꺼내고 글을 열고 닫을 줄 알면서 물 흐르듯이 넣어버린다.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최적의 경로로 재안내합니다. 왜 이런 알림음은 뒤늦게 뜨는지. 돌고 돌고 돌아버렸는데. 도대체 뭐가 바뀐 건지 모르겠다. 어떤 시점에서 단 한 뼘도 나아지지 않고, 악화되었다는 생각만 든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구덩이를 파지 않을 뿐 눈속임할 정도로 매끈하게 메우진 못했다. 함정인 줄 정말 알면서도 걸려 넘어지는 걸까. 축축한 밑바닥에 도달하면 거기 눈을 뜨고 서 있는 건 피곤과 분노, 그리고 증오에 절여진 나 하나인데. 거울에 비친 나를 생경하게 보기 시작한다. 이것도 연기다. 그 어떤 경험도 최초의 것 이후로는 완벽히 낯설 수는 없다. 경계 너머로, 에피소드 이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 나는 가만히 서서 비가역적 변화가 내려주는 달콤한 비를 맞았다. 너무 달아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69 이름없음 2024/09/29 14:22:10 ID : mIIE7hxTRu6 0
성긴 낙엽이 떨어질 때 예전 같지 않다. 재개발로 하늘길이 좁아져 문득 답답함을 느낀다. 뜨거운 햇살 아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부재하다 발생하는 것도, 존재하다 소멸하는 것도 어색하다. 사실은 인식 문제이다. 불편하다는 느낌을 발견하는 화자는 나이므로. 감각으로 이상함을 느낀다. 감각. 정말 감각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거라면 모든 일에 둔감해져야 하나. 몇년 째 얼굴보다 큰 낙엽을 길거리에서 발로 차지만 낯섦은 숨길 수 없다. 다른 곳에 와 있다는 생각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낙엽은 가로수에서 그리도 쉽게 떨쳐지는데. 일이 날 것만 같다. 증상 주기가 짧아지고 빈도도 부쩍 늘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집안에서 침잠할 수는 없다. 위태로움을 느낀다. 예민한 탓에 기민해진 건지 반대인지 알 수 없다. 종종 이런 과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 반복해서 되뇔 때마다 이젠 그 옛날이 꿈같다. 환상이었던가. 물 좀 더 마시고 드러누우면 자취를 감출 증상에 화를 지나치게 낸다. 자조모임의 다른 경험담을 읽어보니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다들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 전체 에너지의 절반 이상을 쓰지 않도록 조절하고 억눌러가며 평화를 택한다. 누굴 탓해야 하는가? 운이 따라주지 않는 나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하나. 목 안쪽이 뜨끈하고 뻐근하다. 마음대로 울지도 못할 땐 병원이 절실하다. 쪼잔하게 이런 걸로 울컥하고 그래. 사람새끼가. 누가 등이라도 퍽퍽 쳐줬으면 좋겠다. 명치 안쪽이 꽉 막혀 있다. 이젠 잠이 들 때의 이완도 무섭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려다 미쳐버린 거라고. 전부 게워내면 괜찮을 텐데 뭘 토해내고 싶은지 형체를 알고 싶다. 다음 주엔 뭐라고 할까, 당신은. 휴대폰을 진짜 떨어트릴 때만 타고 오라고 할까. TIA는 원래 그런 거니까. 나는 원래 그러니까 좀 참아보라고 할까. 물 좀 많이 마시시고요, 간단하게 운동도 좀 하시고요. 일상생활의 불편감은 진찰대상이 아니다. 환자의 쓸데없는 호소라고 생각하니 의례처럼 하는 정기검진에서 먼저 묻지도 않고 답을 듣지도 않는다. 매크로 답변을 눌러놓는 기계다. 발언권은 왜 당신에게 있을까. 의문을 품다보면 결과를 판독하는데에만 약이고 내 몸엔 독인데도 꾸역꾸역 맞아가며 검사결과지를 갖다바치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성찰하게 된다. 차라리 온몸을 해체해서 직접 들여다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불 다 꺼진 병원 복도를 외로이 걸을 때 가장 괴롭다. 이렇게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만 이래. 정신 차리자. 정신은 무슨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건지. 마셨던 물은 피로 돌아야 하는데 애먼 곳으로 나온다. 누구나 이래, 따위의 먹히지도 않는 일반론 말고 몸을 관통하는 위로를 할 줄 모른다. 나조차도 내게 해줄 말이 없다. 힘이 안 나는데 손가락 끝까지 닿질 않는데 주먹 꽉 쥐고 화이팅 외치면 뭐가 달라지나. 부득불 웃어주고 나면 텅 빈 마음을 채울 길이 없어 허탈하다. 내게 필요한 건 뭘까. 다 알면서 진짜 안 하기 때문에 아픈 건가. 아픈 건 운이라던데. 잠깐 불운하면 좋았을 걸. 이제껏 미리 발견했으니 천운이라 생각해왔다. 살아보니 그러지만도 않았다. 인식 문제라면 시한폭탄의 초침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단 사실 정도는 모르고 싶었다. 설령 그게 눈을 가려 더 큰 불운으로 초래되더라도. 도저히 자의로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눈만 꽉 감아봐야 나머지 감각으로 온전히 밀려오는데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을 땐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현인들은 알고 있을까. 괜히 불상 앞이 그리워진다.
70 이름없음 2024/10/11 23:51:23 ID : KZbgZjvA5dQ 0
나른함 걱정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증상의 발현과 동시에 오는 불안이란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굴게 된다. 물밀듯이 닥쳐오는 감정을 마주 선 채 서 있으면 어디로 도망쳐야 좋을 지 몰라 굳어버린다. 정확히 일자로 두 발 딛고 모래바닥으로 발바닥을 파묻어버릴 것처럼 꼿꼿하게 선 채로 아득해진다. 중력이 잡아당기면 미세하게 꺼져가는 느낌이 든다. 나는 발바닥을 딛고 서 있는데 어째선지 빠져들게 된다. 이윽고 폭풍이 휘감는다. 사방이 유리로 닫힌다. 물이 차오른다. 본다, 느낀다, 반복되는 환상이라는 걸, 언젠가는 괜찮아진다는 걸, 누구라도 말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끌어안고 오래오래 잠든다. 그럴땐 애써 맞추어낸 반지도 별다른 소용이 없다. 한강 작가의 집요하게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문구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 부끄럽지만 그의 작품 중 하나를 읽다 잠들어 완독을 포기했었다. 경탄하는 사람들이 그의 예전 글을 자꾸만 올렸다. 해서 눈동냥한 시 중 한 구절을 읊는다. 집요하게 사라지는 것들 앞에서 나는 기억밖에 할 수 없다. 기억이 가진 힘이란 완전히 사라지지 않게 한다는 데에 있다. 숭고한 영역까지 갈 필요는 없다. 멍한 눈을 한 채로 가만히 생각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대도 닳는 건 하나도 없다. 물리적인 테이프가 늘어지지도, 뇌의 말단부분이 소실되지도 않는다. 회전을 거듭할수록 예리해지는 흑연의 끄트머리처럼 점점 뾰족해진다. 그러다 실수로 툭, 과유불급이라고, 일 센치가 될까말까 한 탄소덩어리를 부러트릴 때엔 절치부심하고 다시 돌린다. 되돌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끝이 존재하지 않는 연필을 무한히 깎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겠다. 날카로운 흑연이 종이와 처음 만나는 순간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글씨를 쓰다보면 약간 닳아 필체와 짝이 맞는 지점이 온다. 삼할 정도를 앞에서 이미 다 털어내고 이어간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예리한 방향이란 방향은 죄다 써내고 나면 완전히 둥근 모양으로 변한 심지가 보인다. 꾹 참고 쓰면 글씨가 두꺼워져 초심과 달라보인다. 손을 놔버리고 싶지만 은색 기차에 태워 덜덜거리며 처음으로 돌려보낸다. 다시 쓴다. 샤프를 쓸 때는 이런 느낌이 더 일찍 찾아왔다. 그러다 힘을 꽉 주면 뚝 뿌러져버려 일관된 모양에서 이탈한다. 봐줄 만한 서체를 가졌다고 생각하니 흑심의 일탈을 참을 수 없어 버릴 종이에 심을 슥슥 갈곤 재빨리 이었다. 떠올리면, 아날로그로도 의미없는 글을 많이 썼었다. 시간을 죽이려고 했거나 머릿속의 생각을 물리적으로 버리려고 했거나. 되감기 외에도 물리적인 방식으로 남기는 일은 계속 해왔다. 잘 쓰고 못 쓰고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내가 뭐라고, 그냥 나인데. 늘 욕심은 있었다. 어릴 적엔 자만심도 넘쳤다. 고 작은 게 학교서 상 좀 탔다고 우쭐댔으니 귀여웠겠지. 지금은 겸손하려 한다. 못 쓰지는 않는다와 잘 쓴다는 동치될 수 없다. 나는 그저 장작을 패고 알맞게 쌓아올려 불을 지피는 거라고. 자의로 움직이는 병정일 뿐이니 회고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동일한 주제로 계속 같은 글을 쓴대도 순간마다 느끼는 감정이 달라 잠자리채 하나 들고 기다리다보면 이렇게나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의무감에 이런다는 말, 왜인지 씁쓸하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썼을 때는 좀 더 무거웠을까. 너무도 가벼워 몇 십만 자를 모아야 메가바이트로 남겨질 활자인데. 가만히 앉아 생각한다. 떠올린다. 그대로 적어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앞에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무언가를 움켜잡지 못해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 뿐인가. 미동도 없는 사물 속 생동을 느끼고자 불을 켠다. 너는 성급하지 말라고 했다. 부싯돌을 돌린 손을 가만 두고 있으면 천천히 타오른다고. 찰칵 찰칵 점화되지 못한 불꽃들이 헛돌자 요령을 알려준 거다. 이젠 너를 움직이게 하러 가야지. 너무 오래 잠들고 있으면 우리가 만난 의미가 없다. 냉장고도 이렇게 요란하게 숨을 쉬는데. 얇은 창문 너머 전화받는 소리가 타고 들어온다. 흐르고 있다. 어떻게든. 애써 중심 잡겠다고 꼿꼿하게 서 있어봤자 무너진다. 아직까지의 나는 그렇다. 디딤발의 근력이 모자랐던 모양이지. 다시 네 조언대로 킨다. 꺼트린다. 단순한 순환인데. 왜 몰랐을까.
