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기판 자주보는 스레 적는 뻐꾸기들 2판 (275)
2.추구미도달스레 (138)
3.이루어지게 해주세요 (1)
4.생각나면 쓰는 일기 (112)
5.작은 연결 (69)
6.여자어른 로망기 (226)
7.무제 (31)
8.귀찮음 러버가 사회로 나가고 싶어한다 (38)
9.고기 (49)
10.매일이 리즈인 넌 기분이 어때 (202)
11.55 (221)
12.우주미아 (388)
13.세상의 모든 덧없음을 사랑하며 살기 (12)
14.행복해지기 위해 쓰는 일기 (16)
15.생각들 (234)
16.전 역 한 달 전 (384)
17.始 (60)
18.약을 먹자 약을 먹자 약 약 약 (628)
19.일기 (85)
20.키위 사촌은 다래🥝 (460)
1
이름없음
2024/02/09 21:49:38
ID : vBcMi6Y9y43
10
세상이 끝나기 55분 전이래요, 다들 뭐하실 거예요?
맞은 편에는 나를 꿰뚫듯 노려보는 태풍의 눈이 있었다.
눈싸움하느라 힘겨웠다.
베스트 레스 3
이름없음
2024/02/15 22:11:13
ID : vBcMi6Y9y43
1
언젠가 글을 정말 흐르듯이 쓰고 싶어서 말하듯이 쓴다는 내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글을 읽을 때나 쓸 때 80%의 확률로 묵독을 병행하는데, 그러다 보면 글이 튄다. 뜬금없이 흘러나오는 다른 마음까지 치밀어서 그대로 받아 적는 느낌이 된다. 불현듯 춥다거나 배고프다거나 글의 전반적인 주제와 상관없는 곁가지가 치고 나올 땐 퇴고하면서 잘라낸다. 말하듯이 쓴다는 것에도 장점이 있다면 큰 걸림이 없는 글이 써진다는 점? 물론 나는 내 글이므로 애정 가득한 눈으로 봐서 그리 보일지도 모른다.
아 진짜 애플 비공개 릴레이 켜지면 작성 안 되는 거 어떻게 안 되나. 별은 달기 싫고 글 날아가서 부분 복사만 됐다;
이름없음
2024/05/20 04:55:09
ID : mIIE7hxTRu6
1
물가에만 다녀오면 파랑 생각이 난다. 튜브에 온몸을 기대고 어느 먼바다까지 가려나 걱정이 돼 시선 끝에 고정시켜두었던 그 여름. 송어가 종종 기생충을 쫓기 위해 펄떡펄떡 수면을 박차던 장면을 함께 보던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는 말을 했더니, 그들은 참사랑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랑이란 말 이렇게 쉽게 써도 되는 걸까? 싶어 큰 목소리로 웃었는데 일기를 쓰다보니 뒤미처 깨닫는다. 이런 감정도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거지.
4월의 마지막엔 거짓말처럼 당신을 만나러 갔다. 늦기 싫어 미리부터 가서 동네를 둘러보고 일하는 곳 근처의 카페에 자리를 잡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흐름이 끊겨도 아쉽지 않도록 단편소설집과 필사 노트를 펼쳐놓고 자주 듣는 트랙을 들으며 집중하고 있었다. 좋은 문장이 많았다. 느티나무와 버스정류장, 사찰, 그리고 여름을 그려낸 잔잔한 분위기의 장면은 아직까지도 상상한 심상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초조한 듯 설레서 발을 떨었고, 가방 뒤에 숨겨둔 선물은 재포장하며 잘 챙겨왔는지 몇 번이나 다시 살폈다. 그때는 하나 놓고 왔다고 아쉬워했는데 실제론 깔끔하게 다 챙겼었다.
두 편 반 정도를 읽었을 무렵 왼편의 출입구로 파랑이 걸어들어오며 두리번거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반가운 인사를 나눴지만 살짝 어색한 기류는 감춰지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작년 여름에 봤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충 마실만한 것을 사시길래 쭐래쭐래 따라갔더니 식사대용 빵 종류를 하나 사주셨다. 이미 배불렀지만 맛있게 먹었다. 이야기는 별 거 없었다. 바쁜 일을 정신없이 해치우고 온 파랑과, 느긋하게 오긴 했지만 침착하지는 않은 나의 주파수가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잡음이 껴 있었다.
그래도 근황을 나누고 얼굴을 보니 매우 좋았다. 나갈 때가 되니 분위기도 풀려 제법 말랑말랑해진 상태였다. 새로 리필해온 물까지 바닥이 날 때쯤 산책을 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셔서 승낙했다. 상쾌한 건지 조금 축축한 건지 제대로 분간하기 힘든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의 날씨였다. 낮엔 까딱하면 더웠고 비가 오면 언제 여름이었냐는 듯 일교차가 심해 변덕이 죽 끓듯 하던 날들이었다. 다행히 아침부터 흐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약간 찝찝한 정도의 습기가 있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사실 날씨는 크게 상관없었다. 밤이었고, 함께 걷는 사람의 반가움이 나의 마음까지 넘실거려 왔으므로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초록불로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내딛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코너를 돌자마자 보이는 언덕에 바로 경쾌함이 무너지기는 했지만, 보이는 것보다는 오르기 쉬운 축에 속했다. 동네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던 것은 생생하다. 다만 나의 엄살이 그 정적을 깨트리자 그가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다며 웃었던 게 떠오른다.
좋은데요, 괜찮은데요!
나는 가쁜 숨을 밭으며 맥없이 좋다는 말만 반복했다. 실제로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어렵다기보단 빡센 느낌이었다. 짧고 굵게 경사도가 높은 느낌으로 산 넘어 산처럼 구성된 길이라 다 왔나, 싶으면 장난처럼 한 번 더 거슬러 올라야 해서 웃었다. 웃겼다. 차 없이 오르는 건 파랑도 오랜만이라고 했다. 그는 길도 모르는 나의 뒤를 받치며 함께 올라왔다. 주춤거리며 동 앞에서 기다리려는데 들어오라고 하셔서 얼떨결에 집까지 구경했다. 티비 대신 한쪽 벽면 전체를 점유한 서가에 먼저 눈이 갔다. 이사를 다니며 줄이고 줄인 책들은 마치 정수精髓처럼 느껴졌다.
놀랍게도 한국 작가의 취향이 나와 많이 겹치길래 몇 권은 탐나기도 한다고 장난스레 웃어보였더니, 파랑은 파트너가 주로 읽는다며 소개해주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이 가득했고, 구석에는 헤어질 결심 각본도 있었다. 어정쩡히 서 있는 동안 바삐 움직이는 파랑은 도대체 무얼 하는지 궁금했다. 이것저것 챙겨오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취향이 이렇게 겹칠 수도 있구나 감탄하며 거실에서 손떼가 묻은 책들을 눈에 담기 바빴다. 어수선하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정렬은 확실히 되어 있는 공간이었고, 그게 누구의 손길인지는 함부로 단정할 수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귤까지 꺼내오시는 걸 막지 못했다. 괜찮다고 아무리 손사레를 쳐봐도 씨알도 안 먹혔다. 뭘 이런 걸 다 들고 와요, 라는 말만 해주셨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드린 것 이상으로 되돌려받아서 손이 무거웠다. 지하주차장을 잠깐 헤매다가—차를 매일 끌고 나가면 잘 알텐데…—가벼워진 몸으로 뒷산을 올랐다. 저번 여름에 내가 그랬듯, 파랑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지명에 숨겨진 설화를 알려주었다. 뿌듯함이 숨결 끝에 묻어나왔다. 그 설명을 듣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을테지.
나무데크를 턱턱 밟아나가며 한없이 높은 건물에서 빛나는 조명이 별처럼 보이는 장면도 눈에 담았다. 이토록 조용한 산책길이 집 뒷편에 있다는 게 내심 부러웠다. 파랑은 요새 뛴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 매일 나가지는 않겠지만, 통통 뛰며 앞뒤로 날개를 펼치듯 팔을 휘젓는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밀려나왔다. 얼마나 뛰는지, 어떤 운동화를 신는지 물어볼 걸.
어디선가 흘러오는 꽃향기를 라일락향이라고 알아채는 모습이 좋았다. 하이라이트처럼 제일 매료된 순간의 리플레이를 뽑아낸다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근 한 달 간 헬스하고 돌아오면 늘 깊은 경사가 있는 내리막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유는 오로지 화단에 핀 라일락의 나뭇가지를 손으로 살짝 내려 폐의 가장 깊숙한 부분까지 향을 쌓아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핀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나누다 라일락인 걸 바로 깨닫는 게 신기했다. 활짝 핀 꽃과 함께 5월이 성큼 다가섰다. 등꽃도, 그 사람도 아니었지만 반 정도는 맞춘 셈이다. 라일락의 파랑이라 어쩌면 더 좋았다. 지위나 역할에 귀속되는 대화가 없었으므로.
짧은 만남은 함께 오른 언덕과 엇비슷했다. 반가움이 끝날 때쯤 되니 산책과 라일락으로 한 번 더 설렘으로 환기되며 변주됐다. 투정 아닌 투정을 서로 부리고, 작년의 일을 떠올리고, 다음 여름을 기약하는 일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별다른 임팩트가 없던 일상에 강력한 방점으로 찍혀 있다. 그때의 감각을 머릿속의 영상으로만 남겼다면 전부 휘발될까봐 황급히 옮겨적었더니 아직까지 생생하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귀결되는 취향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들에 자석처럼 끌려다니는 지 휘갈기며 적어둔 문장들은 너무나도 적확하다. 떠오르는 얼굴들의 생김새가 일정한 게 아니었다. 추출해 뽑아둔 특징을 이리 대보고 저리 대보면 개연성이 생겨났다. 이래서 좋아하게 되었구나. 색다른 순간에 꽂히면 그 이후로는 프리즘을 갖다 대고 분광했다. 내가 그들과 기억하는 비중이 다른 이유도, 여행이 끝나자 파랑을 기억하는 데에만 용량을 써서 그랬던 거였다.
‘진짜’ 여름을 손꼽는다. 땀이 삐질삐질 흐르다 못해 손수건 없이 나갔다가 후회하는 그런 여름, 몸의 어느 부분들은 조금 더 날렵해진 채로 파랑을 다시 만나러 가고 싶다. 그래도 닭가슴살 한 끼에 두 덩이는 진짜 못 먹겠는데, 만나기 이 주 쯤 전에는 완전 무탄수를 해야할 지도 모른다. 단백질 덩어리 우걱우걱 씹으면서 올리브유 삼키고. 바라고 바라는 진짜 여름은 쉽게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두 세뼘 정도는 성장해야 한다, 이번엔 정말로.
어떻게 하면 더 잘 듣고, 더 잘 쓰고, 더 잘 이끌 수 있는지 아직까지도 감이 안 온다. 감을 잡진 못해도 무언가 이뤄낸 타이밍 이후에 볼 수 있겠지. 그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길고 긴 하천변을 따라 함께 뛰게 될까. 그러잖아도 심장은 열렬히 일하겠지만.
보고싶다, 누가 보고싶은지 한참을 생각해도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어 이게 외로움이구나, 실체를 보고 있다. 수면패턴도 망가져서 꿈이 현실보다 더 현실같을 때가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대해 예측하는 장면이 나온다거나, 강렬한 감각이나 감정을 느껴 땀에 절은 채로 깨치는 일이 잦아졌다.
분명 다른 글을 쓰고 싶었는데 밝은 장면을 쓰다 보니 어떤 어두움을 묘사하려 했는지 잊었다. 그러니까 하여튼, 보고 싶다. 그리고 당신 말이 다 맞다. 뒤돌아 앉아 달의 뒷면에 골몰할 필요는 없다. 지구에선 무슨 짓을 해도 보이지 않고 닿지도 않으니까.
이름없음
2025/09/16 11:39:15
ID : ze3TWmFbg5e
1
아무래도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102
이름없음
2025/09/19 12:56:24
ID : LhzgmILamra
0
바다를 건너온 편지처럼 시일이 지나서 온다고 생각하면 편할까. 차라리, 늦게 온다가 아니라 늦게 전해진다고 상상하면 좋을지도 모른다. 이럴 땐 줄만 그어진 단출한 편지지를 사서 손힘 팍팍 써가며 적어내려가고 싶다. 흔하지 않은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놔두는 거다. 일 년이 지난 후에 도달하는 것까진 아니어도, 제대로 수신되기까지는 한 달 남짓 걸리는.
문구점에서 산 삼백 원짜리 플러스펜 뚜껑을 열고 펜촉이 훼손되든 말든 제멋대로 적어내려간다. 수성이라 수정테잎도 먹히지 않고 울어버린다. 오탈자가 나오면 두 줄 긋든지 새로 써야만 한다. 곧바로 찢으면 편지 내용이 망가져버리므로, 눈앞에 두고 마음에 안두는 구석만 고친 뒤 다시 쓴다. 하여간 손편지 자체의 매력이 있다. 전해지지 않아도 마음을 털어버리는 효과가 있다. 전해진다면 너무 털어놓지 않도록 신경써야 한다.
가장 최근의 편지는 바다가 아니라 시간을 건너 온 것이었다. 뭐라 적혀있을지 몰라 아직까지도 봉해두고 있다. 2년을 거스르자고 했던 것 같은데 눈떠보면 두 배가 될지도 모른다. 딱풀을 받아 지역특산품 우표를 붙여 보냈다. 아이들이나 쓸법한 싸인펜으로 꼬박꼬박 칸을 채운—. 비가 오던 날이었다. 돌아가는 길엔 택시도 잡히지 않아 우비를 껴입고 웬 밭을 건너 숙소로 향했다.