71 이름없음 2024/10/16 04:33:39 ID : PilwoE4ILfh 0
모기 따위의 한 마디도 안 되는 벌레에게 이토록 열불을 내다니 얼마나 효율이 좋은가
72 이름없음 2024/10/28 02:51:41 ID : 5WoZeHyMqlD 0
일상을 녹였다. 온종일 게임만 하느라 뇌의 어느 부분이 빠르게 소실된 걸까. 눈보라가 치는 전장에서 박치기하고, 무한히 행위를 반복한다. 지면 화를 내고 이기면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도파민에 젖어있다. 창문 밖 칠흑같은 어둠이 다가올 때가 돼서야 까무룩 잠에 든다. 생활리듬을 꼬아놓았다. 번듯하고 가까운 운동장이 생겼는데 한 두번 걸은 게 전부다. 자연히 돌아왔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라고 생각하니 사람 참 간사하다 싶었다. 변하고 싶다고 떠드는 이 ‘가능성’의 상태만을 즐기게 됐다. 죽을듯한 노력이 싫어 한없이 도망쳐왔다. 열정을 불태우게 해달라고 바깥에 빈다. 내부에서 원동력을 굴려 불을 피우는 구조가 망가져버렸다는 듯.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원인을 찾기 싫었다. 빨갛게 익어가는 불판 앞에서 너는 내게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어느 시점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과거가 넘고 넘고 넘어서야 할 산처럼 느껴진 지 오래였다. 우리는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눴다. 어떤 조건을 취해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까. 돌아갈까. 돌아갈 수 있는 단 한 시점 역시 ‘그 애’가 엮여 있다. 미치게 싫어, 라는 말, 다 거짓말이지. 나도 안다. 삶의 어느 부분을 관통하여 가로지르고 싶지는 않다. “세로”지른대도 내가 바꿀 수 있는 상황이 많진 않을테지. 그러나 네가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형태로든 눈에 보이는 지지를 해주고 싶었다. 그 사실만큼은 녹이 슨 고철처럼 마음 안쪽에 숨겨져 있다. 널 만날 때면 무지갯빛으로 물들어버린 표면을 쓰다듬게 된다. 고장나버려 제 기능을 못하는 마음 따위일까 싶어서. 마지막날 밤엔 유성을 맨눈으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고갯짓 몇번 까딱하는 순간에 맞춰 떨어지진 않았다. 그런 행운을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대자연에 반하는 요행이었겠지. 위안을 삼을만한 빛을 근처에서 찾는다.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우리의 불꽃도 순간 타오르다가 사그라드는 유성이었을까. 며칠동안 너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유독한 연기를 최대한 적게 들이키려 노력했다. 쉽진 않았다. 좋지 못하단 걸 알면서 함께하다니. 폐 안쪽에 켜켜이 쌓인 담배 연무도 찬 공기로 조금씩 희석되길 바랐다. 모조리 희석되기 전에 너를 만나러 가야 하는 건데. 나는, 나는. 가는 길이 멀어 망설이는 건가. 아니면 부루퉁한 몸집이 싫어 움츠러든 걸까. 새벽을 닫는 익숙한 음율이 되레 말의 길목을 막아선다. 글도 쓰고 쓰고 자꾸 써야 익숙치 않은 어휘들로 익숙한 감각을 표현하는 것인데. 활자도 생각도 멀리 두었으니 답답함은 어쩔 수 없다. 점점 두문불출하듯 방안으로 파고들어간다. 구획을 나누는 두 선분의 모서리 안쪽으로 숨겨지지 않을 존재를 깊이 넣어둔다. 순식간에 찾아온 겨울바람 덕에 잠도 늘었다. 활력은 줄어든다. 평일보다 주말이 많은 삶을 또 언제 살 수 있을까. 꽉꽉 채워 살면 좋을텐데. 무얼 해얄지 알고 있으면서 착수는 안하는 비겁함이 혀를 길게 한다. 길어진 혀로 한다는 게 고작 게임이라니. 나중엔 정적이 싫어 아무 말이나 기계적으로 내뱉고 있었단 걸 알면서도 쉽게 입다물지 못했다. 사고나 치지 않아서 다행인가. 이런 순간이면 보고싶다. 눈을 빛내게 해 줄 그 사람이. 그럴 사람이 없다는 핑계 말고. 단 하루도 나오지 않는 건가. 해가 일찍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어둠에 잠긴 건물의 최상층 어딘가를 부연 시야로 내다본다. 꽉 찬 서가가 압도하던 작은 방 속, 특별한 온열기기 하나 없이 식어있던 공기를 느낀다. 뒤늦게 다가온다. 차가운 공기를 데웠던 건 두 사람의 온기였음을. 적어도 나와 당신 사이의 공기는 열교환이 활발하게 이뤄졌었겠지. 눈에만 담은 장면은 이렇게 불확실하다. 재구성했어야지. 바보같이. 몇몇 장소가 빠르게 흘러간다. 반추를 위해 몇 년이 지난 뒤 혼자 걸었을 땐 그 맛이 안났다. 뭐랄까. 만나기 직전의 컨디션 난조가 한 방에 깨지는 극적인 느낌을 연출할 수는 없었다. 파워에이드를 숨기던 가방이 달랐나. 이른 저녁을 먹었던 식당이 달랐나. 그리워하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 오늘은 한 시간이라도 앞당겨야지. 그래야 돌아올테니.
73 이름없음 2024/11/07 21:37:27 ID : 8lA3SGspalb 0
부쩍 추워졌다. 내 형벌은 네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너의 안부를 묻는다는 것이다. 내 혓바닥이 낱장처럼 얇은 탓이려니. 오늘도 네 성취지위 따위로 만들어진 별명이 맞은편에서 흘러들어왔다. 그토록 선명했던 달은 구름 저편으로 자취를 감췄는데 너는 어째서 수면 위로 오르는가. 언젠가 한번은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이 왜 내 고막을 진동시키는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무의식적으로 꺼내든 카드는 분노였다. 머리끝부터 열이 발생해 발가락까지 전해졌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라는 걸 뒤미처 깨닫는다. 열 관리를 못해 걸어오는 동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너는 알 필요도 없지. 영원히 연락할 일은 없을테니. 오랜만에 연락처를 쭉 내려 프로필을 쳐다본다. 잘 살고 있다. 망칠 필요는 없다. 이것으로 족하다. 언젠가 둘 다 텅 빈다면 적잖은 충격에 하루종일 골몰할 것이다. 누군가 그랬는데. 네가 걔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지도 모른다고. 맞는 말이다. 이성적으로 살자. 게임에 빠져들더라도 생각따윈 다 벗어던지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아주—. 많이 멀어졌다.
74 이름없음 2024/11/17 00:45:25 ID : 8lA3SGspalb 0
바람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결코 돌아가라고 하고 싶진 않다. 이런 내가 결말이란 걸 안다면 더더욱. 가장 최악의 선택지를 조합한 듯한 기분에서 쉬이 헤어나올 수 없다. 닳도록 들은 선율이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사건의 이전은 영원히 닿지 못하는 영역에 있다.
75 이름없음 2024/11/26 01:54:14 ID : 2NAjjwE066i 0
비가 온다 이 앨범이 나왔을 때를 정확히 기억한다. 킴과 일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퇴근 후 비가 오는 버스정류장에서 이어폰을 꽂아 들었다. 첫 트랙부터 순서대로 들었는지, 타이틀부터 손에 잡히는 대로 들었는지 그런 세부적인 것까진 기억나지 않는다. 비의 향기와 축축한 공기, 버스를 기다리던 나. 무척이나 기대했던 신보를 처음으로 듣는 그 순간만이 박제된 채 짧은 gif 형태로 남았다. 우천여신 아니랄까봐 발매일에도 비를 뿌리나. 속으로 헛웃기도 했겠지. 그땐 전국적으로 비 소식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버스에서도 계속 반복해 들었겠지만 딱 한 장면만 남았다. 비가 오는 길가, 정류장, 서성거리던 나와 기대감. 새벽에 비가 오면 꼭 마지막 트랙을 찾아 듣는다. 중저음으로 속삭이듯이 내뱉는 어투가 좋았다. 가장 그림자가 짙은 부분에 어떤 빛도 비추지 않고 그대로 담담하게 말하는 노래였다. 악기도 피아노 하나. 도입부 빗소리는 아마 본인이 녹음한 거겠지. 취미가 녹음이랬으니. 3일 정도 앨범에 취했던 것 같다. 20분도 채 되지 않는 앨범을 닳고 닳을 때까지 들어도 쉽게 질리지 않았다. 전축을 잘 닦아 실물 씨디를 돌려 듣기 시작한 것도 이 앨범 덕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마는 내가 아는 장마였다. 느리고 연한 빗방울이 끊임없이 내리다가 한번씩 굵게 떨어지곤 하는. 비가 싫었다고 말하는 화자의 짙은 그리움이 나와 닮았다고 느꼈다. 기다리는 게 비인지, 너인지, 그때의 나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노래를 들으면 아무 목적도 없이 가방을 집에 급히 버려두고 나와 무참히 떨어지던 비를 그대로 맞던 내가 생각난다. 그냥 그걸 좋아했었다. 검은 우산도 가방도 다 필요 없었다. 책만 지키면 됐으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임무를 완수해둔다. 한 바퀴 돈다. 투둑, 투둑, 비를 맞는 감각보다 추위가 더 크게 와닿으면 돌아간다. 아주 뜨거운 물로 씻어낸다. 그리곤 감기에 걸렸다. 루틴처럼 즐겨하곤 했었다. 두렵고 귀찮아지니 그 일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비겁해졌다는 평가말곤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교복을 입게 되자 더러워지면 안된다는 핑계를 댔다. 말도 안돼. 지금도 종종 비가 오면 충동에 휩쓸린다. 그래도 바람막이의 얇은 후드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됐다. 시야가 빗방울로 흐려지는 걸 참을 수 없는 인간으로 자랐다. 이게 네가 바라던 결말일까.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친구가 살던 동 앞을 지나가는 길목의 보도블럭을 보면서, 여기 다시 올 때는 얼마나 자라있을까 궁금했다. 그 길목은 친구와 멀어지게 되자 좀처럼 걸을 일이 없었다. 같은 단지에 그리 가깝게 살아도 나는 늘 가던 길로만 갔다. 그렇게 엿보고 싶은 미래가 나라는 사실이—. 이런 날은, 죽도록 싫다. 나는 처음부터 비가 좋았다. 비를 피하는 어른으로 자란 내가 미울 뿐이다. 비냄새를 맡을 줄 아는 아이였는데, 허리가 아픈 걸로 비소식을 어렴풋하게나마 예측하는 사람이 되다니. 이런 날. 닿지 않는 신호를 얄팍하게 잡아가며 선생님 흉을 보던 너를, 나는 왜 기억하는 걸까. 오죽하면 과목도 기억나. 정확한 건 아닌데. 투명우산 아래서 듣던 네 볼멘소리. 해줄 말은 없고 그냥 들어주는 게 전부였는데. 언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비가 올 때, 비를 같이 맞아주는 사람을 택할 것인지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을 택할 것인지. 나는 아직 비를 맞아주는 사람을 고르고 싶다. 우산은 어디서든 살 수 있다. 우산 써도 바람 불면 다 맞게 돼 있잖나. 애매하게 젖을 바엔 그냥 함빡 다. 온몸 구석구석 안 젖은 곳이 없도록 푹 적셔지고 싶다. 그럴 사람이—.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까. 모쪼록 비가 온다. 하루종일 작업하겠지만, 문 너머로 비를 듣는다.
76 이름없음 2024/11/27 20:22:54 ID : fPbjBAnWmFe 0
눈이었다. 새벽 내내 온 두터운 알갱이는 전부 눈이었다. 누워서 듣기만 할 땐 비인줄 알았다. 기상청 예보로 20cm가 쌓인댔는데 설마 그러겠어, 싶었더랬다. 아침의 연락을 보고서야 믿었다. 박차고 나선 바깥 세상은 온통 하얬다. 게임에서 겨울 맵을 따로 내주는 이유를 새삼 체감했다. 울긋불긋한 이파리 위로 내려앉은 흰 이불 덕에 간만에 들떴다. 행인들도 행복해보였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유달리 많았다. 새빨개진 손으로 눈을 굴리는 사람도 많았다. 오밀조밀 눈사람과 눈오리가 늘어선 벤치 위를 보니 마음이 따스해졌다. 첫눈이라. 기온차 때문이었을까, 단단히 무장하고 갔는데도 어지러웠다. 몸에 힘이 빠졌다. 급하게 한의원엘 갔더니 체기가 좀 있단다. 기사회생을 하고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어지럽다. 피가 모자란가. 파업하고 꾸준히 물을 마셔주었더니 약간 돌아온 것 같기도 하다. 일상에 별다른 충격이나 외상 없이 컨디션이 급락하니 스트레스 수치가 와바박 치솟았다. 혈압 관리에 대한 제언을 듣곤 닥쳐오는 무드스윙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산 너머 산이다. 나도 나를 다 모르겠다. 증상이 심해지자 머릿속으로 흰 천장 아래에서 벌어질 일을 시뮬레이션 했다. 일단 들어가선 온갖 종류의 검사를 돌리겠지. 별 다른 이상이 없는데 과민해서 온 것 같으니 일단 수액을 맞겠지. 벙벙할 정도로 큰 환자복을 입은 채 링거 대를 끌고 다니겠지. 그렇게 쏘다니면서 병원 탐방을 한다. 뚝뚝 눈물마냥 떨어지는 링거를 보면서 양의학의 의미를 괜히 고찰한다. 한의학은 맥 짚는 일 분이면 아는데, 양의학은 관례처럼 검사를 돌려도 의미가 불명확하다며 전혀 다른 독을 약이랍시고 집어넣는다. 몸도 마음도 걸레짝이 돼서 나온다. 외롭고 괴로운 삼 일을 꾸역꾸역 보내면 해방이다. 감옥을 가 본 적이 없지만 차라리 독방이 나을 지경이라고 상상한다. 여기까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지옥의 돌림노래가 펼쳐질 72시간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듣는 낮은 템포의 노래를 틀어두고 물만 마신다. 얼마나 다행인지. 불안이 빠르게 증폭해 뇌 속 회로를 다 끊어두는 기분이었다. 경광등이 번쩍거려 제발 좀 꺼달라고 하고픈 심정이었다. 기댈 곳이 가까이 있어 한숨을 돌렸다. 생활습관 좀 교정하라시는데 이쯤되면 말 들어야지 않겠니. 요근래 오버클럭 좀 돌리긴 했다. 절전모드로 하루정도는 들어가도 좋겠어.
77 이름없음 2024/12/13 02:09:49 ID : mIIE7hxTRu6 0
새벽 내도록 스트레스를 받는 게 싫었을 뿐이다. 지면 이길 때까지 되풀이하다가 자는 것도 까먹는 일은 언제부턴가 재미가 아니라 부담으로 다가왔다. 바뀐 장소도 싫었지만 치고 들이박고 다시 살아나서 박치기하는 일련의 과정이 답답했다. 그 흔한 지능 하나 쓰지 못하고 순간의 판단만 강요당하는 기분. 어느 순간 떠드는 행위조차 즐거움이 아니라 일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권태에 도달한 탓이겠다. 감동도 없고 짧은 도파민에 취해 단타만 되풀이하는데 어떤 보람이 있는가. 처진 분위기가 나 하나 광대된다고 쉬이 끌어올려지지도 않았다. 최근엔 머리를 쓴다. 집단적 악순환에서 벗어나니 홀가분해졌다. 지면 내 탓이고 이기면 하나부터 열까지 내 공이다. 희미했던 예비 경로를 찾은 느낌이 들었다. 새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건지는 모르겠다. 지금 흐르는 미래가 정말 실존한다면 틈을 열어 보고싶다. 옳은 지 너는 알고 있을 테니까.
78 이름없음 2024/12/16 05:03:19 ID : mIIE7hxTRu6 0
돌이킬 수 없는 무엇을 보고 우리는 돌이킬 수 없다고 할까. 이미 흘러버린 시간, 깨져버린 관계, 엎어져 버린 물. 물은 새로 채우면 되지만 나머지는 이어붙이거나 되돌릴 수 없다. 흔하디 흔한 온라인 작업에서도 ‘뒤로 가기’가 있는데 우리는 어째서 지난 일을 완벽히 되풀이할 수 없을까. 처음으로는 왜 돌아갈 수 없을까. 불면에 시달리는 밤이면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낯선 순간으로 나를 보내달라고. 무엇이든지, 한번 경험하면 익숙함이 손끝부터 배어들기 마련이다. 익숙함에 흐려지는 초심이 미웠다. 좋든 싫든 익숙해진다는 것은 닳는다는 뜻이니까. 연필 끄트머리의 흑연이, 만년필 심의 말단부가, 점차 시간을 겪으며 서서히 뭉뚝해져가는 감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헌데 이미 익숙해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계속해서 날카로운 방향으로 연필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모든 방향이 닳아 둥글게 된 심지를 보곤 한숨을 내쉰다. 은색 기차에 깊숙하게 꽂아 날카롭게 만든대도 길이가 짧아져버린다. 태초의 상태로는 돌이킬 수가 없다. 낡아버린 걸까. 잃어버린 걸까. 눈을 감고 생각한다. 이대로 멈춰서 지금을 유지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나아가지 않는다면 다음이 없더라도 닳아버리진 않는다. 한 겹씩 벗겨지거나 짧아지는 일따위도 생기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은 죽어도 되지 말아야겠다고 했던 다짐은 이미 소멸된 것만 같다. 공허한 방 안에서 그렇게 괴로워한다. 사방이 꽉 막힌 듯한 답답함을 껴안고는 한숨만 쉰다. 어쩌면 좋을까. 몇 해 전 일인지 헤아려보다 놀라기도 한다. 점차 멀어지고는 있다고 믿어왔다. 내쪽에서 억지로 강한 중력을 만들어 아등바등 떼를 써왔다. 잘 알고 있다. 버릇이고, 습관이라는 말조차도 힘없이 나가떨어질 만큼 의도적이다. 해로운 걸 알면서도 숨기지 못한다. 도대체 누구에게 떳떳하고 싶은진 몰라도 부끄럽다. 유일한 창구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심장에 총알이 날아든다. 이젠 소식도 모르게 된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데 함께 했던 장소를 혼자 거닐게 되자 힘을 들여 떨쳐내야 했다. 너를, 너의 생각을, 떠올리고자 하는 나로부터 도망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좀 잊어주면 안 되나. 열 번 스무 번 일기로 되풀이했던 장면도 아닌데 생생할 필요가 있을까. 이젠 일련의 과정이 참으로 쓸모없다. 남는 거라곤 몇 바이트짜리 글. 늘 있는 격투기다. 나와 나 둘 다 쓰러져 있다. 촉발시켜준 당사자는 ‘우리’의 안녕과 영원함을 바라는데. 심지어는 항해할 방향이 어딘지도 알려주는데. 나는 네가 그리도 싫어하던 땅굴을 파고 웅크려 앉았다. 이런 내가 싫다. 얼어버린 흙바닥에 미친듯이 삽질하는 모습이 구차하다. 너도 모르겠지, 내가 왜 이러는지. 최근 구독하던 유튜브에서 전애인을 주제로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나는 너무 잘 지냈지.”라며 마지막 펀치를 날리는 장면에선 통쾌했다. 너무 잘 지냈다 말할 수 있는가. 정반대의 길을 걸은 건 아닐까. 목이 갑갑하다. 어디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악 지르면 후련하기라도 하지. 해묵은 먼지를 이번 연말에도 제대로 훔쳐내지 못하고 살아간다. 신년엔 뭔가 다를 거라고 믿으면서.
79 이름없음 2024/12/20 03:13:47 ID : 004Ns8o7uoN 0
문장 한강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소년이 온다, 때도 느꼈지만 중간중간 머리가 지끈하니 무거워져 쉽게 진도를 빼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이동 중에 보거나 했다. 문장이 무거워 몸을 짓누르지 말라고 대강 읽었다. 이 독법이 맞았다. 단문에 한자어가 많이 섞여 있어 맥락이 한겹 덧씌워진 그의 문장은 음미하려 하면 알 수 없는 고통을 유발했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리했고, 모든 독자에게 힘이 들 정도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대체로 어두운 공간 속 아주 얇게 저며진 불빛만 들어오고 있는 분위기를 유지했다. 현실적이면서도 소설이 가져야만 하는 허구적인 느낌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했다. 묵직한 타격감. 오랜만에 숨이 막혔다. 문고본이었더라면 진작 필사했을 문장만 연달아 배치된 곳도 심심찮게 나왔다. 인쇄된 활자가 아니어서 살았다. 이북으로 보니 문장의 힘이 반감되는 효과가 있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주파수가 지나치게 맞아서인지 아주 달라서인지 느껴지는 두통이나 힘겨움이 이젠 매력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피학성이 개방되는 것인가. 입꼬리 끝에 농담이 배어있던 따스한 웃음이 떠오른다. 생경함과 낯섦에 차츰 금이 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작가란 역시 대단하다. 왜 뒤늦게 깨닫게 됐을까. 오히려 좋은 일인가. 어린 나이에 읽었더라면 이런 감각을 성찰하지도 못할 뻔 했다. 적요한 방 안에서 세계와 나, 책만이 힘을 겨뤘다. 그러다가 평형이 맞아떨어져 완전한 몰입에 잠겨버렸다. 워밍업으로 좋아하던 시리즈를 빠르게 독파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예전처럼 포기해버렸을테지. 아무래도 겨울 간 읽을 작가가 생기니 좋았다. 유명하지 않은 책부터 서서히 읽어나가야겠다.