그땐 그랬는데, 힘들어야 추억이 된다고. 카메라를 동여주던 끈마저 어느새 풀릴 정도로 고됐다. 정말 이 길이 맞는건지, 풀은 왜 그렇게 무성했던 건지. 한참을 헤매다 큰길이 나왔을 때에야 안도했다. 그런 여름이었는데, 그 편지에 대해서는 잊어도 큰 타격이 없었는데. 왜 메일은 바로 전해진다 믿는가. 내려놓으면 긴장이 낮아질 것이다.
103
이름없음
2025/10/04 10:18:30
ID : oNy3PbgY2sq
0
어떤 심정일까? 그렇다면 내 바람은 너무 무거운 거 아닐까.
104
이름없음
2025/10/05 02:28:06
ID : 6mFjwNAkoE1
0
240411
빛의 호위, ‘산책자의 행복’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좋겠구나.
라오슈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어떤 언어가 라오슈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걸까요. 행복한가요, 라오슈? 제가 라오슈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사실 그뿐인데, 오늘도 저의 타전은 무력합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라. 회신이 오지 않을 타전을 보내는 것조차 그런 감각이란 건가. 이파리는 영원히 꽃을 그리워할텐데, 그걸 어떻게 예지했단 말인가. 석산의 철이다. 도시에는 없고 본가에는 유독 잘 보인다. 수목원까지 멀리멀리 찾지 않아도 흔히 피어 있다. 볼 때마다 놀란다. 꽃잎이 없는데도 다른 꽃만큼 화려하니까.
어릴 적 좋아했던 애니메이션 엔딩곡에서 석산을 처음 알게 됐다. 일본에서는 특히 더 “죽음”과 연관이 짙은 꽃이랬다. 작중에서도 죽음과 사랑이라는 테마를 동시에 품은 캐릭터의 상징물이었다. 강렬한 빨간색이 화면 가득 채워지고, 관람차 풍경이 교차하다가도 다시 꽃망울이 보이는 식이었다.
석산. 꽃무릇. 상사화. 부르는 이름이 다양했다. 다른 꽃들과는 달리 이파리가 먼저 피는 바람에 꽃을 볼 수 없어 상사화란다. 어떤 목소리였는지는 이미 휘발되어 날아가버렸다. 같이 발맞춰 걷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바람에 표정도 잘 모르겠다. 머릿속이 정돈되지 않아 바보처럼 대답을 내뱉어버렸던 건 아직도 부끄럽다.
초가을의 선선한 기온, 구름이 낀 날씨, 대화 내용. 멀어져갔던 차의 기종이나 번호판 같은 세세한 내용들은 전부 기억나는데 얼굴 표정과 목소리가 없다. 옷차림도. 아마 코트 같은 거였을텐데, 꽁무니가 길었으니까. 게다가 꽤 쌀쌀했다. 죄다 일기로 남겨놔 몇 번이고 돌려봤다. 구간반복처럼. 그러고 한동안 벙쪘던 기억이 난다. 그날은 한동안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같이 나왔는지, 어쩌다 그런 심오한 말을 흐르듯이 말했는지, 왜 그걸 아직까지 곱씹는지. 의문투성이다. 다른 주제를 들고 오고 싶어도 꽃무릇만 보면 정지된 채 그날로 되돌아간다. 이렇게라도 호명하면 살아있는 셈 칠 수도 있으니. 누구라도 잊지만 않으면 될 뿐이니까. 뭐 그런 흔해빠진 타전이다.
근황이 궁금하다, 그냥. 잘 지내는지. 행복하거나 평안한지. 어떤 시간 속에 사는지. 내가 모르는 “라오슈”가 아닌 당신께선 어떤 사람이었는지. 광야 말고 좋아하는 다른 시는 무언지. 특별히 즐기는 취미가 있었는지.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물음이 마구마구 떠오르다 꺼져버린다. 손가락 바삐 움직여가며 모스부호 찍어도 회신은 우주배경복사의 노이즈로만 돌아온다.
여전히 낮엔 덥고 습하다. 석산이 폈는데도 여름과 가을 경계선에 서 있다. 해가 뉘엿뉘엿 져 갈 때 쯤에야 옷깃을 여미게 된다. 눅눅한 방이 싫어 에어컨은 돌아가고, 귀뚜라미도 울고, 시간은 흐른다. 교정엔 우리가 걸었던 길과 화단이 전부 갈아엎어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정경은 그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기억하지 않으면 모두 변해버리는 거다.
첫 차로 중고차를 사다 막 굴려버리고 폐차할 거라면 당신께서 몰던 차를 타볼까 싶어 한참 검색해본 적도 있다. 오래된 모델이라 백 만원이면 정말 굴러가는 차를 구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그리움이 차고 넘치는 게 싫어 그리 할지도 모른다. 운전이 능숙해질 때까지만 타고 보내주면, 어쩌면, 그때에는 정말 덜 그리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105
이름없음
2025/10/06 15:55:12
ID : 6mFjwNAkoE1
0
더 이상 오지 말라는 전언일까, 정말로.
이번에도 똑같은 다리를 크게 접질렸다.
106
이름없음
2025/10/10 01:40:16
ID : 6mFjwNAkoE1
0
어떻게 내가,
바짝 긴장했다. 차와 사람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안그래도 긴장하고 있었는데 독대도 아니었다. 조수석에 앉은 채 오른쪽 다리를 떨었다. 운동복 차림으로도 갔으면서 괜히 입성 따위를 신경썼다. 심장이 뛰었다.
정말 잠깐 이야길 나누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5분도 안 되는 길이었음에도 필연적으로 바보같은 선택만 했었다. 움푹 꺼진 도로를 못 보고 밟았으니 내 탓이지 누굴 탓하겠냐마는.
집으로 돌아와 꽂힌 언어에 생각이 지하로 한없이 꺼져버렸다. 쿵하고 뭔가 내려앉는 듯했다. ‘(너는) 이제 더는 가지 말아야겠다’라는 아무것도 아닌 말 한 마디에 뒤틀렸다.
아스팔트의 불규칙한 면에 긁힌 몸보다 마음이 더 조각나있었다. 소리없이 울었다. 이 악물고 참아도 부질없이 흐르기만 했다. 악의보단 걱정이 컸을 무심한 소리에도 무너질 마음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자기 전 짧은 뒤척임에 기억이 제멋대로 딸려나온다. 멍한 와중에는 꼭 리와인드된다. 올바른 생각 순환 고리를 찾겠다고 애쓰며 잊으려 했다. 얼음의 날카로운 감각에 아픔이 상쇄되길 바라듯이 얼른 덮으려고 괜히 다른 일에 몰두했다.
역부족이다. 털어내지 않으면 계속 돌아올 것이다. 잊어야지, 라고 되뇔수록 더 강렬해진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바보처럼 피해다녔다. 똑바로 앉아 마주본다. 얼얼한 발에 시리도록 차가운 아이스팩 대면서. 자. 그게 아니라 사실은—
보고싶다고 붙잡아뒀구나. 여름 내내 집안에만 틀어박혀 당신을 찾지도 않아서 너무 늦었다고 타박한 거야. 제때제때 사람 없을 무렵 조용히 다녀갔다면 이럴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정말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107
이름없음
2025/10/10 01:44:34
ID : 6mFjwNAkoE1
1
이것도 아니라면 살아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라고 오랜만에 피 철철 흐르게 해준 건지도 모를 일이다.
108
이름없음
2025/11/19 02:31:25
ID : i2q0ts7cMlC
0
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빛의 호위의 연작이었다. 정보 없이 읽다가, 스무 쪽 즈음에서 필름카메라와 스노볼이 나왔을 때 알아챘다. 묘사대로라면 작가는 사진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충실한 자료조사의 수준을 넘어선다. 아마 취미가 출사일 지도 모르겠다. 빛의 쓰임새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다다르고자 했던 것도 빛을 잘 쓰는 지경이었는데, 재능이 부족했다. 일반적으로 카메라는 조리개를 통해 자유롭게 빛을 조절할 수 있다. 사진은 눈으로 보는 풍경보다는 극적이어야 했기에, 좋은 사진은 늘 빛을 잘 조절한 사진이라고 생각해왔다. 좋은 사진들을 아무리 보고 찍어도 잘 안 됐다. 결국 점점 취미에서 멀어졌다.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데 의지가 붙어있을 수 있을까.
사진에 대한 열망이 꺼진 채로 만난 게 <빛의 호위>였다. 필름카메라를 선물로 받은, 열 두 살 무렵의 추억에 대한 얘기에서 끝났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번에 읽게 된 <빛과 멜로디>는 사진 자체가 업이 되어버린 종군기자와 필름카메라를 건넨 편집자의 이야기이다. 뻔한 클리셰답게 ‘나’는 오래 전 추억과 눈앞의 인물을 연결짓지 못한다. 그러다 서로 블로그 안부게시글로 근황을 간간히 이어나가는데….
딱 2부까지만 읽다 책을 덮었다. 역린을 건드는 키워드가 나오기도 했지만 좀처럼 집중이 잘 되지도 않았다. 내가 기대한 건 단편집이었나보다. 아쉬웠다. 여운 맺히도록 잘 끊었으면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다니. 연작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선뜻 읽으려고 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과 교차점이 많아서 잡생각을 이겨내면서 밀고 나가야 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저어본다. 요사이엔 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컨텐츠들의 물레를 휘감을 뿐이다. 출력이 없게 하려고 입력을 막아두었다. 그 사이 바뀐 근황에 대해 크게 화나지도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대로라면 눈앞에서 치워도 될 수준이었다. 시간이 정말 많이 지났다. 궁금하지도 않고,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올라왔구나, 하고 말 뿐이다. 강박적으로 기억했던 강렬한 이미지도 많이 훼손되었다. 내가 지웠는지 시간이 지워주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입시 주간이 되면 화장실에서 머리를 처박고 있는 모습이 한 번 쯤은 떠오른다. 시뻘개진 온몸을 통제할 줄 몰라 가둬놓고 식히고 있을 뿐인 내가 안타깝다. 그렇게 —한 사랑이었는지, 사람이었는지. 상대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판 함정에 걸려 너무 오랜 시간을 잃었다. …라고 말하면서 기어코 한 번 쯤은 글에 넣는구나. 아직도 멀었다. 그래도 생각하지 않아야겠다고 아득바득 이 갈기보단 그냥 멀찍이 서서 본다.
109
이름없음
2025/11/19 02:42:41
ID : i2q0ts7cMlC
0
살아 있다는 감각이 무엇인진 몰라도 살점이 쓸려나간 무릎은 재생되어 차올라있었다. 시꺼먼 피인지 딱지인지 피부 안쪽으로 아물어있던데 이젠 눌러도 아프지도 않다. 어떻게 관리하는 게 정석일까, 매일 마데카솔이나 펴바르고 있다.
흉터가 남음직한 상처를 물끄럼 쳐다보면서 겨울이 옴을 느꼈다. 통 걷질 않았는데도 반대쪽 발은 회복이 더뎠다. 이맘때쯤 다 나아있어야만 했는데 아직도 절뚝였다. 우스꽝스러운 걸 떠나 보행속도가 평시의 절반도 안 되는 것이 불만이었다.
이걸 누가 자초했는지 생각해보니 나였다. 하루 이틀 더 기다렸다가 버스 타고 갔으면 이럴 일이 없었지. 성급했다. 무얼 교훈으로 삼을까 곰곰이 되짚어봤는데 아마 당신이 이 꼴을 봤다면 이렇게 얘기했을 거다. 너는 항상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서 그런 거라고.
다치고 나선 평소보다 꿈을 많이 꾸었다. 너무 보고 싶었던 나머지 중심을 잃은 거다. 꿈 두 번이면 등가교환인지 이득인지. 오늘 한 번 더 꾸면 확실하게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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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5/11/21 02:01:52
ID : skty3TSIMk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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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까지만 읽고 실망했던 마음에 돌을 던지고플 정도로 책은 좋았다. 장편은 단편보다 한방이 늦게 포진되어 있다. 기승전결을 늘여놓으면 당연히 호흡이 길어지지 않는가. 미리 실망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결말까지 쭉 오르고 나니 역시는 역시였다.
때론 기억하는 것이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음을, 죽음이 역방향으로 작용해 삶에다 사람을 파묻기도 한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실은 처절할 정도로 살아있길 원해서 자꾸만 찾아갔던 게 아닐까.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다고 말하던 나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었으니까. 미래가 아니라면 과거에서 찾아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보면 그만이다. 무너진 나를 원상태로 돌려놓고 싶었다.
제일 찬란했던 기억을 끄집어내곤 또 서성인다. 이 기억은 미결이라 영원히 한 장면에서 멈춰있을 예정이다.
더이상의 진전도 퇴행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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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5/12/27 01:45:39
ID : re41u2nwq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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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발을 헛디뎌 슬라이딩 했더니 벗겨진 껍질 밑으로 피가 뚝뚝 흘렀다. 어쩐지 흰살이 아니라 시꺼먼 살이 올라오더라니. 갇힌 피를 풀어주고 면봉을 꺼냈다. 얼른 나았으면 하는 마음에 약을 듬뿍 묻혔다. 그리곤 이불 덮어주듯 아주 큰 밴드로 닫았다. 접착면이 가려움을 유발하기 전까지는 열지 않을 심산이었다.
밴드는 자주 갈아야 한다. 여분이 없어서 못 간다면 떼어내고 약이라도 꼬박꼬박 발라야 한다. 그럼에도 틀어막아둔 건 왜였을까. 쉬이 아물지 않았으면 했다. 오른다리도 병신된 마당에 그깟 상처 좀 남아있음 어때. 쉽게 잊기 싫었다. 그날의 아찔함, 황당함, 괴로움을 봄까지는 안고 가길 바랐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당신은 겨울잠에 빠졌는지 꿈에도 들르질 않는다. 그러니 걸을 때마다 전해져오는 찌르르한 통증으로나마 되새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래’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 다치기 전, 아프기 전, 알기 전으로 거슬러 오를수는…… 아무래도, 힘들다. 물리적으로 안 되잖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치유되는 거지. 그냥 놔두나.