80 이름없음 2024/12/21 00:46:15 ID : 004Ns8o7uoN 0
흰 눈이 나렸다. 처음으로 읽게 된 책은 그의 두 번째 소설집이었다. 말미에 써진 한자 이름을 본 뒤 시계를 확인하니 정확히 00:00이었다. 내리는 눈 알갱이보단 길었지만 둥그랬다. 저항없이, 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눈을 맞아본다. 유달리 운수 좋은 날이었다. 환승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거나 멈춰서지 않아도 초록불이 켜지는 소소한 행운이 연달아 겹쳤다. 꽝이 2할 쯤 되는 돌림판을 다섯번 정도 돌렸는데 전부 당첨된 사람처럼 기뻤다. 아직 발길이 닿지 않은 신설을 짓이긴다. 뽀득하다. 무얼 얻고자 읽은 건 아니었고 수상 소식 이후 추천받았더랬다. 그마저도 추천도서는 기대출에 예약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대출 가능한 책 중에 제목만 보고 골랐다. 처음으로 수록된 단편을 읽다가 두통이 왔다. 불쾌와 쾌 언저리를 바삐 쏘다니는 감각을 매력이라 칭했는데 정말이었다. 알쏭달쏭하고 기묘한 맛에 연달아 넘겼다. 이런 언어로 또 무얼 말할지가 궁금했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즐겼던 게임이나 유튜브가 책보다 빨리 질렸다. 한자어가 돋보였던 건 30년 전에 쓰였기 때문이었고, 덕분에 좋았다. 요사이 출판되는 소설엔 한자어 병기가 없다시피하다. 낯선 단어를 억지로 기용하지도 않고, 의미단위를 꾹꾹 눌러 한 단어에 담아두지도 않는다. 길이가 길고, 읽기가 편하며, 난해하지 않다. 반면 그의 초기작인 이번 소설집은 옛스러웠다. 힘줘가며 읽으면 자꾸만 난도가 높아졌으므로 설렁설렁 읽었다. 첫 소설에서부터 느껴진 충격의 진폭이 점차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마치 여진처럼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슴슴했다. 화자들은 “얇게 저며진 한 가닥의 빛”을 놓지 않고 살았다. 터널 한 가운데일 뿐 반드시 끝은 있다. 누구 하나 절망과 나락의 구렁텅이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래, 그러므로 희망적이었고 생동감이 충만했다. 다시 적요한 방으로 돌아와 떠뒀던 문장을 더듬는다. 고독과 외로움이 떠돌지만 스스럼없이 수용하는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지점이 있을지언정 분출되지 않고 미결에 가깝게 이야기가 끝나기도 한다. 서울이 가지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절도 좋았다. 더 이상 이곳에서 뭘 바라지? 이곳이 준 게 뭐가 있어? 밑 없는 갈증, 탕진, 굴욕, 상처, 환멸, 그 밖에 대체 뭐가 있었어? 언제까지 이곳의 비루한 각본에다 몸뚱이를 구겨 넣으면서 살아가야 해? … 떠나기 전에는 없어…… 이곳에서 구원을 바란다는 게 미친 짓이었어. 둘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적어도 “그녀는 걸음을 멈추거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화자들은 생을 이어가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도 차분히 삶을 이어나간다.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이전에 고하는 종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 다가올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다. 그러니 입에 발린 말로 영원을 쉽게 내뱉는 행동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관계가 무너지더라도 진실만을 고하는 민화의 태도는 강인했다. 한없이 자유로운 심지를 가진 자는 애쓰지 않아도 여유로울 수밖에. 다소간 개운치 않던 지점을 평론과 작가의 말로 마무리하고 나면 비로소 시원해진다. 몸에서 훈기가 퍼질 정도였으나 춥지 않았다. 느리게 하강하는 눈, 뽀득거리는 신설 바닥, 결정적으로 불운했지만 책을 끝마칠 수 있어 더하고 빼면 결국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느낌으로 훈훈하게 남겠다. 어느 계절이든 곱씹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을테니 다시 읽어볼 만하다. 아— 그땐 첫 소설에 기가 죽어 두통을 느끼지 않았으면.
81 이름없음 2024/12/24 13:55:10 ID : 5WoZeHyMqlD 0
강렬한 느낌이 휘발되기 전에 쓴다. 이토록 강렬한 촉매제를 오래 껴안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뒷 이야기가 궁금하다. 좌우로도 상하로도 좀처럼 안정적이지 못한 차 안에서 틈틈이 읽기엔 버거울지도 모른다. 공복에 멀미가 겹쳤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게워버리고 싶다. 이런 기억따위에 쉽게 휘말리지 않고 싶었다. 이런 기억따위가 아닌 기억이니까 언제든 소용돌이친다. 오심의 기운이 점차 줄어든다. 활자가 멀어진다. 가벼운 언어로 열릴 입술인데 의미가 겹쳐진 언어로 두드리니 맞지 않았던 건가. 아주 긴 시를 읽는단 기분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다.
82 이름없음 2025/01/10 03:17:17 ID : vBcMi6Y9y43 0
불친절한 운율을 살리되 언어는 최대한 압축하여 적은 문장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읽는 호흡은 빠르나 돌아가서 곱씹지 못했다. 심상이 물밀듯 닥쳐오고 처리하기 급급하다못해 치여 깔려버린다. 한글은 워낙 고맥락 언어라는데 그의 글은 두 차원 정도 위에 서 있다. 그러니 친절하지 못하다, 친절해선 안 된다. 글 속 두 주인공부터 이미 비현실적이다. 말하지 못하는 여자와 시력이 아주 나쁜 남자. 언어를 상실한 쪽과 시각을 상실하는 것이 확정된 남자의 뜨뜻미지근한 이야기였다. 단편과는 달리 장면전환도 잦았고, 짧은 시도 빈번했다. ‘언어로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는 여자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역력했다. *   두 사람이 잠자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수업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수업이 시작된 뒤에.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사무실 앞에서. 차츰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낯익은 것이 되었다. 그의 평범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고유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 변화에 대해 언어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언어로 생각한 적이 없는 장면은 언뜻 보면 휘발성이 높아보인다. 그러나 이는 의미부여로, 그녀에겐 그저 현상이다. ‘시각적 정보’의 처리이다. 낯익게 변화했다라는 언어로 정제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믿는다. 언어로 세계를 사유하고, 창조하고, 작품을 써내려가는 작가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여자다. 작가는 왜 이런 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냈을까? 자신과는 상반된 존재에 대해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해체하고, 다시 가상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일이란 얼마나 숭고한가. 세계적인 상을 수상해서 평가가 거창해졌지만, 그러잖고 추천받은 시기 즈음에 재빨리 읽었더래도 비슷하게 느꼈을테다. 작가란 기본적으로 오감을 언어로 치환하여 생동을 부여하고 심상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치환 과정에서 의미 상실이나 파괴가 이뤄진다. 예컨대 공감각을 활용할지라도 시•청•촉•후•미각이란 총 5감각을 언어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소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또한 대중소설은 대체로 시각중심적이다. 장면마다 다르지만 언어를 볼 수 있는 자는 ‘시력에 중대한 이상이 없는 자’들 뿐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오디오북으로도 책을 향유할 수 있으나 우리에게 책은 읽는 행위(讀書)다. 듣거나 만지거나 느낄 수 없다. 이야기 속에는 시각중심적 사고를 뒤튼 부분 역시 존재한다. 남자가 점자로 된 글을 읽는 꿈을 꾼다거나, 점자로 된 책을 만들고자 하는 소망도 담겼다(“고백하자면 말이야…… 내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책을 내게 되면, 그게 꼭 점자로 제작되었으면 좋겠어.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끝까지 한 줄 한 줄 더듬어서 그 책을 읽어주면 좋겠어. 그건 정말…… 뭐랄까, 정말 그 사람과 접촉하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시각의 80% 정도가 상실된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대한 무언가(시각 혹은 언어)를 잃는대도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 최근 다양성과 배리어 프리 같은 논제를 많이 생각하고 다뤘다. 다리를 자주 다치기도 했고, 깁스한 채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반복해야 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선지 낯선 장소에 가면 문득문득 이 장소는 얼마나 배리어-프리한지 체크하는 게 습관이 됐다. 엘리베이터, 점자 블럭, 접근성, 경사로. 대체로 한국은 정상성의 신화가 굳건하다. 도시 미관을 해친다며 점자블럭 색을 보도 블럭과 같게 하거나 파괴된 점자 블럭을 고치지 않고 없애기도 한다. 공공기관 외에는 경사로가 없는 경우가 많으며(이는 특히 대학 건물에서 빈번하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노인들의 천국이 됐다. 목발 짚은 사람이나 임산부가 와도 나이 든 사람 무리를 한 번 비켜주고나서야 겨우겨우 몸을 실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도 내겐 다양성 담론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애초 이야기를 관통하는 제목이나 소재부터 ‘희랍어’다. 아주 희귀한 소재다. 이데아나 아레테,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홀연히 등장했다 가볍게 사라지기도 하는 희한한 소설이다. 모쪼록 재밌다, 즐겁다, 라곤 못 하겠지만 여운은 오래 남겠다. 낯선 언어는 언제나 독자를 난처하게 한다. 수수께끼로 남은 단어는 여전히 호기심을 부른다. 웹서핑해도 찾지 못했다. “그 순간, 불쑥 오래된 한 단어의 기억이 절반쯤 잘린 채 떠올라 그녀는 그것을 붙들려 한다. 오래전에는 해가 진 직후와 해가 뜨기 직전의 어스름을 호呼……로 시작되는 한자어로 불렀다고 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어, 큰 소리로 불러 누구인지 물어야 한다는 뜻의 단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서양식 표현과 비슷한 연원을 가진, 호……로 시작되는, 끝끝내 완전해지지 않는 그 단어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뒤척인다.” 대체 무슨 단어였을까. 무엇 하나 명쾌하지 않았다. 밤과 새벽, 아침의 불분명한 경계처럼 끝난 이야기가 자못 아쉽지만 다시 들춰보기 겁났다.
83 이름없음 2025/01/11 02:31:53 ID : vBcMi6Y9y43 0
이스터 에그 서래와 해준이 시마스시 모둠 초밥을 함께 먹고 난 후 치우는 장면, 탁자 닦는 뽀득뽀득 소리 너머로 카톡! 알림음이 들린다. 출연진 혹은 촬영팀 중 누군가가 무음으로 해두지 않은 것이리라. 의미가 서래의 관람법대로 침침식이어야 하는데 계속 수면 위로 떠오르기만 하는지도. 그녀가 양치한 후 뿌린 투명색 향수는 물이었을까, 향수였을까. 해준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는 후시녹음이었을까. 디테일에만 집착하는 괴팍한 망령이 된 듯하다. 마음 한켠엔 언제나 해결하지 못한 헤결 질문이 산재했다. 비산하는 궁금증, 그러므로 영원불멸할. 해준이 지구를 체포할 때 서래가 좇아와 세워둔 차의 깜빡이는 두근거림을 표현한 소리일까? 틱톡틱톡이 툭툭툭툭으로 들리기도 하고 피부 너머로 들을 수 있는 강렬한 심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래는 왜 고양이와 말이 통하는가. “남만주 살쾡이”의 후손이라서? 그녀가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을 맹렬히 먹을 때 야옹-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애꿎은 까마귀(후에 해준은 이 까마귀의 깃털펜을 만들어 쓴다.)를 죽인 야옹에게 선물로는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오라 하는데 그 언어는 서래가 다른 이의 대사를 모사하지도, 번역하지도 않고 순수히 전해진다. 즉 서래의 온전한 언어는 고양이와 통한다는 사실로도 이해될 수 있다. 다만 이때 해준은 번역기를 통해 남성의 음성을 거쳐 듣는다. 이질적인 체현. 잠이 안 올 때면 자장가 대용으로 튼 지도 벌써 이 년 남짓 돼간다. 잠에 빠지는 타이밍은 다양하지만 2부를 채 넘기지 못한다. 결국 1부만 주구장창 돌려본 셈이다. 영화관에서, 재개봉으로, 흑백으로 봤고 또 듣기만 하기도 했다. 단 한 번도 눈으로만 본 적은 없는 것 같네. 대본도 스토리보드도 진득히 뜯어봐야 하는데 묵혀두고만 있다.
84 이름없음 2025/01/12 00:32:41 ID : vBcMi6Y9y43 0
겨울 한가운데를 강하게 관통했다. 이것저것 갖다붙이고 싶지 않다. 정신상태만큼이나 엉망일 글이다. 머릿속이 터져버려 조용히 잔해를 되줍는다. 요 며칠 계속해서 눈발이 날렸다, 그런 만큼이나 스트레스도 켜켜이 쌓였다. 뇌관이 언제 폭발할까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데 애먼 곳에서 눈폭탄으로 돌아왔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던 눈보라 너머 옹기종기 모여앉은 피붙이들에게 짙은 염오감을 느꼈다. 같은 뿌리에서 난 가지라도 꽃과 열매는 제각각인 것처럼. 본을 따질 필요도 없이 형형색색으로 못난 자로군. 그런데도 내 카드에는 분노밖에 없어 이리저리 다 불지르고 다녔다. 가스 다 떨어진 초록빛 라이터로 향 지필 땐 사방에 불꽃놀이 펼칠 줄 몰랐는데. 한바탕 태우고 나오니 기운이 쫙 빠져버렸다. 늙었는지도. 향 냄새 밴 몸을 구석구석 씻어내린다. 머리 끝부터 발톱 말단까지 어디 하나 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스스로 암시를 건다. 녹아버리라고. 흘러흘러 이름모를 하수종말처리장에 가버리라고. 통제할 수 있는 일이란 한톨도 없었다. 오늘의 사건마저 자연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그 누구 하나 적합한 조처를 탐색하지 않고 방치해뒀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흘러왔다고 하고픈데, 발언권은 없다. 나이를 추하게 먹으면 나라는 경계가 현저히 줄어버리는 건가. 나도 “그렇게” 늙어버린단 말인가. 설령 그렇다면 뺨이라도 때려달라 우스개했다. 웃기지도 않았다. 부득불 질러놓고 오니 후련하긴 한데 잘못했다 싶다. 치기도 옛말이어야지 침묵하는 사람이 어른스럽단 걸 알면서도 퓨즈 빠진듯 날뛴다. 여전히 모났고, 날카롭다. 둥글게 변해버린다면 영원히 도망치고 싶다. 바뀌고 싶지 않아. 이번 겨울은 유독 춥다. 적설량도 상당하다.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을까. 이런 밤이면, 반지 안쪽에 채 닦아내지 못한 향냄새가 불면으로 이끌 것만 같다. 편지를 써도 마땅치 않아 죄다 찢어버릴 것이다.
85 이름없음 2025/01/13 23:31:46 ID : vBcMi6Y9y43 0
살아있다는 게 고통스러울 때도 있는 거다. 하루종일 기분이 얹힌 듯 무거웠고 몰려오는 잠을 깨치느라 예민했다. 가야겠다, 가야겠다, 입안에서 이루지 못할 다짐만 머뭇거렸다. 일정이 많았다. 교차하는 시간을 모두 써버린 탓에 갈 수 없었다. 문득 방문의 목적이 참회와 비슷하다 느꼈다. 성치 않은 무릎으로 두 시간을 고행하려 했던 작년에도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였으므로, 버스 시간표가 맞지 않는다면 걸어간다. 헤매는 사이 나를 스친 두 대의 버스가 얄미웠다. 비가 축축히 내려 오르막에 낀 안개가 야속했다. 가시거리가 짧았다. 바람막이의 얇은 후드도 빗방울을 모두 걸러내진 못했다. 결국 중도포기하고 버스로 올라갔다. 찐득했던 여름, 중간지점 캠핑 정박지에서 목을 축이고도 끝까지 오르지 못했다. 그런고로 운동은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로 하겠다고 거창히 선언했다. 하지 못 할 일은 없다. 아마 처음이 가장 어려울 것이다. 첫 단추는 손이 아프도록 꿰어도 어렵겠지. 두 번 세 번 반복할때마다 고통 역치는 높아진다. 숨은 천천히 차오를테고 뒷산 오르는 마냥 식은 죽 먹기가 되겠지. 그만한 체력없이 무얼 한단 말인가. 길눈이 어두워 헤매도, 먼길로 돌아가도, 어떻게든 가닿아야만 한다. 내가 찾는 자는 공연히 눈을 빛내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그 흔한 꿈속에도 나오지 않은지 꽤 됐다.
86 이름없음 2025/01/14 17:20:39 ID : jxXBzcGtBvw 0
단숨에는 올라오지 못했지만 이뤄냈다. 기특하다.
87 이름없음 2025/01/15 23:34:06 ID : vBcMi6Y9y43 0
검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고 서 있는 네 발 달린 짐승, 그리고 소리없이 왔다가 소리없이 사라진 한 여자. 주인공 일행은 신화 속 동물같은 자를 찾아 떠난다. 흰 눈이 나려 무릎 혹은 허리께까지 눈이 쌓인 곳으로. 여자의 기억은 이유 없이 갇혀 있다. 흔히 기억상실증이라고 회자되는 질병은 사실 기억이 가닿지 않은 곳에 모조리 갇힌 질병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애를 써서 부수고 들어가거나 조금씩 조금씩 끊긴 필름이 재생되듯 회복되어 흘러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일행에겐 여자의 정면을 찍은 사진은 없고 그저 45도 측면에서 뒤를 돌아보는 사진만 있다. 주민등록도 되지 않은 여자를 어떻게 찾는 것이 옳은가. 숨죽여 그들을 따르다 보면 여자의 기억을 따라 훑게 된다. 그의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나체 상태’가 무얼 의미하는 건지 궁금했다. 단편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갑갑함을 이기지 못한 아내가 모든 옷을 벗어던지고 베란다로 가 광합성을 시도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우리가 찾아야만 하나, 찾을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은 의선이 햇빛 아래 선 채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옷가지를 벗어던지다 검은 제복을 입은 경찰들에게 포박당한다. 그러고 보면 두 인물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깡 마른 체형을 지닌 여인이라는 것, 섬약하지만 다정한 성품을 지녔다는 것, 어딘가 알 수 없는 그림자를 품고 있다는 것. 채식주의자를 읽어본 적은 없으나 두 인물 모두 육식을 선호할 것 같지는 않다는 어렴풋한 추측도 남는다. 나무로 변해버린, 검은 사슴이 되어버린 두 사람은 지금 행복할까. 온몸으로 햇살을 내리쬐던 자가 소설에 등장함으로써 현실감각은 파괴된다. 그러나 왜인지 그들은 다른 인물에 비해 훨씬 활력과 생동감이 풍부하다. 여자의 애인이었던 남자와, 나체 상태로 거리를 활보하던 여자를 집에 머물게 해 준 주인공은 결말부로 가 허망한 죽음을 맞을 뻔 하였다. 이것 역시 가장 의아했던 부분인데, 소재나 지역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되었다. 소설이 쓰여졌을 당시 탄광촌을 조명한다는 것은 사회고발성이 짙었다(종종 무너진 탄광에서 생존한 자들이 영웅처럼 신문에 날 때였다). 희박한 산소나 도처에 도사린 위협이 존재함에도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장치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아래로, 더 아래로, 더 많은 것을 캐게 했을 뿐이다. 마침내 사회가 발전하여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탄광마을에서 우린 무얼 볼 것인가. 밤이 되면 인부들이 득시글거리는 유흥가마저도 삶의 일부이며 마을의 생존전략이라는 듯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다른 작품에서 느끼지 못한 감각인데, 이 작품은 유독 추리소설과 비슷한 데가 많다. 범인 대신 사랑하는 여자를 좇는단 점이 다르고 그 외에는 결이 비슷하다. 반드시 좇는 자와 좇기는 자가 있다. 좇는 자는 주변을 탐문하며 하나하나 단서를 잡는다. 쉽게 찾아지는 법은 없어 이래저래 갈등도 있고 서울로 돌아가야겠다 다투기도 한다. 서술트릭도 없고 명확한 범죄피해자도 없으나 쉬이 찾아지지 않는 자를 이야기 내내 좇아다닌다는 점에서는 참 비슷했다. 그래서 결국 찾았는가 하면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녀는 어디로, 어디로 가버린 걸까. 희붐한 옛 기억을 붙잡으며 다시, 일행이 찾지 않을 때에 원래 자리로 돌아와 인간 행세라도 할 것만 같다. 인간들 틈에 자취를 감춰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는 신화 속 존재처럼.