덮어두고 방치하다보면 연해질 뿐 완전히 지워지진 않던데. 비뚜름한 걸음으로 자꾸 돌아보기만 해서 그런가. 이젠 뚜벅뚜벅 나아가야 하는데, 멀쩡한 걸음걸이로는 아파서 못 걷겠다. 한숨 쉬고 누워버렸다. 언 땅바닥에 등이 맞닿는다. 겨우내 웅크려 잠자는 것쯤은 봐줄지도 모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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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1/09 00:10:33
ID : rwHu5V9g5f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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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은 새 부대에
낡은 부대에는 시일이 지난 문장을 한가득 부었다. 오랜만에 종이책을 넘기니 즐거웠다. 퇴고 없이 딱 오 분만 써봐야지. 씻다가 우연히 걸어들어온 문장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활자를 가까이 하는 만큼 의도치 않은 산출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79쪽,
"열어볼 수 없다니까. 그게 규칙이야. 과거는 통조림 속에 들어 있고, 우리에게는 따개가 없어. 그러니 누구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거야."
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김연수의 이야기 속 화자/등장인물은 독자와 더 가깝다고 느껴진다. 작가와도 가깝고, 독자와도 가깝다는 것의 장점은 무얼까. 실제로 “말하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다. 네가 이 소설에서 이 교훈만은 가져가라, 라고 건네는 대사가 많다. 그 점이 매력적이다. 혹자는 이런 점이 매력을 반감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의 책을 읽는 건 꽤나 오랜만이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나에게 말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아간다.
130쪽
달은 천 년 전의 달과 똑같은데, 사람은 한번 헤어지고 나면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벌써 일 분 남았다. 내가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제한된 시간 동안 쏟아지는 생각을 모두 적기에는 타자가 느렸다. 다음엔 키보드로 쳐야 하나. 또 하나 느낀 건데,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게 아니라 억지로 꿈을 꾸려 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러지 않으면 버티기가 힘든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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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1/15 15:50:16
ID : s4NxXyZbh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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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쪽
역시 말이란 사람을 끌고 다니는 채찍 같은 것이었다.
그새 날씨가 풀려 비가 나렸나보다. 인도에 쌓여있던 눈이 다 녹아 있었다. 행인들의 옷차림도 가벼웠다. 개중에는 외투 없이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아침에 나오느라 목까지 꽁꽁 싸맨 내 차림이 괜히 우스워졌다. 잠시 멍하니 가삿말을 구슬리다가 휴대폰의 모서리로 버스 정차 버튼을 꾸욱 눌렀다.
“눈이 쓰레기처럼 느껴지는 곳에서 정을 붙이려 했던 게 잘못일까요?” 라는 문장이 엊저녘 씻을 참부터 사라지지 않았다.
쓰레기는 쓰레기고 눈은 눈이라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가끔은 쓰레기보다 더 못했다. 검게 엉겨붙은 빙판 위에서 균형을 잃을 때마다 욕지거리를 내뱉게 되니 말이다. 신발 밑창이 미끄럼에 좀처럼 저항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기도 했지만, 하여간에 아무렇게나 짓이겨진 저 빙판들이 문제였다.
이런 날이면 일부러 신설을 찾아 밟는다. 누구의 발자국도 없어 포슬포슬한 채로 남은 눈덩이로 걸음을 잇는다. 안정적이다. 불안에 떨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매 길이 걷지 않은 길일 리 없다. 늦장을 부려 눈앞에서 갈아탈 버스를 놓치고, 칙칙한 복장으로 거리를 수놓는 행인들의 목적지를 멋대로 상상하고, 그러고나 앉았다.
편지로 보낼 말들을 미리 정리해본 적은 많아도 한 문장이 이토록 오래 바짓가랑이를 놔주지 않은 적은 없다. 찰거머리같이 붙었다. 보냄직한 문장도 아니거니와 다듬는다한들 그럴듯한 소리가 되는 게 아닌데도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놔주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장은 핑계고 구실을 만드려는 몸부림인 거다.
하이얀 모시수건은 없어서 검고 우묵한 그릇에 청포도를 담아 올렸더랬다. 맛도 향도 영 꽝이다. 이젠 샤인머스켓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평범한 포도 맛이 되어 있었다. 삼 일째 비워지지 않는 알맹이를 툭 건드려본다. 앞니로 절반을 자르고 어금니로 우물거리며 터져나오는 과즙을 맛본다. 이것도 저것도 새롭지가 않다.
다만 새로운 것은 잉크로 찍혀 남은 문장들 뿐이라고 믿으며 책장을 넘겼다. 닳고 닳는 사이에도 굳건한 저 문장들. 피곤했는지 양쪽 다 터버린 입술에 바세린을 얹어놓고 또 넘긴다. 원래부터 겨울을 싫어했던가, 눈도 욕까지 할 정도로 미워했던가. 방향을 잃고 스러진 마음들에 너무 오래 시간을 쓰면 안 되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겨울이 싫다. 퍼석퍼석해서 다 갈라지는 입술만 쥐뜯는다.
그래. 눈도 싫다. 어서 여름으로 도망가고 싶다. 파도 위에 판때기 하나 뉘여 놓고 하염없이 거스르고 싶다. 제대로 서 있지 못한다고 해도 자책할 것 없이 뛰어들면 된다. 사리 분간 못하는 눈에 짠물이 한가득 들어와 따끔따끔거리는 그 순간이 그립다. 입술이 파랗다 못해 보라색이 됐다며 낄낄거리고프다. 이런 겨울이라니, 벌써 지긋지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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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1/22 17:04:36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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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좀 멀리 다녀왔지.
231202
마른 손가락이 쨍하게 내 팔을 끌어당겼다.
…
말되냐? 이 눈바람에
난 심장 두근댄다고 춥지도 않고
말 안돼 또
240118
너무 오래된 버릇은 근원지가 초토화되었어도 행해진다. 버릇이고 습관이라고 부르기로 한 행동이 아닌가.
250321
회색코트를 입고 있던, 그걸 내가 졸졸 쫓아갔다. 에엑. 또 웃었다. 이런저런 얘길 했다.
좀 멀리 다녀온다면 지금쯤 등장할 타이밍인데. 요사이에는 새나라의 어린이마냥 10시 반만 되면 졸리고 7시 반이면 깨어나서 그런지 꿈이 없다. 꿀 꿈이 없으니 당신은커녕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수면점수는 고공행진 중인데 아침이 되면 찜찜하다. 검은 꿈을 꾼 것을 후회한다. 후회해봐야 달라질 일은 없다. 달이 완연하기 전부터 졸고, 동이 채 뜨기도 전에 깨어나는데 무얼 할 수 있는가? 잠의 건전지는 얼마 전부터 계속 완충 상태다. 누군가에게 나눠주고픈 심정이다. 방전된다면 뒤척임 속에서 꿈이 선명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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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1/23 00:45:04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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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2
옷은 검은색 정장에 흰 셔츠
장신구 없이 깔쌈했다
231019
거기선 나무통 안에 있는 다람쥐를 찾아야했다.
230626
이거 절대로 잊지 마.
230518
취향을 말해달라 하니 특별히 가리는 게 없다 했다.
230107
알려준 시에 뜨겁게 목이 매이고 그러고 깼네
221224
그걸 보면서 울고 계셨어
221104
희한하게 노란 알배추의 알부분을 덥썩 베어물고 있었다 그 소리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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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1/23 01:13:14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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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연달아보니까 꿈을 생각보다 자주 꿨다. 작년에도 1월부터 거의 두 세달 간격으로 적혀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것이다. 사실 출연의 빈도는 헤아릴 수 없다. 기록량이 압도적으로 많을 뿐이지. 하여간에 다채롭게도 꿔댔다.
날것의 파편을 주워섬겨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길게 늘어져 있는가 하면 쭉 적어놓고 되짚어가며 정돈한 일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 즐겁지만 야생의 것은 진짜 꿈처럼 느껴졌다. 앞뒤없이 번쩍번쩍 치는 번개를 따라가는 듯한. 그런 이야기들은 대체로 소재도 쫓거나, 쫓기거나, 가본 적도 없는 이국을 거닐고 있거나 하는 환상이었다.
새벽녘이 되니 갈고 닦은 문장은 없는데 좀체 손을 놓지 못한다. 그럴싸한 단어를 엮어내는 방법따윈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리움에 잠겨 구간반복하는 못된 취향을 가졌다. 이런 걸 보면 슬픔이 지나치다 하려나. 아니지. 아니야.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다. 연락의 의미를 공들여 생각한다곤 했지만…
화제가 돌연 점프했다. 근황에 대해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적어 보내얄지 고민이 점점 길어지곤 한다. 편지가 가지는 순수한 함의까지만 잘라 보내는 게 성격상 쉽지만은 않다. 햇빛 받는 부분만 적으려니 그림자가 길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라 기만처럼 느껴졌다. 혹자와 달리 숨기는 것도 거짓이라 생각한 탓이었다. 의도한 은폐는 아니다. 선의라고 하기도 까다롭다. 그렇다면 보내지 말아야 하는가.
말도 없이 보내지 않으면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셈인가. 마음 한켠에 스치듯 생기는 호기심은 없을까. 그런 게 궁금했다. 연락이 반가운지, 무거운지, 회신을 보내면서도 개운치 않다면 내가 회신하지 말아달라 해야되는지. 쓰는 글 중에서는 가장 많은 퇴고를 거친다.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쌓인 글들은 죄 버리고 입안에서 굴렸을 때 깔깔함이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그러다 하루는 힘을 빼고 썼더니 좀 기운이 없어보인다고 하고. 종잡을 수가 없다. 나라고 늘 깃발 꽂으러 나아가는 건 아닌데 그런 내가 너무 오래 설치게 두었다. 어쩌면 편지에선 늘 그런 척을 해왔던 걸지도. 걱정하는 게 싫어서 먼저 선수를 친 건데, 그 수를 두지 않는 날엔 도리어 근심을 부르니 문제다.
나라고 죄책감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더 무거운 족쇄를 차고 있는 쪽이 어딘지 명확하니 더 괴롭다. 이젠 관두자고 해야 하나. 그걸 바라는 걸까.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반대쪽 끝엔 한번 얼굴이나 보자고 묻고 싶은 놈도 있는데 어쩌나.
거절이 두렵냐고 했지. 자칫 잘못하면 어이없이 손에서 놓쳐버릴 것만 같다. 와인이 담긴 유리잔이 깨져 바닥에 조각과 포도물이 낭자한 장면만 떠오른다. 그래서 시도하지 않는다. 불안하다. 만약 안 된다 해도 세계가 무너지는 게 아닌데, 단지 한 번 접혀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 뿐인데도.
불안해하면서 아닌 척 하는 태도가 제일 문제였다. 지금도 좀처럼 고치질 못한다. 그래서, 써야 해 말아야 해? 정말 네 손으로라도 써서 보내버리고 싶다. 넌 거절에 강하니까 내게 대신 전해주는 거다.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대.” 라고 전해들으면 충격이 좀 덜할까. 바보같은 상상이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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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1/23 23:03:17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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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잠을 이겨냈더니 수면 점수가 반토막이 나서는 아침엔 휴대폰에게 혼났다. 수면 점수가 엉망이니 제시간에 자고, 잘 좀 자란다. 요 며칠 좋았다고 칭찬해줄 땐 언제고. 오늘 새벽엔 겨우겨우 헤결의 힘을 빌려 잤다. 아무래도 서래가 흘려보낸 잠의 에너지만큼 충전되어 잔 것 같다.
몇 년만에 듣는지 가늠하기도 힘든 노래를 틀어본다. 문틈으로 넘어오는 외풍과 낮은 조도의 조명까지 수면에 아주 최적화된 세팅이다. 일찍 쓰고 넘어가버려야지, 하는 마음가짐만 있다면 언제든 꿈의 나무문을 열고 도망쳐버릴 수 있는 상태다.
아주 오래 전엔 눈을 감으면 생기는 회오리 끝에 매끄럽게 생긴 나무문의 손잡이를 돌려 잠으로 빠졌었다. 그런 버릇이 있단 걸 누군가에게 발화로 말했던 건 10년도 더 이전의 이야기 같다. 몇 년 전부터는 유튜브에서 수면제라고 불리는 게임 영상을 틀어두고 잔다. 그것도 안 되면 헤결의 힘을 빌린다. 초입 대사부분을 읊조리다보면 아침이 와 있으니 편했다.
아주 가끔은 헤결도 안 먹힌다. 운 나쁜 날도 있으니 어쩌겠는가.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시작된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한국말로 해달라고, 왜 자꾸 딴 소리를 하느냐고 절규하는 해준의 목소리에 기어이 몸을 일으켜 꺼버린다. 공들여 쌓은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려가는 결말은 싫다. 이때에도 선잠은 들었다 깬 상태다. 더더욱 난관에 봉착한 채 약통을 뒤진다. 참았던 타이레놀을 먹던지 억지로 잠의 단계로 끌어내려주는(그러나 깨고 나서도 한참을 개운하지 못한) 약을 찾아 먹는다.
유도제는 아무리 잠이 고파도 별로다. 입면 자체는 상당히 수월하지만 “깨어남”의 과정이 더러워진다. 차라리 이를 악물고 말지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저 밑에서부터 몸상태를 끌어올려야 하는 불쾌감은 참아주기 힘들다. 차라리 처방받는 항히스타민제가 나았다. 공산품이라 그랬나, 하여간 두 알 정도 먹고 속아서 죄다 버릴뻔한 걸 괜히 품고 있다. 언젠가는 찾을 날이 오려나 싶어서.
이 노래를 뜯으면서 글을 쓴 적도 있었는데. 다른 공간에서 그러고 있으니 묘하다. 기억이 맞다면 아주 좁은 공간을 타인과 나눠 쓰고 있을 때였다. 그게 싫어서 매주 도망쳐갔겠지. 아이러니하네, 친한 너에게로 갔었는데 이제는 근황이고 뭐고. 차라리 룸메였던 애한테 연락하는 게 편할 지경이 되다니. 시절인연이 아니길 바랐는데, 그렇게 손에 꽉 쥐면 쥘 수록 반동이 큰 법이다.
노래가 그 시절로 나를 던져버렸다. 지금은 그게 궁금하다. 그렇게 가깝다고 생각한 내가 얼마나 좆같았는지. 나에 대해 아는 게 절반도 안 된다고 느끼기나 했을지. 난 좆같았다. 입안 살 잘근잘근 씹으며 아니길 바랐었는데 수면 아래로 겨우 가라앉힌 사실이 다시 인양되는 그 빌어먹을 기분. 너도 느꼈으니 연락이고 뭐고 없는 거겠지.
튼튼해보였던 건 착각이라고 느끼고부터는 크게 마음을 안 두는 것 같다. 그냥 배경일 뿐이다. 마음을 쓰면 쓸수록 상처가 깊었다. 인간관계가 어떻네 저렇네 떠드는 일도 지쳐버렸다. 생각을 안 하면 편했다. 편리하단 걸 알았으면 진작부터 그리 했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노래가 흐르고 흘러 여행지에서 반복해 들었던 앨범으로 도착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느껴진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해서 괜히 선실엔 안들어가고 비산하는 바닷물을 맞기도 했었다. 아. 오지 않은 여름이 그립다. 노래만 들어도 설레는데, 겨울은 아직 반이나 남았다. 2월은 짧으니 금방 달려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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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1/24 17:54:02
ID : pO9xVe1yE8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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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41쪽
셀로판지로 바라본 부분일식처럼 너는 그렇게 내 속에 새겨져 있다. 선명하면서 아득하고 다만 완전한 집중을 요구하는 오만함으로. 그토록 멀리.
82쪽
「너, 이런 책 좋아하니?」
「예」
「결국 독서란 읽는 사람에게 본질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진 못하는구나」
「형! 달라진 게 이거라구요」
94쪽
명백히 잘못된 길이란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갈 때가 인생에도 있다.
118쪽
앞뒤가 전부 선한 사람이나 안팎이 모두 악한 인간이란 없다. 인간의 내면이란 수없이 많은 겹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겹겹의 얼굴은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도무지 파악할 수 없다.
123쪽
결혼은 건강한 사람하고 해야 해.
글라디올러스하고 건강이 무슨 상관이야?
그 꽃을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건강하고 낙천적이야.
꽃에도 일가견이 있는 줄 몰랐군.
176쪽
그러나 사랑이란 계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177쪽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만약 우리가 우연히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아름다울 테지. 오래 전에 읽은 게슈탈트 심리 치료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땐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영혼으로 만나 피 흘릴 일은 없는 관계, 세상 속에서는 그런 관계만 맺으면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178쪽
비라는 필터를 통해 보는 도시는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만 같던 모서리가 조금씩 뭉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185쪽
영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그저 행복한 한 순간일 뿐. 소멸되지 않는 것은 기억이다. 시간 속에서 바래지 않고 간절함 속에 후광마저 얻게 되는 것은 다만 기억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추억만이 영원할 뿐.
187쪽
기억은 이토록 오래 지속된다. 그러므로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더 이상 민을 보지 못할 것이다. 달라진 건 그것뿐이었다.
190쪽
무엇이든 잃고 나서야 제 마음속에서 그것이 자리 잡고 있던 공간의 크기를 손으로 더듬을 수밖에 없는 게 나라는 인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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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1/25 19:03:23
ID : s4NxXyZbh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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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불이 켜지지 않자 기다렸다는 듯 이른 밤의 어둠이 밀려들었다.
18쪽
방 한가운데 유독 시커먼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깊고 새까매 보였다.
26쪽
그녀는 방 안 깊숙이 들어온 어둠의 농도를 살폈다. 일생을 통틀어 이만번도 넘게 검은 밤을 맞았을 텐데, 끊임없이 밤이 지나갔을 텐데, 어둠의 질감을 분간하고 그로써 시간을 짐작할 수 없다는 것에 조금 당황했다.
30쪽
문이 열렸다. 찬 공기가 어둠을 바깥으로 내몰았다. 누군가 주저없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38쪽
그러고 보니 그에게는 무수히 많은 비밀이 있었다. 어떤 것은 순전히 말할 기회가 없어서 비밀이 되었고 어떤 것은 그가 비밀로 유인했고 제 스스로 비밀이 된 것도 있었다. 비밀은 세포처럼 자생하거나 자멸했다. 이제는 더이상 비밀이 아닌 것도 있고 새로 생겨난 것도 있고 여전히 비밀의 시효가 남은 것도 있었다.
57쪽
오직 그만이 그리고 좁은 골목과 어두운 밤만이 노인이 될 때까지 비밀을 기억할 것이다.
68쪽
모임은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서 고통을 잊지 않고 끝없이 되풀이하기 위해서 유지된다는 걸 말이다.
78쪽
그녀는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제는 실제의 고통을 넘어 어느정도 상상의 고통을 겪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103쪽
점차 사그라들다 한순간 훅 꺼져버리는 불꽃처럼 노쇠한 숨이 이어지다 돌연 끊어지리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노년이란 모든 운명이 종결되는 시기이므로 우연의 신비를 더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체념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과 불확실성을 확실하고 결정적으로 잠재우는 시간이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해왔다.
108쪽
숲길을 걸어내려오는 동안 차츰 빛의 잔광이 사라졌다.
121쪽
불운한 일은 왜 혼자 오는 법이 없을까. 불운은 늘 동반자를 필요로 했다. 게다가 경사가 급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단숨에 정상에 닿으려는 참이었다. 리듬의 원리상 정상에 도달했으니 더 나쁠 일이 없다는 것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149쪽
그제야 자기가 전력으로 추돌한 것이 동력장치를 갖춘 무기물이 아니라 그럭저럭 평온하게 유지되던 삶의 질서였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었다.
154쪽
사내는 해무 낀 대로 위에서 우연히 교통사고에 휘말려 죽음 직전까지 갔으나 무사했고 무사를 안도한 순간 사라져버렸다.
158쪽
붉은 불꽃이 푸른 불꽃을 품고 있는 것처럼, 따뜻한 온기 속에는 분명 냉기도 함께 있으리라는 생각이 그를 단호하게 했을 것이다.
198쪽
"무슨 소립니까? AS맨은 벙커를 수리합니다. 명심하십시오. 두려움은 수리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심화하는 겁니다. 아셨습니까?"
217쪽
벙커는 참을 수 없이 어두웠고 고요해서 더 어두운 듯했다. 언젠가는 어둠에 익숙해질 것이다. 유구히 어두울 수만은 없다. 그것이 이 세상의 유일한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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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1/28 15:36:37
ID : pSNvvbdzS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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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나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서 물을 가져왔다. 뭐든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매개가 필요한 법이다.
25쪽
그러고보면 인생을 아는 건 나이와 아무 상관이 없다.
46쪽
자신이 사람을 살린 건지 사지로 밀어넣은 건지 알 수 없어 겁이 났다.
59쪽
“이쑤시개 때문에 죽는 사람이 번개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 많아요.”
67쪽
긴 인생을 두고 봤을 때 이진수가 군인이었던 것은 잠시뿐이지만 어떤 일은 그럴수록 평생 지속되었다.
80쪽
나이들수록 가까운 게 좋다고, 멀리 있으면 멀어지는 법이라고도 했다.
100쪽
가까이 있으면 거리를 두고 간혹은 적개심을 가지고 서로를 살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친구였다.
124쪽
생각에 잠길수록 그 시절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점점 멀어졌다.
146쪽
“모르는 소리. 본래 불리할 땐 전장을 키우는 거다.”
151쪽
외지인의 전입과 내지인의 이탈이 적다보니 평생 같은 사람을 이웃으로 두고 지냈다. 누군가를 잘 이해하기보다 오해하고 서운하게 여길 일이 많을 것이다.
180쪽
아직은 괜찮았다. 인생이 출발한 최초의 지점에 해결책이 있으리라 여겼다.
183쪽
어머니는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채 말로 해야 겨우 알만한 것들에 침묵으로 맞서고 있었다.
195쪽
어둠이 어머니의 얼굴을 검게 물들였다.
209쪽
하지만 미래는 바라는 대로 차곡차곡 순조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213쪽
아줌마는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구했다.
228쪽
우리는 사후에 누군가의 그리움이 된다는 걸 잊지 않고 싶다.
121
이름없음
2026/01/28 15:54:59
ID : lA2NtbhdPg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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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진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새벽녘부터 연달아 악몽을 꿔가며 잠을 설쳤다. 마그네슘을 오용한 사람처럼 끝이 엉망인 꿈을 세네개씩 꾸니 아침부터 지쳐버렸다. 목에 걸린 닭뼈를 뱉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불투명한 액체만 쏟아졌다.
잠을 흐트러트리고 보니 베개를 높게 해두어서 생긴 답답함이 무의식 영역까지 침범했던 탓이었다. 그러고 다시 잠에 빠졌다가 다시 쫓기었다. 영문도 모른 채 현관문 앞에서 알루미눔 배트를 들고 대기했다. 막상 문을 열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로 잠이 사나웠다. 검은 꿈을 꾼 것을 후회한다느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가 잇달아 난폭운전을 했다. 비틀거린 채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심박이 빠르게 올랐다. 한 번이면 족할 경험을 두 번이나 맛보다니. 다행히 사고는 없었다. 무사귀환에 건배라도 해야할 지경이었다.
잠든 이를 깨우는 일상적인 어떤 것들, 알람시계의 소리, 연기냄새, 옆방에서 비추는 불빛 등이 현실로부터 침입하면, 꿈속에 그것들을 끼워 넣어서 좀 더 오래 자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꿈은 잠의 수호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라깡에 의하면 꿈을 꿀 때 외적 현실에 대한 자신의 (잠든 동안의) 지각 주변으로 꿈이 구성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를 깨우는 것은 외적인 현실이 아니라 그 꿈 안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이다.
끝끝내 마지막 닭뼈를 토해내지 못하고 각성해버린 내게는 라깡의 주장이 더욱 타당해보인다. 그 꿈은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현실의 내가 진실로 목이 갑갑했기 때문이었다. 꿈 내부에서의 작용이 나를 일으켰다. 악몽을 견디지 못하고 미등을 켰다. 어둠이 공간을 집어삼키는 한 재차 어지러운 꿈속에서 헤맬 듯했다.
정동이 한바탕 날뛰고 간 뒤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질서했다. 그리하여 하루종일 활자에 매달렸다. 문장은 언제나 나를 가라앉게 한다.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대도 좋았다. 이해해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새벽에 겪었던 것들이 무화되어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122
이름없음
2026/02/07 00:11:00
ID : amty42NurdR
0
곳간이 동나버렸다. 꺼내 쓸 문장이 없다. 고작 일기를 쓰는 데에 무슨 연료가 필요한지. 메말라서 다 갈라져버린 땅바닥에 물을 길어와 한가득 쏟아본다. 흡수될 뿐 무언가 자라나진 않는다. 나무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분이 필요하다. 숙련자의 글이란 영양소처럼 작용한다. 책과 멀어질수록 한손으로 나뭇가지가 꺾일듯이 유약해진다. 강제성 없는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한 장도 넘기질 못했다. 입가에는 읽어야 되는데, 그래야 하는데, 라는 수많은 가능성의 하는데,만 넘쳐흐른다.
내려와있으면 겨울이랄 것도 없다. 여긴 벌써 봄이다. 춥지 않은 날씨에 매화가 핀 걸 보고 있자니 벚꽃인지 헷갈려하는 행인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렇지, 벌써 벚꽃이 필 리 없으니 매화인 것을. 그럴때면 종종 벚꽃의 또다른 꽃말을 생각하며 실실거린다. 중간고사를 방학에 칠 리가 없듯 미리 핀 벚꽃은 거진 매화이다. 설령 과실이 열리지 않아도 그렇다. 벚나무에 비하면 꽃망울이 작고 나무는 보통 낮게 자라며 꽃잎이 조금 더 히여멀건하지만 그런 구분까지 갈 것도 없다.
애매한 감각이다. 확실한 겨울을 보내고 내려오니 기운이 쭉 빠진다. 손끝 발끝 코끝이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도 없다. 한숨 한 번에 길게 흩어지는 미세한 물방울들도 보이질 않는다. 폐부 깊은 곳을 찔러대는 서늘함이 그립다. 두터운 이불이 무더워 뒤척이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잠이 달아나버릴 정도로 덥다. 사람 참 간사하다고, 추워 죽겠다며 보일러 내내 틀 땐 여기가 그리웠는데. 적당하면 만족할 줄 모르고 반대편이나 바라다보고 있다. 어느샌가 망가져버린 생활패턴은 덤이다.
123
이름없음
2026/02/08 02:49:51
ID : CqjbeNutAkr
0
보고싶다. 눈과 함께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별것도 아닌 얘기였다. 아니? 너무 특별해서 새벽 잠을 달아나게 한다.
내겐 달콤한 과실이 아니라 씁쓸하고 텁텁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은 큼지막한 돌덩이가 필요하다. 여름에만 구할 수 있다는 전설의.
근데 말야, 왜인지는 정확히 알지만 일단 모른다고 하자. 그냥 보러 갈 수 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그냥 그렇다.