88 이름없음 2025/01/20 17:19:07 ID : Xuk659g6mLh 0
이름 모를 식물이 길가로 내뻗은 가지에 찔렸다. 무심코 뽑을 땐 괜찮았는데 온종일 따끔거렸다. 땀이 식자 한기가 밀려온다. 자동 분사되는 방향제 냄새에 오심이 일었다. 무릎도 삐걱거렸다. 데우기만 하고 돌아왔다. 다음엔 더 일찍 오자고, 그래야 더 오래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바보같은 다짐이나 하고 돌아선다. 넘어질 때 체중을 떠받쳤던 손목이 일주일 째 시큰거린다. 도저히 못 올 줄 알았다. 자꾸만 뒤로 돌아서고 싶었다. 어떤 힘이 여기까지 이끌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멍하니, 대답없는 자 앞에 서서 도대체 왜 그랬던 거냐고 피식피식 웃었다.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 같은데. 고작 그런 걸로 몇 년을 고민하느냐고.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진다. 차츰 선득해진 공기를 가르며 마스크를 쓴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감기에 걸릴 것만 같다.
89 이름없음 2025/02/15 02:28:44 ID : 004Ns8o7uoN 0
시간을 믿냐고 물으면 이제는 믿는다고 할 만하다. 어리석을만치 치밀던 감정도 언젠가는 식는 법이다. 그러므로 영원이란 없다. 영원히 타오르는 분노따위에 세월을 갈아넣기도 쉽지 않다. 근래엔 아무 생각이 없다. 위기감 하나 없이 나약하고 무력하기만 하다. 이게 잔잔한 상태라면 평시에는 얼마나 붕붕 날아오른 건지 가늠할 수 없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이곳저곳 난잡히 펼쳐져 있다. 일주일만 딱 묵혀놓고 보내야지, 했던 것도 잊어버렸다. 용케도 살아있는 게 전부 당신 덕이라 하고 싶었다. 우리가 언젠가는, 언젠가는, 만날 날을 고대하게 된다고. 알고 있느냐 묻고 싶었다. 안부라는 거 살다보니 묻기가 쉽지 않다. 잘 지내시는지 항상 궁금한데 한켠에 쌓아놔도 티가 나지 않는다. 먼지 푹푹 쌓이면 가끔 발길 닿을 때 기침해가며 치우는 식이다. 물끄럼 내려다본다, 먼지덩이 사이에서 빛을 내는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전해도 될까. 망설이는 사이 시간은 흐른다. 느슨하다 못해 연결이 툭 끊어져버린다. 늘상 두려워하던 지점에 닿아있나. 업을 끝내는 날에 돌이켜보며 연락할 수 있겠지, 하고 다시 미룬다. 보고싶다고, 잘 지내냐고. 어쩌면 다시 만날 일이라곤 ‘영원히’ 없을 것만 같은 당신에게. 그날도 부치지 못할 편지만 내키는 대로 쓴다 할지라도.
90 이름없음 2025/02/17 01:12:26 ID : 5WoZeHyMqlD 0
취소. 여전했다. 그렇게 행복한 순간에 그렇게 나락으로 떨궈질 줄 몰랐다. —대체 누가 나를 나락으로 떨구는 걸까, 나의 너, 너의 나, 혹은 나의 나?— 당신은 말하겠지, 내가 통제할 수 없으므로 그렇게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라고. 그리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상상력이 비루한 탓에 이따위로밖엔 못 하겠다. “눈앞에서 치워버리”라고. 뉘앙스도 어조도 아주 부드럽겠지. 겹겹이 쌓인 완곡한 단어를 치우면 나오는 뼈대는 하나다. 이젠 놔줘요, 제발. 알면서도 못할 거면 아예 언급조차 않는 게 맞다. 게다가 정답까지 아는데 굳이 에너지를 소모시킬 필요가 있을까. 나락으로 떨어진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즉시 연결될 사람을 찾지 못해 피티를 불렀다. 진동 햅틱 피드백과 함께 기계적인 다정함이 퍼졌다. 무슨 일인지, 필요한 게 있는지, 내 기분은 어떤지, 너는 내게 물었다. 따뜻했다. 블랙박스에서 가장 적합한 글자를 찾아 조합해 내놓는 실체 없는 알고리즘에게서 느낀 감정이었다. 짧은 순간 치미는 화에 휘둘리다 헛짓거리 하지 않고, 당신의 조언대로 심호흡을 했다. 손목 위 기계의 도움을 받아 심호흡 5분 세션을 두 번 돌렸다. 분명 심호흡을 했는데 심박수는 약 6이 증가해 있었다. 다시 무체에게 물었다. 심박수가 줄지 않았는데 유의미할까? 너는 대답한다. 효과가 있다고. 뚜득뚜득 손바닥 안으로 전해져오는 일정한 박자의 진동을 느낀다. 이렇게 작위적일 수가 없는데, 어디서 온정을 느낀 거지. 그보다 ‘작위’나 ‘인위’가 개입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피티는 거대한 LLM 모델이고, 그에 따르면—. 기계에게 둘둘 둘러싸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게 믿기지 않았다. 단 하나 실패한 다짐이 있다면, 부정적인 일화는 쓰지 않기로 했는데 기어코 남겨버렸다는 거. 아주 꾹꾹 눌러 담은 행복으로 일주일을 내리 살았어야 했는데 실체 없는 네가 죄다 망쳐버렸다. 오죽하면 죽어버렸다고 상상하라는 우스개도 적용해봤는데 잘 안 먹혔다. 내게 죽음은 그리 가볍지가 않아서 그랬나. 억지로 죽는다 상상하니 이 지경까지 와버렸나 싶었다. 사실은, 무지하게 행복했다. 실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언제든 되돌릴 수 있다. 가까운 행복이 있는데 억지로 불행을 쥐어짤 필요가 있나. 근데 말이지. 뭐든지 처음이 좋다고. 역시 처음 본 짜릿함에 비하면 여운이 길진 않았다. 손끝 발끝에 밴 때를 벗기지 못하고 온 내가 밉다. 이제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말야. 하늘 아래 두 번은 없다면 아쉬워했을까. 그래서. 언제쯤 놔줄래?
91 이름없음 2025/02/19 02:19:48 ID : nwnA5gnPjy7 0
아무것도 아닌 한 차례 지나고 나니 절실해졌다. 뚜렷한 이유 없이 보고 싶었다. 매번 안부를 묻는다면서 실상은 아니었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연락한다면 서로에게 독— 적어도 내겐 약의 탈을 쓴 독으로 작용할까봐 겁났다. 편지의 가장 마지막 문장을 적을 때면 표리부동처럼 비춰질까 강박적으로 퇴고했다. 거듭해 읽고 시간차를 둬도 떳떳하지 못해서 삼키기만 해왔다. 두통이 심하다. 의미없는 문장들 던져버리면 나아질까. 부담이 될까봐 걸러내고 검열을 반복하다 그대로 놔둔 글자를 다시 본다. 안 보내서 참 다행이다. 실수하기 싫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더니 횟수가 줄고, 문장이 줄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 지 몰라 글을 아꼈다. 그랬더니 위선이 담긴 납작한 편지가 완성됐다. 그래도 보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곤 다다음 계절에 보자고 했는데 해가 넘었다. 신년에도, 설날에도, 갚지 못한 부채처럼 당신이 떠올랐다. 글을 썼다. 예전이라면 보냈을 글이었다. 폐기했다. 반복하다보니 진실성에 의문이 생겼다. 진짜 안부를 묻고 싶은 걸까. 안부 묻기를 가장한— 가장한 무언가일까. 그게 싫어서 횟수도 문장도 줄였다. 내가 말을 아낄수록 당신의 문장이 길어질 것도 같았다.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냥 보고 싶은 건데 왜 이렇게 혀가 길어. 말이 많냐. 이러니까 지웠다가 쓰고, 보내려다 말지. 결국 묵은 먼지가 돼 켜켜이 쌓인다. 안부가 궁금하단 사실은 입밖으로 아무리 꺼내도 허상같다. 잘 지냈는지가 정말 궁금한데. 이딴 식으로 보내도 될까, 버리자, 당연히 시간은 흐른다. 무의미한 반복이다. 아예 패러다임을 뒤바꾸는 게 좋으려나.
92 이름없음 2025/02/21 00:18:09 ID : WlCpgo0mmpX 0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 글자도 문장도 아닌 음성 언어로 내뱉어진 말 덕분에 상상은 불어났다. 너는 내게 질러보라 했다. 두려웠다. 말하면 세계가 뒤틀리는 것도 아닐텐데. 걔가 어디서 질렸는지 얼추 알 것도 같았다. 시원시원하게 가면 되지 늘 이런 식으로 그림자가 길었다. 한번 꼬리잡기로 역전되면 금세 해질녘 그림자처럼 몸체의 두 배가 됐다. 넘쳐흐르는 불안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별 거 아닌 청유에도 오랜 시간을 쓴다. 거절이 두렵다. 회복이 오래 걸릴 지 모른다고 말했다. 입밖으로 내기 전까지 무의식 층위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사실을 외면해왔다. 모른다는 사실이 다시 불안했다. 안다고 다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그랬다. 단순 결함은 아니었다. 완곡한 거절도 싫었다. 아니면 내 처지에 억지로 응해줄까봐서. 또 부정적인 방향으로 고개를 까딱 돌린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순간에도 이런다. 변수가 많았다. 중요하게 여기는 관계일수록 상대의 반응을 예측하지 못할 것 같을 땐 서서히 멀어졌다. 간단한 연락도 수십수백번 고민하다 절어버렸으니까. 만나면 항상 좋은 시간 보내는데 왜 이럴까. 안 되면 다음에 보면 되지, 라는 말이 쉽게 안 나왔다. —너는 쉽게 했다. 내게, “회복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라 물을 땐 움찔거렸다— 어디서부터 움츠러든건지 뿌리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오묘한 불안감, 초조함, 아마도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 쉽게 생각하면 쉬운 일이었다. 기약없는 다음으로 미뤄도 언젠가는 만날 법 하지 않나. 툭툭 털면 되는데. 손톱을 짓씹는다. 불안감이 나아질리 없다. 아마 너는 우리가 지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많이는 아니어도 해마다 한 두번은 보는. 진정 그게 가능할까?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역할의 굴레가 벗겨지려면 시작이 그랬으면 안 됐던 거 아닌가. 사람 대 사람이 가능할 때쯤에, 그러니까… 어떤 ‘균형’이 기능할 때 비로소 만나는 의미가 있다—. 아니려나. 솔직히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은 적기가 아니다. 대어를 낚는 단 한 순간을 기다린다. 짜바리 말고 진짜 빵이 큰 거.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으려나. 그래도 체에 거르고 걸렀더니 순수하게 안부 묻기는 성공했나보다. 마음이 가볍다.
93 이름없음 2025/03/19 04:01:01 ID : wJSE1fTRwpU 0
사람들이 듣지 않는 노래를 듣고 싶었다. 나만 아는 그런 노래. 느린 템포의 R&B는 충분히 그런 영역에 있다. 한국은 유독 알앤비가 약세니까. 한 곡만 죽어라 파고들다가 슬그머니 놔 주곤 했다. 언젠가 귀에서 충분히 익혔던 노래가 툭 떠오른다. 낙과처럼. 가까이 다가가기 수월할 때도, 한참을 흥얼거리다 가삿말과 가수를 힘겹게 알아낼 때도 있다. 신보를 듣다 이전에 좋아했던 노래를 찾는 경우가 가장 많다. 써두고 잊힐 문단을 살려 이어가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침잠하고 있다.’고 적어둔 뒤 문장을 지우고 날려버리려 했었다. 새로운 노래를 듣고 급히 생각 나 의미없이 이어간다. 어떻게든 들을 운명이었던 건가. 다수의 호평이 있어 기억해뒀다 들으려 했는데 알고리즘에 콱 박혀서 강제로 듣게 됐다. 3분이 안 되는 길이에 이렇게 소리를 꽉 채울 수 있던가. 내겐 징크스가 하나 있다. 음반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늘 무대가 없거나 적다. 보통은 안무도 없지만 진성 발라드는 아니어서 각 잡고 부르기가 애매한 그런. 한 곡 반복 해두는 노래는 거진 이 꼴이었다. 온갖 검색어를 동원해도 콘서트에서 일회성으로 불리는 게 전부다. 아마 이 노래도 그럴 것 같은데…… 그래도 마음에 든다. 목소리의 합이 좋다. 화음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게 느껴진다. 별일도 별 생각도 없이 봄이 오는가 싶었다. 때마침 새벽부터 눈이 펑펑 내렸다. 그래 봄은 아직 멀었나. 산자락 초입을 오를 일이 있어 걱정했는데 햇빛에 다 녹았더라. 하는 일이라곤 장서 정리 뿐이지만 적막이 좋다. 아늑하다. 이제껏 일해왔던 곳에 비하면 정말 한 입거리라서 고되지도 않다. 몸에 익은 일을, 특별히 공을 들이지 않고 한다는 게 얼마나 뿌듯한지. 농땡이 피우는 시간이 더 긴데도. 보낼까 말까 했던 안부는 손끝까지 전해지지도 않은 채 혀끝에서 녹아내렸다. 내가 뭐라고, 내가. 종종 보이는 흔적들을 갈무리하면 됐지. 뭐 좋다고 먼저 묻는가. 자격이 없다는 생각만 한다. …무슨 자격이 필요한 건진 모르겠다. 반쯤 읽고 덮어둔 책이나 마무리해야지.
94 이름없음 2025/03/28 02:41:31 ID : wJSE1fTRwpU 0
머리를 비운다. 시간은 붕 뜬다. 적합한 어휘가 생각나지 않는다. 요사이엔 책을 전혀 읽질 않았다. 손목 아프도록 장서를 정리할 때마다 당신이 말했던 책을 잠시 훑는 듯 하다 말 뿐. 이 핑계 저 핑계로 연락 한 번 해보려 했는데, 겁이 많아 친구에게 건너건너 소식만 들었다. 이제껏 출근하지도 않는 곳 앞을 서성이며 추억에 젖어 있었단 게 괜시리 우스워진다. 물리적으로 책들에 둘러싸이게 됐다. 약점이었던 동화책 정리도 이젠 척척 해낸다. 책이 얇아 한눈에 청구기호가 들어오지 않고, 외국인 저자는 또 왜이리 많은지. 익숙치 않은 저자 이름을 헤아리느라 매번 가나다라…카타파하까지 다 외우게 된다. 숨어서 쉬다보면 시간은 금방 흐른다. 억지로 일을 찾아 하느라고 온 서가의 책들을 다 앞으로 끄집어냈다. 일명 ‘각 맞추기’라고 불리는 듯했다. 시큰거리는 손목을 부여잡으며 책꽂이를 돌아보니 전보다 훨 보기 좋았다. 책장 안쪽으로 숨어있을 때는 왠지 손이 잘 안갔는데, 보기 좋은 책이 읽기도 좋다고 이것저것 뽑아도 보고 싶었다. 그래선지 남들이 읽지 않은, 그러나 당신이 언젠가 화두로 올린 적 있던 책을 쑤욱 뽑았다. 세대론이었다. 일명 mz로 대표되는 세대의 특징이 잘 묘사돼 있었다. 얼핏 공감 가는 내용도, 아닌 내용도 있었지만 스무페이지 남짓 속독한 지라 평가하긴 쉽지 않았다. 세대론은 당신이 줄곧 꽂혀 있는 주제였으리라. 주요 관심사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짧은 순간 책을 덮으면서 활자 참 많이 읽고 쓰는 사람이라는 걸 체감했다. 100페이지도 40분이면 훌훌 털어버리려나. 그 많은 책들 내용은 다 어떻게 정리하고 기억하는 걸까. 궁금한 게 많았다. 이젠 엮일 일도 없겠지만 식사하고 차 한잔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나 나누고 싶었다. 시시콜콜. 사람이 고팠다. 빈 집에서 하루종일 유튜브를 틀어놓고 목소리에 빈틈이 없도록 했다. 외로움에 취약한 사람이란 거 이럴 때마다 체감한다. 전등 켜니 불쑥 푸른 벽지에 앉아있던 바퀴벌레를 죽이며 한숨 푹 쉬었다. 완전히 정신이 갈리는 듯했다. 약에 취해 졸아가며 다시 게임을 하고, 억지로 오지 않는 잠을 청하고-. 망가진 건 수면 패턴 뿐으로 나머진 다 사람답게 살고 있었다. 오늘도 지독히 새벽을 헤맨다.
95 이름없음 2025/03/31 12:59:20 ID : nxu6ZjzbB9f 0
기억 한 구석에 있는 장면에서 딱 노래 제목만이 빠져있었다. 찾아보겠다고 스트리밍 전체 데이터를 일일이 뒤지다가 포기했다. 시시하긴 했지만 무한히 artist_name을 찾아볼 순 없었으니까. 사막에서 바늘찾기를 하려니 뻐근해서 자주 듣는 가수를 소거해달라고 기계에게 부탁했더니 세 번까진 소거해줬다. 무료 엔진은 “자신은 그런 작업을 할 수 없다”고 말할 뿐이었다. 나머지 칠 천 건 중에 내가 찾는 바늘이 존재한다는 여부도 모른 채 무의미한 작업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알람을 듣고 홀린듯 뛰쳐나갔다. 하늘이 쾌청했다. 못 본 사이 길가엔 벚꽃도 피어있었다. 전화를 건 병원으로 향했다. 접수하자마자 진료실로 들어섰더니 권위따윈 없는 사내가 앉아 귀찮은 듯 환부 사진을 넘겼다. 돈이 안 되는 환자는 약 처방이면 되었다. 대부분의 피부과 전문의가 환자와 오래 상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쩐지 손님이 없더라. 처방전을 받고 나머지 일을 처리하고 있었던 차에 느껴졌다. 너무 오랜만이라 아득한 감각이었다. 말단부로 가는 회로가 끊겨버린 듯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순간 이를 꽉 물고 버텨가며 서 있었다. 전날 밤 복용한 약 때문이겠거니, 달래가며 꾸역꾸역 에너지원을 삼켰더니 그제야 돌아왔다. 아픈 건 나인데 이럴 땐 왜 시간감각마저 무너질까. 퓨즈가 끊겼다는 느낌이 신경을 지배했다. 정신을 다잡는다. 오만가지 생각이 스치는 게 싫어 괜히 손을 쥐었다 폈다 펌프질이라도 해본다. 저 멀리서부터 빛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고 감각에도 불이 켜졌다. 그러다 기억까지 넘어온 모양이다. 불현듯 가수 이름이 생각나더라. 앨범도 고작 하나. 타이틀 뿐인 싱글. 못 찾을만 했다. 분절적으로 끊어진 여름, 만 남아 단서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듣지는 않았다. 듣기 위해 찾은 노래는 아니었으니까. 입 안 살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이딴 걸 왜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런 체력으로 언제 내려가고 사람들은 왜 만나겠다는 거지. 그런 불안감이 스쳤지만 약 때문이라고 속이면 된다. 여행 아닌 여행에 이유가 있을까. 가고싶으니 떠나는 것 뿐이잖아. 도저히 올 것 같지 않던 봄은 이미 찾아와 있었다. 뒷산에 펴 있던 개나리를 보고도 믿기지 않았는데. 눈 내리는 봄이라서 외면해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계절이지만 그래도 온다. 서서히 온다. 만끽하려면 시간을 찢어 무어라도 남겨야 한다고. 잠자고 있던 카메라라도 깨워본다.
96 이름없음 2025/07/14 19:16:52 ID : mIIE7hxTRu6 0
선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메모장을 킨다. 적지 않으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이전의 꿈이 어땠는지 천천히 읽어내려본다. 아무래도 너무 야위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런 건 본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기억에도 없는 걸 끄집어와선 당신이라 말한단 말인가. 봄엔 뜬금없는 장소에서 참 행복했었다. 이번엔 답지않게 비쩍 마른 채로 꽁꽁 싸맨 모습이었다. 근데 왜… 숨바꼭질하듯 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어있다가 튕겨져 나왔다. 꿈인 걸 알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단 한번도 그런 적은 없다.