눈을 가늘게 뜬다. 엉킬대로 엉킨 실타래에 손가락을 살살 넣어본다. 지나치게 힘을 주어 풀면 다시 꼬여버린다.
여름으로 다시 겨울로 달아나면 그렇게 일 년이 가버린다. 어쩌면 이번이 적기일까. 아니면 매 계절이 그랬을까?
124
이름없음
2026/02/10 18:23:00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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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쪽
기억의 멀고 가까움이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강렬함으로 정해지는 거라면 그건 아마도 가장 가까운 기억이겠다.
여름과 겨울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저 돌덩이는 아주 가까운 기억이겠다. 뙤약볕에 땀방울 뚝뚝 떨어트리고 있으면 문득 껍질에서부터 퍼지는 향기가 떠오른다. 일반 만감류보다 훨씬 시큼하다. 콧속에서 가장 눈과 가까운 점막까지 치고 들어온다. 두려움에 반사적으로 침이 고인다. 그러니 만감보다는 레몬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혹은 자몽?
매양 불러대는 일본식 표현으로 검색해봤더니 표준어로는 하귤이란다. 좀처럼 먹지 않는 과실이다. 적확히는, 즐기는 자가 아니라면 먹을 기회가 없다. 건너건너 때가 맞으면 먹을 수 있지만 구입은 번거롭다. 산지에선 굴러다니는데 상품성이 없는 탓이고, 공급이 적다. 최종소비자에 당도할 때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버린다.
여름에 내려오지 않는다면, 산지에 가지 않는다면, 혹은 구태여 기를 쓰지 않는다면 구해지지 않는다. 이 계절엔 길바닥에 차고 넘치는 게 귤이라는데, 정반대인 여름에 와서는 어디서 구하겠는가. 코끝에서 향만 어른어른거릴 뿐 정작 먹어본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런 의미에서의 “종종 생각남”은 꽤 잦았다.
온 얼굴 근육을 다 꾸깃꾸깃하게 만드는 시큼함이 싫지 않았다. 대놓고 시다고 하면 각오를 해서라도 먹을 수 있으니. 수수께끼를 내듯 아마도 단맛과 아마도 신맛 사이를 오고가는 귤들은 흔했다. 심하면 일조량 차이로 어느 한쪽만 지나치게 달콤한 열매도 있었다. 그래서 잘 익은 귤은, 하우스가 아니라 노지라면, 보통 귤나무의 중간에 위치한단다. 말단 귤은 맛이 일정하지 않다나.
이제 남은 건 여름에 또 올게요, 라는 인사 뿐인가.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많은 비디오테잎이 만들어진다. 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인데 장소가 바뀐다. 식당, 찻집, 차 안, 어디라도 좋으니 그냥 실없는 이야기나 하고 싶다. 궁금한 것도 많다. 이제 내린 결정에 후회하지 않을 방법도 알려주려나.
참, 하귤이라 말하면 알까.
나도 하귤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는데.
125
이름없음
2026/02/11 02:11:19
ID : bdvbeFdA1Dt
0
안 좆같다.
단전에서 올라나오는 그 기분은 아주 잠시동안 그랬던 적이 있었지,라며 혀를 끌끌 차곤 뒷짐 자세로 가버린다. 이번엔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려 해서 나온 게 아니라 진짜 아무 생각이 없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거나 나보다 티끌만큼 더 불행했으면 한다거나 하는 그 유치한 증오심도 이젠 진짜 다 꺼져버렸다. 실토하자면 장작이 없다. 도끼마저 사라졌다. 장작 팰 나무는 이미 송두리째 뽑혔다. 원래 어떤 땅이었는지 기억하는 영상만 종종 송출된다. 관객없이 홀로 텅 빈 광장에서 허무하게 흘러가는 모양새로.
이런 의미에서 시간이 약이라 한다면 나는 꽤 오래 걸렸다. 새로운 사람을 더 많이 만나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바빠야 했는가? 정말로? 개인적인 고난은 이미 지겨우리만치 맞닥뜨려서 미봉책으로 덮어내길 반복해왔는데. 이젠 진짜 뭘 쥐어짜내서 쓰려 해도 안 써진다. 허공에 떠다니는 단어를 잠자리채로 휘둘러 데리고 와봐도 거의 대부분이 의미없는 위선이다. 건강한지. 잘 지내는지. 답변은 안 궁금하다. 그러든가 말든가. 손으로 벅벅 문지른 빨랫감을 강하게 비틀어 물기를 쥐어짜내듯이 억지로 쓴다면 쓸 수야 있겠지. 근데 굳이 그래야만 하는가. 버릇처럼 몸에 힘을 주게 되는 몇몇 지명이 있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힘 빼게 된다. 맥 빠지는 것마냥.
그래. 그걸 내 원대한 목표였던 덮어쓰기()가 성공했느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니다. 방치될 지하실 한구석에 먼지 쌓인 박스 속 기억으로 치환될 줄 알았더라면 애써가며 덮어씌우려 하거나, 고작 생각했다고, 글 썼다고 자책하진 않았을 지 모른다. 시간이 흘렀다. 오래되고 무겁기만 한 파일은 지워버려야 한다. 내 휴대폰은 꼴랑 128기가짜리 저장장치를 갖고 있다. 최근 용량이 모자라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 동영상 파일을 대거 지웠더니 30기가나 비워지더라. 딱 이런 느낌이었다. 왜 찍었을까. 자기만족? 어짜피 전문장비 들고 와주는 대포들이 널렸는데. 왜 남겼을까. 미련? 지우면 안 될 것 같은 감각에 케케묵은 먼지 뒤집어써가면서, 잔기침 연신 해가면서, 왜 명명하려 했는지 도통 모르겠다.
오랜만에 독서 좀 하고 기억에서 잃어버린 내 글도 읽었다. 그랬더니 묻고 있다. 좆같느냐고. 안 좆같다. 네 별칭 대고 누가 물어보면 그럴 수야 있겠지. 가벼운 입이 죄목이라고, 형벌처럼, 짖궂은 장난에 당한다. 발끈한다. 와하핫—. 웃어넘긴다. 그건 너를 끄집어내 내 기분 무너뜨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나에 대한 일종의 의례였다. 두 해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젠 다른 화제가 너무나 많아졌다. 다들 나이를 먹었다. 무리가 자연스레 나뉘었다. 그나마 낭만을 아는 사람들끼리, 치열하게 현실을 좇는 사람들끼리 찢어졌다. 물론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생각하지만 어쩌다보니 전자에 남았다. 말수가 줄었다. 재미있는 일따위 일어나지 않는다. 도시 태생이라 색다른 경험이 많고, 만나는 사람이 많은 자가 대화 주도권을 틀어잡고 흘러가게 두는 게 좋았다. 난 흥미로운 귀를 꺼내오기만 하면 되니까.
그렇게 떠나오게 된 건가. 자라나게 된 건가. 아니면, 쥐어짜내듯 생각했던 이유가 단지 영감을 받으려고 억지로 고통을 받는 거라는 걸 깨닫기라도 했단 말인가. 정신적 자해공갈이었던 건가. 다 맞거나, 다 틀릴 수 있다. 옳고 그름이 중요하진 않다. 주요 화제로 잡고 글 쓰는 게 마지막이란 확신을 주면 만족스러운 대답이 될 것이다. 154쪽, 어떤 기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가. 확실히 그렇지. 하지만 서서히 바래는 기억도 있다. 오래된 앨범 속 귀퉁이가 삭아버린 사진처럼 언젠가는 열어보겠지만 지금은 아니고, 가까운 시일도 아닐.
이제 정말 뚜껑 닫는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라면 그나마 햇빛이 들지 않을 것 같은 곳에 두어, 지하실에 들어오자마자 단번에 눈에 띄지 않게 한다는 것이겠다. 쿰쿰하잖아. 이런 곳은 그냥 습기 머금은 벽지의 퀴퀴한 냄새를 품는 곳으로 남아있으면 족하다. 나는, 그냥 산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아직 다 낫지 않은 다리로부터 느껴가며 산다. 회신에 집착하지 않으려 먼 시일로 예약메일을 보내고, 사주에 부족한 수 기운 채운답시고 바다를 배경화면으로 해둔다. 돌아오는 여름엔 성공률 반반인 파도 거스르기 하러 가겠지. 성공했을 때 얼굴로 불어오는 후텁지근한 맞바람을 느끼고 싶으니. 그러다보면 성공 확률은 점점 오르지 않을까.
126
이름없음
2026/02/11 19:19:33
ID : faq3SLbxvhc
0
별것도 아닌 건데 왜 지레 겁먹었지? 이제는 손꼽아 배송이 오기만 기다린다. 설 연휴 꽤 기네. 그냥 하루만 하면 안 될까? 안그래도 늦는데.
127
이름없음
2026/02/12 23:31:30
ID : irAi4GraoMl
0
그냥 궁금해하지 말걸, 어짜피 해결되는 건 없고 그림자만 보여준 셈인데. 이제 적정선은 넘겼으니 남은 건 판결 뿐이다. *오늘 운 참 좋았다. 별로인 듯했으나 지나고 보면 결국 좋았다. 알고 따라다니는 것마냥 타이밍이 지나치게 맞았다. 우연도 세 번 연속이면 필연이라는데 역시.* 누군들 그러고 싶었겠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운명의 장난에 놀아난 기분. 가볍게 파도 타다 보드 뒤집히듯이 물에 잠겨버리기나 하지. 왜 발화를 해버려서 의미로 만들어버렸지.
4시간까지 찍은 수면시간이 재차 토막났다. 새벽에도 선잠과 잠 사이를 쏘다니느라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오후에 잠깐 나아져서 향했다. 혀에 가시 돋치는 것보단 책을 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문장이 채워지는 느낌이 더 좋았거든. 의도와 상관없이 우연히 얼굴 맞댔을 뿐인데 왜 내가 불안했나. 그런 식이었다. 앉아있어도 심장이 지멋대로 유리창 깨트리고 땅바닥에 몸을 던졌다. 몸이 비상인 줄 알고는 심리를 뒤흔들었다. 왜 심호흡은 안 한거지. 증상이 아니라고 느껴서 그랬나. 머리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활자는 잘 읽혔는데 체한 것 같았다. 기왕이면 심장을 포함해서 저녁으로 먹은 거 죄 토해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알고 싶었을 뿐이다. 왜지? 왜. 뇌는 심장이 궁금했다. 통제 불가능한 영역이었으므로. 이게 일반적 범주를 넘나드는 거라면 의도해서 멀어지기 빼고 다른 선택지 같은 게 없어보였다. 초조했으면서 왜 굳이 얽히려고 하는거지. 감정에 대해 확실한 건 싫지 않다거나 좋다의 상위이긴 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상위레벨로 분류를 해놓곤 사랑이니 아니니 떠드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 돼버리는데, 맞다고 해봐야 자책만 반복해서 괴로웠다. 롤러코스터 탄듯한 낙차가 싫었다. 차라리 업앤다운인 거 알면서 맛보러 가자고 각오나 할걸. 지나치게 달고 아주 썼다. 손가락 끝이 부르르 떨린다.
곤두박질이 무서워서 오르고 싶지 않은 거였다. 이걸-. 다르게 표현해보자. 달달한 과실만 냉큼 빼먹고 싶은 거였다. 이게 무슨 오만함인가? 아니, 애초에 달달하고 쓰다고 감각하는 건 나—혹은 뇌—였는데 누구 탓을 하는 건지. 바로 내놓는 쓴 열매는 다만 내 심장이 뜀 - 불안하고 초조함에서 오는 거였지 당신이 그러라고 한 게 아니었다. 맛을 착각했으면서 당신 탓을 했다. 생각이 짧았다. 경광등 시뻘건 채 회전하는 뇌에선 제대로 된 경로를 거치지 않은 날것이 쏟아져내렸다. 정신 차려야지 싶어 미친놈처럼 찬바람을 맞으며 오심을 삼켰다. 우웨엑. 결국 마른 욕지기를 내뱉는다. 나아질 리가, 진짜 토해내고 싶은 건 없었으니. 심박수를 측정해보면 110~120이 찍혀있어 웃다가 진지해졌다가 그냥 쌩쑈하고 앉았던 거였다. 진정해보니 이제 알겠다. 그냥 병신짓한거다….
왜 이런 실수를 했지. 하여간 강제 휴식기가 있으니 더 차분히 비춰봐야겠다. 감정에 라벨링이나 카테고라이징은 의미없다. 무언지 제대로 들어맞는 개념어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A였다가 B였다가 ㅎ으로, ㄲ으로 맘대로 변했다. 도망치는 마음을 붙잡아도 이름표 달아주기 전에 다시 달아났다. 그리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당신은 저기 멀리 떼어놓고 나만 들여다봐야겠다. 고정되고 객관적인 생체 기록들도 전부 버리고 단지 나랑 나만 남겨본다. 생각하느라 머리 터져서 잠 못 잔 거 맞고, 수면시간 확보 못한 걸로 또 스트레스 받았다. 마주치고 나서 체할 것 같이 뛰는 심장에다가는 왜 심호흡 안 던져놨지. 일단 심장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불안이 등떠미는 방향에 맞춰 엎어지는데.
다음번엔 마주쳐도 호수처럼 만드는 걸 목표로 해야겠다. 아니 사실 마주하고 있을 때는 괜찮다. 능청스러운 척 연기하는 고프먼의 연기적 자아가 아주 훌륭하다. 문제는 막 뒤에서 기록하는 내가 미쳐서 온 무대를 쑤신다는 거다. 계속 이딴 꼬라지면 나만 고꾸라질 뿐이라구. 병신 아니잖아, 미친놈은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심호흡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20분이나 찍혀 있었다) 왜 내 글에 파묻히도록 친구놈에게 보내버렸을까. 의미화 과정이 반복 될수록 날것의 생각이 정답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알아야 좋았을 것 같긴 했다, 언젠가는 말할 예정이었다. 이런식은 아니었을 거 같긴 한데… 하여간에. 거절이 무섭고 반갑지만 불안하고 이런 거 다 총체적으로 심박수 컨트롤 못해서 생기는 일이었다. 심호흡 하면 될 걸.