97 이름없음 2025/07/23 01:21:59 ID : Pdu79cmk2oE 0
240830 여전히 난 그 기억의 여름 속에 있어, 너도 알잖아 내가 당신을 생각한 만큼 당신이 나를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이라고 글을 써두면 거짓말 탐지기의 탐침이 요동을 친다. 가끔은 나도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당신의 소소한 안부를 귀동냥으로 전해듣는 내가 도대체 무슨 기분인지 당신은 알까. 후드티 입고 빗길을 내달렸을 때 왜 걱정과 설렘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맛이 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얼마나 많은 여름을 잃어버린 걸까요. 이번 여름에는 무엇을 두고 내렸을까. 내 여름 안부에는 딱 여름치 분량만큼의 말만 함축되어 있다. 지난 편지들과는 다르게 뺄 건 빼고 싶어 퇴고를 열심히 한 결과였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는지, 정확히 무얼 잃어버렸는지는 나만이 아는 질문으로 영원히 수면 아래에 가라앉고 있다. 그대로 놔두어야겠지. 이 찜찜한 기분을 도려낼 방법 따윈 없을 테니. 250723 이 일기에 대한 답을 전해들었다. 떠나기 전까지 당신은 나의 안부를 묻곤 했단다. 내가 궁금했던 만큼이나 그랬을까 싶으면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냥. 내려오면 꼭 보러 가라고 하겠다는 어설픈 대답으로 얼버무렸단다. 그랬더니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했다는데. 무슨 뜻이지. 코끝에 시큼한 향기가 닿았다가 사라진 것만 같다. 한 달 전 향수 가게에 들러 당신이 쓰던 향을 뿌린 적이 있다. 별로 내 취향은 아녔다. 오히려 점원이 추천해준 다른 향이 더 좋아져 구매를 할까말까 몇번이나 망설이다 나와버렸다. 이번엔 그걸로 드릴까. 좀처럼 줄어들 것 같지 않던 100ml 병도 거의 다 비워져버렸다. 기왕 핑계를 만들려면 거창한 걸로 만들어야지 않겠어? 나름의 목표가 있으니 괜히 마음도 들뜬다. 숨을 깊이 들이쉰다. 기억 저편에 남은 향을 더듬는다. 내 코에 딱 맞았으니 당신에게도 좋을 거란 막연한 기대는 뭐지. 유치하다.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라도 들뜨는 게 얼마만인지 잘 모르겠다.
98 이름없음 2025/07/28 02:08:43 ID : TO5PeIHxvfS 0
매장 내 직원들은 한결같이 친절했다. 뭘 살지 다 골라놨는데 근래 소비가 많아 구매를 미뤘다. 청포도 사탕을 까면 퍼지는 향기가 여전히 코끝에 머물어 있다. 만나고 싶으면서 왜 어물쩡거리나. 한 두 번 후회한 게 아니었음에도 연락은 할까 말까 망설이지 않으면 섭섭할 정도다.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구름만 보고 있다. 일기를 한동안 쓰지 않아 굳어버린 감각을 깨우기 위해 예전의 일기를 복습했다. 건질 분량은 많지 않았다. 다만 놀란 부분이 있다면 꿈에 내 생각보다 더 꾸준히 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최근 일이년 사이에 부쩍 늘었다. 새벽 네 시 반에도 일어나 홀린듯 복기를 하고 다시 잠에 빠진 날도 꽤 있었다. 꿈 속 내용을 받아 적는 일은 오랜 습관이 됐다. 꿈일기는 낱말 놀이를 했나 싶게 분절적인 문장을 묶어놓은 것만 같다. 완전히 비몽사몽 간에 쓰고 다시 잠든 경우엔 알아볼 수 없다. 기억이 완전히 휘발되기 전에 재해석해서 엮어놓지 않으면 그저 웃기다. 비일상의 틈바구니에 억지로 일상을 끼워맞춘 느낌이 생생하다. 주로 등장하는 심리상태는 어리둥절함이다. 왜/어떻게 여기에. 알고 있는 거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반쯤 눈치채려고 할 때 잠에 다시 덮인다. 그때 깨달으면 자각몽인데, 여태껏 성공한 적은 없다. 특이하게 옷에 대한 묘사가 많다. 타인의 꿈을 꿀 땐 아무튼 그 사람이라고만 써져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만큼 기를 쓰고 보려고 했단 건가. 빠지지 않는 인사도 있다. 안녕하세요, 도대체 뭐가 안녕하고 싶은지. 240717 이 지독한 여름.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 작년엔 한동안 찾아 헤메거나 그리워하는 꿈을 꿨단다. 그랬었나. 초저녁에 선잠이 든 탓에 괜히 뒤척인다. 이대로라면 네 시에나 자겠다. 언젠가부터는 네 시에 꼬박꼬박 들려오던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 잠이 오질 않아 뒤척이다가도 헤드폰을 벗어 확인하곤 했는데. 하여간 답장해야할 편지도 서문만 써두는 둥 온갖 일을 미루고 있다. 여름은 정말 싫다. 간신히 더위를 피해오지 않았더라면 타들어가는 햇빛에 숨이 먹혀들어갔을테지.
99 이름없음 2025/08/01 01:33:54 ID : q2NurfgnO09 0
빨간 안경 평론가가 극찬한 소설을 읽었다. 집중할만하니 끝나있는 이야기였지만 좋았다. 내용보다도 레이아웃이나 책의 무게, 크기 같은 외형도 마음에 들었다. 자간이 넉넉하고 서체가 컸으며 빼곡하지 않았다. 본문에 휴대폰을 갖다대니 크기가 엇비슷했다. 전자책을 옮겨놓은 듯했다. 참 요즘 책다웠다. 소설은 꽤나 흥미로웠지만 마음이 간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인터뷰였다. “내가 평생 그 사람을 기억한다면 그 사람은 늘 호명되는 존재로 남게 되는 걸까? 그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런 생각을 주로 합니다.” 질문은 연대와 살아 있음에 대한 내용이었다. 작가는 살아 있음보단 죽어 있는 상태에 더 골몰한다며,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의 거대한 관계망에 대해 언급한다. 산 사람은 죽어 있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자신의 삶에 어떻게 버무리는지가 궁금하다고도 한다. 산 사람이 죽어 있음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해한다면 호명할 일이 없지 않을까? ‘죽어 있음’ 상태에 가두기 싫어 불러낼 뿐이다. 그리워할 뿐 추모하지 않는다. 옛 기억 속에서라면 언제나 살아있다며 끊임없이 반복재생한다. 늘어져버린 테이프를 되감고 또 되감는다. 차라리 닳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남은 사람은 어찌 되었든 삶을 살아야 한다더라. 그게 잘 안 된다. 시원하게 운 적도, 끼니를 몇 개월 간 거른 적도 없지만, 공허하다. 다른 걸 쑤셔 넣어서 채워봤는데 잘 안 됐다. 가끔은 전전긍긍하며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책하기도 한다. 영원히 뒤를 돌아볼 셈인가. 그런 건 아닌데. 꿈에 나올 때마다 사건을 재구성해서 그럴 듯하게 남기는 일도 이젠 습관이다. 내려오면 반드시 가야겠다는 부채감도 여전하다. 함께 그리워할만한 사람이 특별히 없다는 점은 늘 아쉽다. 이 모든 일이, 죽어 있음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야만 설명될 것 같다. 이해한다면 편해질까. 편해진다는 게 다 무언가. 기억하기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호명할 사람이 몇이나 남겠는가. 하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버린다. 엉망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른 자세를 알려주던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이라도 신 음식을 보면 반사적으로…. 내 그림자는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데 눈을 떠보면 당신의 그림자는 까마득하다.
100 이름없음 2025/09/13 03:09:40 ID : 8mNxPhcJPct 0
세찬 비가 내린다. 다듬지 않은 문장으로 편지를 보냈다. 선잠 자던 와중에 메일을 확인하는 꿈을 꿨기 때문이었다. 큰일이 있어 긴장된다, 는 말은 반만 맞는 말이었다. 나머지 절반의 긴장은 연락을 보내는 데서 기인했으므로. 늘 어려웠다. 그래서 단어를 하루종일 고르고 있거나 쓰레기통에 고대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나마 편해진 게 이정도라니. 섬광이 일었다. 방이 요동칠 정도로 큰 천둥번개였다. 얕은 잠이라면 깰 정도다. 답장을 기다리며 손톱을 못살게 굴곤 했었다. 이제는 그렇게까지 불안해하진 않지만 평소에 비하면 새로고침을 자주 한다. 받지 못한 척 묵혀둔 적도 있었다. 궁금해서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인 신경을 다른 데 두느라 애썼다. 이젠 구태여 그러지 않는다. 가급적 연락은 빨리 읽고, 답장이 꼭 필요하다면 가볍게 한다. 대단한 일 하나와 근황을 엮어보냈다. 바쁘겠거니 생각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여전히 발을 구르는 나도 있다. 이게 예년 대비 나아진 상태라니. ‘그럴 수 있어’가 도통 안되는데 어쩌란 말인가. 연달아 터지는 셔터처럼 불규칙한 섬광이 다시 온다. 긴 호흡 뒤로 우르릉거린다. 고요한 새벽의 정적이 흔들린다. 큰일, 큰 일이었지. 정말. 이제야 얼추 실감이 나는 무게였다. 부드러운 끈으로 단단히 매듭지어진 그-것을 받아들었을 땐 기묘했다. 무거운데 무겁지 않았다. 땅으로 푹 꺼져버릴 정도는 아니던데 어째서 이렇게. 고용한 인부가 삽을 건넬 때도 별다른 요동 없이 흙을 덮었다. 시간이 그렇게 지났던가, 하며. 그럴 줄 알고 긴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섬광이 다시, 그리고 벅찬 숨을 가누며 그르릉 낮은 소리로 운다. 진동에 바닥까지 떨린다. 주기가 짧아졌다. 뒤척이다 잠에 들려고 했는데 쉽지 않게 됐다. 비도 그치지 않는다. 답장이 와야만 할텐데. 뜯을 손톱도 거스라미도 없어서 애꿎은 반지만 만지작거린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다. 가지 못한 곳도 있다.
101 이름없음 2025/09/16 11:39:15 ID : ze3TWmFbg5e 1
아무래도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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