등판을 뜨겁게 지진다. 억지로 땀 삐질삐질 흘린다. 좀 개운하다. 익히지 않은 날것이 드디어 송골송골 맺힌다. 몸에서 체온을 빼앗고 나가버린다. 다음 주엔 어떤 행동이든 하기 전에 그놈의 체할 것 같은 느낌 오면 바로 심호흡 해봐야지. 이런 것도 훈련하는 거다. 진짜 음식 얹힌 게 아니라 그냥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저 멀리까지 달려가버리는 심장 때문에 그러는 걸 알면… 컨트롤타워가 와서 진압해야지. 평탄화 시켜야지. 결국 내 손에 들린 키를 한참동안이나 외부에서 찾으려고 애쓴 셈이다.
128
이름없음
2026/02/12 23:41:25
ID : xyNvDy2IMj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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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꿈같아서 잠을 못자는 거였나. 적어야했고 잊히길 바라지 않았다. 그래도 선명한 교훈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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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13 23:57:08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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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패러다임을 뒤바꾸는 게 좋으려나
1년 뒤에 추천받은 책을 읽으면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다니. 기막힌 우연이다.
173쪽
과학혁명의 구조(토마스 쿤)에 쓰인 내용을 아주 간단히 정리하면 과학이라는 언어놀이는 어떤 놀이일까? 그리고 그 놀이는 어떻게 해서 다른 놀이로 전환될까? 하는 것입니다.
쿤은 과학의 틀, 과학자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과학적 상식의 총체를 패러다임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런 새로운 사실이나 이론이 일련의 규칙에 의해서 진행된 게임에서 우연히 만들어진다면, 이것들이 동화되는 데에는 또다른 일련의 규칙이 필요하다"라는 비트겐슈타인적인 비유를 썼습니다.
174쪽
쿤의 패러다임론에서 중요한 것은 변칙현상anomaly(아노말리)라는 개념입니다. 아노말리란 '과학적 상식에 비춰보았을 때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일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13쪽
그 변화는 복원력resillience의 유무에 따라 결정됩니다. 안정된 평형점에 놓인 왼쪽 공은 변화가 일어나도 복원력 덕분에 알아서 원래 위치로 돌아갑니다.
그에 비해 불안정한 평형점에 놓인 오른쪽 공은 균형이 깨지면 두 번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만약 원래 위치로 돌려놓고 싶다면 공, 곡면, 중력이라는 닫힌 시스템 외부에서 힘을 가해야 하죠.
246쪽
우리에게 무언가 행동을 촉구하고, 심지어 그 행동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생명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262쪽
편지는 수신처가 있어야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편지를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내는 증여에는 '수신처로서 그저 거기 존재한다.'라는 차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증여할 수 있습니다.
증여를 받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해도, 존재 자체만으로 증여의 수신처를 주는 발신인, 그런 발신인의 존재를 강력하게 전면적으로 긍정합니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증여를 하는지 알 수 없어지고, 수취인과 발신인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한하게 교체되는 듯한 상황이 있습니다. 발신인과 수취인이 하나로 뒤섞였다고 해도 되죠. 그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주다/받다라는 계층 차는 사라지고, 관계가 병렬적으로 변해갑니다. 그렇다고 하면, 나는 당신으로부터 둘도 없는 소중한 것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답례가 되지 않을까요?
263쪽
꼭 말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이제 답례를 못할수도 있지만,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이것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보여주는 것 자체가 답례인 것입니다.
전달자에게 수취인의 존재는 구원처럼 작용합니다. 수취인의 존재가 전달자가 느끼는 부당성을 정당한 것으로 바꿔주기 때문입니다.
274쪽
"글을 쓰면서 내가 텅 비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텅 비었다는 자각에서 글이 시작되는 게야.
그게 올바른 거라네.
그렇게 말씀해주신 것 같았습니다.
275쪽
'나는 텅 비었다'는 것은 현재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전부가 남김없이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타인에게 받은 증여가 내 속에 쌓여 있다는 것이죠.
130
이름없음
2026/02/15 00:44:46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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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뽑아 없애버렸던 왼쪽 사랑니 자리가 욱씬거린다. 세 조각으로 나눠 뽑힌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미처 뽑지 못한 반대편이 아픈 거면 몰라, 왜 뽑힌 자리에서부터 기인하는 통증이 나를 괴롭히는지 알 수 없다. 환상통인가. 사랑니따위 없어도 아픔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오늘 밤도 잘 자기는 글렀다.
131
이름없음
2026/02/15 08:57:19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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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가 쏜 심장모양 투사체에 하루종일 걸려서 매일 죽고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나는 현혹의 구슬에 맞아죽고, 여우불에 타죽고, 평타에 천천히 죽는다. 다시, 다시, 되살아난다. 다만 아리의 매혹에 걸리고 그가 혼령 질주로 나를 죽인 뒤 전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걸 보기 위해서. 다시 가서 머리를 처박고 게임을 망치고 팀원의 기분을 나쁘게 한다.
132
이름없음
2026/02/15 09:33:13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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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
그래서 남자가 연신 기침함
목격자
옷은 이거 아니고 파란 원피스였어요. 코트도 없이
해준
파랑 맞아요? 녹색 아니고?
연수
파랑 맞구만. 뭐하고 있는 걸까요.
서래
왜 자꾸 물어요.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그게 중요해요 당신한테?
그게 왜 중요한데요. 당신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것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해준
파랑으로 보였다 녹색으로 보였다 하는 거 어딨어요.
서래
자세히도 봤네요.
해준
샅샅이 뒤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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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16 02:38:40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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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핀 곰팡이를 뚫어져라 보는 해준. 의사가 권유한 양압기를 끼고 숨을 아무리 쉬어도 눈은 감기지 않는다. 그러다 언제 잠을 편안히 잤는지 생각하는데, 기억 속에 서래가 있다.
서래
잠은 좀 잡니까.
해준
병원서 잤는데 내가 한시간에 마흔 일곱번 깬대요. 믿어져요?
서래
내 잠을 빼주고 싶네요, 건전지처럼.
해준
숨을 입으로 쉬어서 그렇다고. 잘때 코로 숨쉬게 도와주는 기계를 쓰래요.
이상해요, 깨 있을 땐 코로 쉬는데.
들숨 날숨을 해준이 먼저 쉰다. 곧바로 서래가 심호흡을 잇는다. 미 해군이 개발한 걸 그녀가 발전시켰다고 했었다. 바로 그 방식이다. 함께 연습한대로 해파리가 되는 해준.
해준
그렇다고 잘 때 코 곤다는 건 아닙니다.
서래
알아요.
수갑을 찬 채 포개진 두 손. 두 사람의 호흡수가 비슷해질 때 그는 홀연히 잠든다. 양압기도 없이 차 뒷자석에 앉아 아주 편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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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16 02:55:39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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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째 해준 모드로 들어와있는 것처럼 딱 4시간을 넘기지 못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내 잠을 빼주고 싶네요, 건전지처럼.” 은 그래서 무지막지한 사랑의 언어처럼 들린다. 얼마나 사랑하면 수면까지 내줄 수 있는건가. 설령 자신의 새벽에 잠이 뒤미처 온다 하더라도 상대를 잠으로 밀어버리고픈 마음이라니.
한참 뒤척이다 잠에 빠졌지만 입면을 유지시키지 못해 떠지는 눈에 바로 조명을 켰다. 퇴고없이 글을 날리고 다시 잘 수 있게 기대어 보는 건 헤결 뿐이다. 근 일주일 간 집중적으로 봤다. 가만히 눈감고 있으면 도저히 잠의 소용돌이로 빠질 새 없이 잡념에 이리저리 휘청였으므로 들을 게 필요했다. 책 읽듯 묵독으로 대사 따라하다보면 해파리가 되어 물에 떠다녔다.
아마 다시 그리 하겠지만 잠시 눈을 떠 생각을 가다듬는다.
요 며칠 강박적으로 기록하려 한 것도 원인 중 하나일테지.
260215
다만 매섭게 뛰는 심장을 한가득 껴안고는 간다. 마치 음식이 얹힌 것처럼 속이 메스꺼워진다. 불편하다. 불안하다. 겨우겨우 찬바람으로 진정하고, 복잡해진 머리를 달래려 심호흡을 해보지만 이도저도 안된다. 전부 꼬인다.
간만에 재미있는 이벤트가 생겼는데 놓치자니 아쉽기도 하고, 글이란 게 쌓아둘 때 쌓아두지 않으면 괜히 아쉽다. 일상에서 소재를 끄집어내야 하니 쓸만하지도 않고. 아. 지금도 눈만 가늘게 뜨면 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선하다. 벌써 늘어졌어……. 테이프를 얼마나 돌려본 거야. 으슬으슬 오한이 든다. 속은 울렁인다. 더 확장시키기 전에 어서 잠으로 도망가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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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16 07:03:13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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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해서 뒤척였다.
240322
나는 아직도 그 말이 복선 같다.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하자마자 나와 당신의 세계가 갈라졌다고 믿는다.
240323
ねえ、できないこと 叶わぬこと
있잖아, 할 수 없는 건, 이룰 수 없는 건
何もないと思ってたんだ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어
240324
잘 보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뒷자리가 당신이었다.
240418
모두 엎드려 잠을 청하는 시간에 나와 당신은 교탁 앞에 경계를 친다.
당신이 익숙하게 쓴 한자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진 적이 있다.
“왜 이렇게 조폭처럼 걸어, 이리 와봐.”
언제나 등 뒤에 벽이 있는 것처럼 등을 쫙 펴.
240419
성냥을 빠르게 긋는다. 바람을 오른손으로 막으며 무릎을 꿇어 마른 장작에 가져다 댄다. 이윽고 세를 넓히며 등장하는 불꽃을 본다. 나의 온도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인데, 당신을 되새기면 파란 불꽃까지는 아무런 무리 없이 볼 수 있었다.
240429
그런데 이런 장면이라니 너무 잔인하다. 나는 울었다. 울부짖었던 것도 같다. 가지말라고 했던가. 바다내음이 짙었다. 내가 가지말라고 해봐야 떠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240719
처음엔 분명 불투명한 가래침이었던 게 깨어날 때쯤 되니 케찹같은 농도와 색을 지닌 액체를 토하고 있었다. 119 좀 불러봐. 그러고도 사람들 앞에서 불명의 액체를 쏟아내다가 꿈에서 깼다. 하도 희한한 꿈이라 해몽을 찾아봤더니 역시 개꿈이다. ()
보고싶다.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구전신화 속 인물 말고 진짜를.
240830
여전히 난 그 기억의 여름 속에 있어
너도 알잖아 I'd be nothing without you
당신이 고른 책의 구절은 지난 고민을 반영하고 있었다.
부치지 못한 편지에 쓰인 ‘잃어버린 여름’을 찾아낸 것 같다.
240922
지키려던 건 아니었는데 야 싸워 싸워 하면서 개판으로 싸울 때, 정권 지르는 그 느낌 너무 생생했다.
241125
코트입고 해맑게 웃고 있으면 난 뭘 해야하나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고 현실에서 체할 정도로 누군가를 좇아가면 꿈에선 당신이 나와 균형을 맞췄다. 무슨 꿈을 그렇게 많이 꿨는지. 24년은 꿈일기 지분이 아주 높았다.
136
이름없음
2026/02/16 10:21:46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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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2
그때 잠시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중력이 일시적으로 매우 강해 시공간을 휘어버렸으므로, 심장이 달음박질쳐 청각이 흐려졌다. 어정쩡한 자세로 나도 당신을 껴안았다. 예상보다 마르고 판판했다. 그때 우리 분명 나란했다고 생각했는데.
신맛을 너무 잘 느껴서 탈이라고 했다. 나도 그랬어. 맛있게 먹으면 주려고 했을텐데, 열매는 받지 못하고 내내 당신 책상에 남아있었다. 공통점을 찾아내는 대화가 퍽 즐거웠다. 아마도 단맛과 아마도 신맛에 대한 이야기는 그때 한 거였다. 당신은 그 열매를 ‘아마’ 버리게 될 것 같다고 했다. 미안하니 남겨두는 거였겠지.
250113
창문 밖으로 싱그러운 녹음이 흔들거리는 여름의 초입에 나는 때이른 입수를 해버렸다.
천장에선 덜덜거리며 선풍기 날개들이 돌아가고, 손바닥만한 스피커에선 전자음으로 증폭된 당신 목소리가 전해져 귀를 울린다.
250114
그날은 유독 조용하고 차분했다고 기억된다. 마치 내가 당신의 아우라를 살짝 훔쳐오기라도 했다는 듯.
수더분한 잔짐이나 옷가지 없이 차 안은 텅 비어있었다. 오래됐지만 잘 관리됐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반짝반짝 잘 닦여 있었다. 아마 글러브 박스에도 별다른 무언가가 없었을 것이다. 껌이나 주전부리, 생수병 같은 잡동사니도 전혀 없었다. 주인과 차가 닮아있었다.
250223
초조히 편지함을 새로고침한다. 그러다 시간을 흘려보낸다. 가끔은 답신이 오기까지 기다리기가 싫어서 접었던 적도 있다. 당장 두어시간 전까지만 해도 왜 안 오지, 싶었다. 무릇 편지라는 게 그런 일이니 편안히 기다려보자 해도 쉽지는 않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오는 불안에 대해 생각한다. 마음 쓸 곳에 확실하게 쓰면 잊어버릴 수 있을까.
250224
생각을 놓아버릴 자유를 주라고 말한다. 결국엔 내가 틀렸다. 아집을 부리며 놓지 못하고 있던 건 나 하나다. 애쓸 필요도 없이 흘러가게 두면 알아서 흐른다. 늦지도 않았어. 이제라도, 이제부터라도 그냥 가만히 두자.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어떤 파장에도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 못하겠으면 최대한 빨리 돌아오면 돼. 그러다 결심이 서면 아예 눈앞에서 치워버리겠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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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16 10:25:26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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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해둔 고민은 일 년 쯤 되면 풀린다는 걸 알게 됐다. 시간이 더 필요하댔던 건 진짜였다. 무언가 “고치고 싶다”고 내게 말하면, 나는 기다린다. 고친다. 고쳐진다. 그것을 미래의 내가 읽으며 깨닫는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묘하게 퍼지는 쾌감을 잃기 싫어 기록을 이어간다. 그때의 고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안도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자기파괴적 주장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탈출구로 기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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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17 21:57:24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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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없어도 청룡열차를 탄다. 눈 감으면 떠다니는 증상은 사라졌지만, 식욕 감퇴에 적잖은 양극성 감정은 여전하다. 만나면 다시 돌아오겠지. 눈 감으면 자꾸 시간을 되돌려 그때 장면을 쓰고 다시 쓰겠지. 오랜 버릇이다. 잊기 싫다는데 뭐하러 휘발시키려 하나. 나쁜 기억도 아니니 괜찮다.
혼자 마음 속에서 뛰놀다 지쳐 쓰러지고, 우물 하나 깊게 팠다가 메우고, 시소의 균형점을 찾으려 살살 걸어본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이 보고싶다. 괜히 선인들이 수련한다고 폭포수 맞으며 인생무상, 색즉시공, 하며 불교 경전 외우는 게 아니었다.
새해 기념 대청소 할 때 한뼘만큼 컸다고 느꼈다. 그런데도 사랑 방식은 고치지 못하는 모습 보면 성장과는 무관한가보다. 이러니 생각이 많고 실전에서 담백하지 못한 걸까. 그래도 이번엔 힘 많이 뺐어. 남은 건 고프만적 자아에 모두 달려있다. 엄연히 말해서 당장의 나는 아니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는 그저 과거의 나이므로.
뽑힌 사랑니 자리에서부터 뻗어오는 통증은 줄었는데 이젠 잇몸이 가렵다. 이미 유치 다 빼고 평생 써야 할 이 받은지가 한참인데. 새 이가 나려는 것도 아니고 미친듯이 가렵다. 차라리 몸이 가려웠으면 싶다. 벅벅 긁기라도 하게.
생각이 많다. 정제된 문장으로 완성시킬 시간조차 없다. 쳐내지 못할 속도로 공급된다. 고르고 고른 선곡도 진정시키지 못한다. 가삿말 보며 이게 무의식적으로 남아 상상에 보탬이 됐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죽을 맛이다. 이 노래는 왜 걸어놨을까. 저번에 그때 그거. 뭐였더라. 지난날의 내가 착실히 플레이리스트까지 짜놨었다. 보고서는 한참을 소리내어 웃었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답게 가라는데 나답게가 뭐였는지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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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19 06:13:10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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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오늘 두시에 온다면 나는…
잠이 안 와서 다섯시부터 뒤척이나. 캔들워머를 몸에 가까이 붙인다. 울렁이는 기분에 엊저녁을 대충 먹었더니 몸을 데울 연료가 없어 으슬으슬하다. 감기 올랑말랑할 느낌, 손발이 차다. 평소라면 뜨겁다고 생각했을 워머가 따뜻했다. 핫팩처럼 감싸쥔다. 온기가 손바닥을 빠르게 덥힌다.
말그대로 번쩍이었다. 눈뜨고 보니 다섯시 정각이었다. 헤결과 심호흡에 기댔지만 80bpm에서 떨어지지 않으니 노래로 환기시켰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말짱해졌다. 곧있으면 사위도 밝겠지. 반드시 떠오를 해를 기다리다니. 돌다리 두 칸 세 칸씩 뛰어넘는 것처럼 잠으로 도망치고 싶었는데 만끽하게 생겼다.
뒷목에 닭살이 돋았다가 확 감춰진다. 가만가만 쓰다보면 신체 반응에 더 집중하게 된다. 숨은 어떤지, 심장은 어떤지, 손가락 끝이니 발가락 끝에서 전기가 튀진 않는지, 피가 모자라다 느끼진 않는지. 물을 아무리 마셔도 혈액이 모자란단 착각에 휩싸인다. 소금이라도 들고 다녀야 하나. 농도가 필요했다. 절대량이 모자란 게 아닌 듯했다.
어떤 대화를 하면 좋을지 미친듯이 찾고 있다. 기왕이면 봄을 조금만 앞당기고 싶었다. 이런 겨울은 겨울도 아니긴 한데, 향초의 향이 아니라 계절로, 시간으로 앞지르고 싶었다.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서서히 스며들고 싶었다. 잘린 껍질에서 나온 입자가 폐포 하나하나에 각인되듯.
어떤 향수도 완전히 동일한 향으로 맡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접 알아내고 싶었다. 사실 내 체향하곤 완전히 달랐다. 섞이니 매력이 반감된다나. 차라리 이건 어때요? 하면서 뿌려준 향이 훨 나았다. 그래서 당신에게 착향되면 어떻게 변주될지가 매우 궁금했다. 고작 이런 이유 때문에 벌써부터 잠이 안 오나.
그걸 꼭 알아야겠어? 몰라도 되잖아. 잠부터 자도 되는 거잖아~ 라고 투정 부려봐도 눈꺼풀은 좀체 무거워지지 않는다. 어쩌겠어. 내 몸이라고 전부 내 의지대로 될 거였으면 지난밤 겪었던 불면은 다 거짓이게. 차라리 읽다가 접어둔 어려운 책을 꺼내 한장 두장 넘기다 잠 구덩이로 차여버리는 게 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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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20 13:00:46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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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싱글생글하면서 들어왔으면 좋았으련만, 차라리 현실에 가까운 것은 이쪽이었다. 천천히 되씹는 동안 교훈을 많이 찾아냈다. 줄곧 이런 관계에서 충전해왔으니 이제는 바꿔나가야만 한다는 것.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최근엔 영역이라는 개념에 골몰한다. 영역, 온전한 내 영역이 존중받길 원한다면 먼저 상대를 존중해보자. 필요성은 줄곧 제기되어왔다. 아무리 손뻗어도 닿을 수 없는 게 있다, 그런 마음조차 갖지 않아야 한다. 제한하지 않으면 실수를 반복할테니 강하게 가자.
천천히 호흡한다. 피가 마르는 기분은 과한 긴장과 불안에서 기인한 착각이라고 생각하면서 찬바람을 맞았다. 스스로 일깨울 수 없다면 자연의 힘을 빌어서라도 일어나면 된다. 서서히 걸었다. 침까지 맞아도 절뚝이는 다리가 웃겼다. 올라가기 전에 한번 더 보러 오라는 신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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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20 16:38:17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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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떨칠 수 없겠다. 쓰고 나서 강화되는 생각이야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아침엔 아주 쨍한 하늘이었다. 얼마만인가, 하면서도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녹음이 좋아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세상이 모두 빛나보였다. 눈이 안경 너머에 필터를 한 겹 더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할 뿐이었다. 일은 순조로웠다. 다음으로 떠나는 버스가 항상 아슬아슬한 것만 제외한다면. 걸음을 서둘러도 모자란 거리는 뜀박질로 메웠다. 심장이 터져버릴 듯 조여왔다. 가슴께의 옷깃을 부여잡고 한동안 숨을 골랐다.
점심을 먹고 자리잡은 카페의 창가에선 한동안 바람이 불며 구름이 서서히 시퍼런 하늘을 가렸다. 어라, 아침에 맑지 않았나, 하며 사진첩을 열어보니 기억이 맞았다. 분명 깨끗했었는데. 기분엔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감기는 눈꺼풀을 어찌하지 못해 선잠을 잤다. 집중이 잘 안됐다. 결국 끝은 못봤다. 마지막 장까지 꼭 보고 싶었다. 읽는 속도보다 어둠이 빨랐다. 손님이 줄고 줄어, 눈앞엔 중년 부부만 남았다. 다정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끝을 향해 가고싶은 심정이 더 무거웠었다. 그러나 시소처럼 중심점이 차차 이동해갔다. 머릿속이 뒤엉켰다. 해답 없는 미로를 헤메는 기분이었다. 아찔했다. 입안 점막을 모두 벗겨버릴 것 같던 차도 완전히 식어빠진 채였다. 애초부터 냉침해둔 차에 미적지근한 물을 부어버린 꼴이었다. 페퍼민트였다. 답답한 속을 달래려 시켰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조여오는 감각이 심해졌다. 찻잎가루가 약간 가라앉은 마지막 몇 모금을 급히 넘겼다.
아무래도 텄다. 그래, 돌아가지 않으면 황량한 카페 안에서 잡념에게 질질 끌려다닐 터였다. 알아보니 버스 시간은 46분이나 남아있었다. 경유지를 낀다면 기다리진 않을 수 있어도 시계의 배터리가 3%뿐이었다. 자칫하면 환승에 실패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이었다. 결국 한방에 가는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문장이 읽히지 않고 머리를 잠시 들렀다가 손끝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무상한 눈으로 페이지만 넘겼다.
어둠을 넘어 집으로 돌아오니 긴장과 맥이 동시에 풀렸다. 오랜 시간 켜뒀던 스위치를 누가 대신 내려주는 느낌이었다. 외출복도 갈아입지 못하고, 끈적한 땀도 씻어내지 못하고, 홀연히 잠의 입김에 넘어졌다. 단잠이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단했다. 어느 때보다도 긴 하루였다. 오락가락하는 기분 달래며 책장 넘기려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미치진 않고 찬바람 맞으며 서서히 이해했구나. 정확히 무엇을 알아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구름 낀 어둠 속에 홀로 서있으면서 불어오는 찬바람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언어로 표현하자면 까다롭겠지만 ‘알 것도 같다’는 마음만 남아있다. 돌이켜봐도 모르겠음과 앎 어딘가에서 요동치는 내가 보이지만 그게 중요하겠는가. 날이 건조해 쉽게 코피가 흘렀다. 코를 틀어막는 건 미봉책일 뿐이고, 혈관이 출혈을 멈출 때까지 아주 세찬 손길로 짓눌러줘야 한다. 몇방울 흘리다 서서히 멎어갈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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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21 09:14:22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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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지끈거릴때마다 현기증이 인다
기억 속 당신이 희붐한 안개 속에 서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해도 인양되지 않을 결정적인 파편이 있다. 분명 함께 삼켰는데 왜 토해낼 수 없을까. 박히다못해 피부 안에서 녹아버린걸까. 끄집어내는 상상을 한다. 얼마든지 다쳐도 좋으니 원형을 보여달라고.
종종 선 하나를 넘는 생각을 한다. 한번이면 쉽지 않을까. 당신의 불꽃을 쥐고선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 증여라는데 왜 텅 비어있지. 멍하니 감은 눈을 떠보면 숨이 막혀온다. 좁은 방안에 피워둔 강한 불꽃이 산소를 연료로 타오르느라 내 숨을 앗아간 것이었다. 어지럽다. 다시, 현기증.
내일로 가고픈 누군가를 꾸준히 봐왔었다. 억지로 만드려 하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는 방향대로 멀리서 천천히 걸어왔다. 통증을 느끼며 멈추어 선다. 뜨겁고 강렬하다. 타자로부터 넘어온 힘으로 삶을 추동해왔다. 지금보다 몇 뼘은 작은 내가 택한 생존 방식이었다.
반면 의식 층위에서 인지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다고 했을 때라면 고작 삼사년 전이니. 당신은 반드시 충전이 필요한지 물었다. 방식에 대한 것인지, 필요성에 대한 것인지, 의무적인 것인지, 전부 다 묻는 것 같았다. 하나하나 대답했다. 대답 내용은 기억에 없다.
견고한 벽이 필요했다. 벽돌마다 쎄멘 정성스레 발라 쌓아올린. 온몸 힘껏 던져도 다치는 건 나였으면 했다. 실제로 그랬다. 당신을 상상하면 나는 쉽게 곧은 걸음걸이로 돌아왔었으므로. 쎄멘도 비가 심하게 오는 날엔 함부로 타설 작업을 하면 안 된다는 중대한 사실따위 모르고 있었다.
구급차가 창문 너머로 지나간다. 음파가 점차 멀어진다. 적색편이와 도플러 효과는 과학 교과서에서 단짝마냥 나오는 개념이었다. 시뻘건 경광등을 달아둔 앰뷸런스가 멀어질 때 음파와 광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그림을 기억한다. 관측자가 가만히 있고 광원이 멀어질 때는…….
볕이 선명할수록 그림자가 길다. 끄트머리에 얄미운 발로 짓이기는 누군가 보인다. 가만 들여다보니 익숙하다. 오랜만이었다. 여전히 있었구나. 하긴 저것도 나인데. 너는 누구냐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쓸데없이 비장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바라던 건 아닌데 이렇게 자랐어.
그렇게 싫었는데 먼바다에서부터 나는 단단한 손의 감촉을 느끼며 인양된다. 숨이고 생이고 그때만큼 달콤할 수가 없다. 단 한순간을 위해 적절한 때가 언제인지 모르고 기다린다. 눈을 감고 숨을 참고 몸에 힘을 빼면 알아서 두둥실 떠오른다는데, 몸은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지나치게 비장하다. 하지만 경험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다. 그렇게 사그라들었어야 했는데 물 먹혀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몸을 던져 들어와준 당신을 반복적으로 찾는다. 농도가 연해질 때쯤 밤을 헤맨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을 땐 모조품이라도 찾아 끼워맞춘다. 이게 살아낸다는 건가.
음성 없이 울부짖으면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새벽까지 희미하게의 추모 산문을 읽고서는 겨우 꺼이꺼이 울었다. 심장을 갈라 회칼로 긋는 듯한 날카로움이 퍼졌다. 관통하는 듯한 얇은 바늘의 서늘함도, 잘려진 살점의 비릿함도, 전부 현실감각처럼 다가왔다.
기억하고 아파하지 않으면 부존재 증명만 반복됐다. 찾아나서기 위해 억지로 쥐어짜냈다. 아팠다. 기억했다. 악순환 속 행진을 반복하다보면 안개가 걷히고 있다는 착각에 휘말렸다. 저 안개 너머 서있을 당신이, 정말로, 있었던가.
사랑이라고 말이나 하지 말지. 이룰 수 없을 거라 단정해버려서 우리가. 아니, 내 세계만 동떨어져 버린 셈이지 않느냐고. 그러니 다시 와서 아니라고 취소하겠다고 바보처럼 웃어보라고. 아무리 외쳐도 답은 없다. 퍼지는 메아리. 관자놀이에 우지끈한 통감이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을까.
아—
돌아갈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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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23 09:17:48
ID : 6mFjwNAko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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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머릿속 수많은 타자가 내뿜는 에너지를 어떻게 봉해두는가. 중압감은 제어되는 종류인가. 지독할 정도로 훈련했나. 훈련된다한들 흉터처럼 남는 생채기는 치유해야지. 자아를 보호하는 방식은 무얼 채용했나. 건전하고 건강한 거? 아주 가끔 생각한다. 관측 불가능한 사람으로서의 당신을, 역할 너머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상상 속에서 나는 버벅거리는 손길로 연필 돌리기를 하고 있다. 몇번이고 떨어트려 흠집이 간 겉면을 쓰다듬는다. 제도製圖에 재능따위 없는데 웬 연필인가. 그냥 연필도 아니고, 스테들러 삼각연필. 연필심부분부터 몸체까지 시꺼먼 색이라 좋아했다. 손으로 깎아도, 은색 기차에 태워 돌돌 굴려도 검정색 외피가 벗겨진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망상이므로 생각을 위한 생각에 가까운 행위겠다. 크게 아프지도 크게 좋지도 않은 무던한 것이 필요할 때는 일러준대로 호흡하며 떠올리게 되었다.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그러므로 특별한 상상이었다. 강렬하지 않아서 강력했다. 적확히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탐색해본다. 외형은 전혀 다르지만 슬리피우드 속 기억하고 있는 자와 그 분위기가 닮았다.
초기에는 뭘 어쩌겠다는 건지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발화된 내용을 곧바로 곱씹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뭐지? 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선문답禪問答에 가까워졌다. 돌이켜보면 홀린듯이 세션 중에는 무의식이 깨어났다. 의식은 잠에 빠졌다. 여러번 반복해서 “써봤으니” 괜찮아진 게 아닌가 했는데, 발화는 달랐다.
보고싶네.
문장이 아니라 발화로서의 언어놀이를 언젠가 하고싶다. 깎인 추억 속에 남아있는 즐거운 기억만 꺼내 더듬고 싶다. 근황을 새로 고치고, 계획을 들여다보고,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천천히 식어가는 차로 마른 입안을 적시는 상상이다. 바라는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을 테지만. 유사성이 지나치게 낮으니까 시도하면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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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25 16:54:02
ID : 01bhe7unv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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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하다. 오늘도 가는 길엔 구름이었다. 왠지 없을 것 같더라니.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은 괜찮은데, 혼자 생각하다보면 또 멋대로 구렁텅이에 빠질까봐 걱정이다. 잘못한 건가.
날것으로 쓰는 건 좀 겁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럴 정도로 충격받을 일은 아녔다. 어쩌면 멋대로 구는 걸 지켜보느라 화가 날 수도 있는 거다. 머리가 뜨겁다. 열기가 오른다.
몸에선 이상하게 퍼지는 오한이 있다. 비 쫄딱 맞고 감기 걸린 사람처럼 으슬으슬하다. 괜히 시원한 거 시켰나. 찔깃거리는 떡의 감촉이 어금니 뒷편에 남았다. 성가셨다.
어지럽다. 곧 도래할 일정에 찬물 쏟아버릴까 조심하고 있다. 이럴땐 꼭 담배가 말렸다. 펴 본 적도, 필 생각도 없는데 어째서 충동은 일까. 속이 메슥거린다. 어서 들어가서 잠이나 자고 싶었다.
성가신 사람은 안 되는데. 그렇게 만들어버렸다면 스스로 용납이 안 되는데. 왜 그랬지 그냥……. 머리를 쥐뜯었다. 역설같은 감각이 싫다. 뜨거우면 뜨겁기만 하고 추우면 춥기만 하라고.
이렇게 불안해할 일인가? 주머니에 손 넣고 틱틱거리다 문득 깨닫고는 멈추었다. 이렇게까지 강렬한 걸로 받아들여야만 하나. 앉아있는 당신을 쳐다본다. 언제나처럼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다. 되짚어보라고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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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27 12:08:54
ID : 6Y7bB808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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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달걀 두개. 책상위에 굴러다닌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어깨가 닿았다 떨어지고 다시 닿았다 떨어지고 서로 말은 없이 그렇게 갔던 기억이 마치 진짜로 있었던 거처럼 한 두어개 지나갔다.
새벽나절에 잠시 깼다. 잠자리를 가려 잠드는 스타일도 아니라 편안히 잠에 빠졌다. 등판이 더웠다. 온도를 낮추고 시간 확인 후 스르륵 눈꺼풀이 감겼다. 바라던 꿈이었다. 완전히 뭉개지기 전에 얼른 적어야지, 하고는 메모를 켜 비몽사몽간에 남겼다.
일곱시간 정도 됐는데 벌써 글 없이는 회상이 더디다. 삶은 계란 두 알. 왜 등장한 걸까. 공사중인지 임시로 쓰는 나무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다. 껍질과 책상 색이 비슷해 분간이 안 갔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살짝 허벅지를 기대며 별 시덥잖은 얘기나 나눴다.
배고파?
아니요.
배고프면 이거 먹어.
저 계란 까는 거 고수에요.
아니라고 하는데도 내쪽으로 밀어주더라. 힘없이 슥 밀리는 계란과 차가운 손가락이 눈에 보인다. 득의양양해선 툭툭 치고 힘있게 굴린다. 평소처럼 계란 껍질 벗겨내는데 흰자가 함께 딸려나온다. 잘 깐다며, 하곤 소리내어 웃는다. 반면 당신께선 나머지 하나는 가볍게 깐다. 머쓱했다.
진짜 고수라고 말했는데, 바보처럼 노른자나 보이게 했다. 얼른 감추고 곱게 깐 부분을 드렸다. 아직도 살살 벗겨지는 당신의 계란. 꿈이라 그런지 물 흐르듯이 입가 근처로 다가갔던 거 같기도 하다. 생채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까진 나머지 계란은 내 손 안에 쥐여져 있다.
그러다 노트북 화면 같이 보면서 이야기 하고, 불현듯 무너지는 꿈자락을 붙잡아두려다 실패했다. 15분 정도를 집중해서 회상했다. 쓰다보면 장면이 어느 기억에서 떼어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최근의 기억에서 등장인물만 바뀌어 변주되기도 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녔다.
타지에 와서 꿈을 꾸게 되다니. 와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잠자리가 불편했더라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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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2/28 20:55:58
ID : K5amlcnCn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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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제어를 해야겠다 느꼈다. 나쁘지는 않았다. 혼자 있었더라면, 을 가정해보지만 그러지 않았으므로 금방 덮었다. 뚫리는 아픔이 아니라 피부가 쓸린 상처라고 생각했다. 얼른 후후 불고 약 바르자. 말할수록 가벼워졌다. 당신의 의도는 나의 영역이 아니니 불문에 부치자.
그래도 보고싶긴 해, 물론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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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02 06:32:16
ID : dvjAmINAp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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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이런 날은 습관처럼 마지막 트랙을 찾아 듣는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빗소리에 마음을 기댄다. 불안정하고 먹먹한 목소리가 좋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부르는 가삿말이 음절 하나씩 날아온다. 서늘하다. 전기장판 온도를 한껏 끌어올린다. 역시 춥다.
발매된 햇수를 세다가 처음 들었던 날로 돌아가버렸다. 시간이 많이 지났군. 그날도 비가 왔었다. 버스 안에서는 우산이 들려 이 노래가 나와,라고 생각했었다. 미적지근한 장마였다. 날이 개면 커튼을 열고 첫 트랙으로 진입하고 싶었다. 손꼽아 맑아지길 기다렸다.
한 곡만 듣고있다 보면 내리는 비가 공간을 잠식해버릴 것 같아 앨범 반복으로 돌린다. 어제의 여독을 풀기 위해 조금 더 자야하는데. 무얼 적어내리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왜 그런 건지만 붙잡아두고 묻길 바랐지만 상상 속의 얘기를 넘어설 수 없기에 놔둔다.
놔버리자. 간단하잖아. 골몰하지는 말자.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집중할 누군가를 손쉽게 알아낼 수 있을 거다. 너는 웃는다. 그곳에선 열 명도 넘게 찾을 수 있을 거란다. 알고 있는 수많은 지인 중 한 명을 곧바로 떠올린다. 대학과 학과 이름을 대면서 킬킬거린다. 나도 크게 웃었다.
요지가 시원하게 날아왔다. 쭈욱 걷다보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는 것. 틀린 말이 아니었다. 특별한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작에 증명됐고, 시간을 잃은 아쉬움이야 잘 간직하면 그만이다. 잔잔했던 호수에 윤슬이 가득해졌다. 이름도 모르던 자의 한껏 들뜬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그럴 정도의 반가움인가 싶었다.
그런 날이었다. 선베드에서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은 지역과 묶인 채 먼 미래에도 불현듯 떠오를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바람에 날려보낸 음성언어가 고민을 서서히 가볍게 했다. 햇볕을 등지고 그림자를 바라보니 평시처럼 짧았다. 다시, 등 돌려 가자. 닻을 펼칠 방향이 잘못됐다면 수정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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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03 21:19:35
ID : V8782mtut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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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등지고 걸으니 36년만에 돌아왔다는 정월대보름과 개기월식을 한꺼번에 놓쳐버렸다.
네 시간 동안 차를 마셨을 뿐인데 붕 떠있던 궤적이 안정을 찾았다. 앞으로 얼마나 규칙적으로 적용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동굴 속 등불만큼 환했다.
지난 건 잊자. 집착하면 괴로워지는 건 나 하나다. 숨을 고른다. 내쉬는 숨에 심박이 천천히 돌아온다.
149
이름없음
2026/03/07 10:01:27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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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몰려오는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뱉어냈다. 공포 영화에서도 이 정도 충격은 받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 작품은 후반부 결말에서 몰아닥치는 쾌감부가 생략된다. 그런 결말은 마치 환상이라는 듯 화자들은 현실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상상하는 잔인함에 자신이 있다면 『아오이가든』은 수작일 것이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좀 뒤집혀지지만 미학적으로 충분히 가치있다.
늘 그렇듯이 작가의 말이 어떤 이야기보다 더 마음에 와닿는다.
284
종종 그녀를 본다. 그녀는 여전히 죽어 있다. 죽은 후에도 삶은 계속되는 모양인지, 그녀의 얼굴은 부쩍 늙어 있다.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평온해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평온해보였다면 죽음이라는 게 대단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285
꿈속에서 내가 죽은지 오래된 그녀를 위로한다. 그녀는 내 위로를 받으면서 여전히 죽은 채로 있고,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287
『아오이가든』은 내게 가장 가까운 이름이자 가장 먼 이름이 된 소설이다. 소설을 쓰다 막막해지면 이 소설을 쓰던 때를 떠올렸다. 부러 멀어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다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 소설을 읽으면서 종종 한 시절을 잃은 듯한 상실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아오이가든』을 읽을 때면 특히 그러했다. 이 책이 작가로서 나의 첫 책인 것을 여전히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어떤 이야기를 서술하든지와 관계없이, 마지막장에 실리는 작가의 말은 항상 담담하게 잘 눌러 쓴 문장이 실려있다는 점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되곤 한다. 작가의 말을 읽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면 영원히 미완으로 남는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흘려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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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07 21:38:35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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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시체들
로 시작하는 그의 작품은 정보나 각오없이 맞대기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강의 작품을 읽었을 때 맛봤던 두통 이상의 것을 느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컨디션 문제라면 그날보다는 확실히 어제가 좋았다. 종이책과 전자책 차이가 그토록 크단 말인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계곡에서 건져낸 부분적 주검이나 개구리, 쥐, 등 뒤에 업혀 무게가 줄어드는 동생 같은 소재가 주는 감각이 생생하다. 명치께가 묵직하다. 꽉 막혀있다. 길다란 막대로 틈을 만들어주고 싶다. 길이 없어 그런 건지도 몰랐다.
근원을 들여다보면 인간도 동물이었다. ‘한낱’ 동물이라면 쉬워보이겠지만, 혹자의 말대로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뇌 용량이 압도적으로 큰 고등생물임을 강조해봐도 역시 동물이라는 개념에 포섭됐다. 쥐.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쥐의 원형을 봤다. 인간은 실험쥐였다.
우습지 않은가? 아마 동물 중에 스스로가 짐승임을 부정코자 하는 생물은 인간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근대에는 그런 생각에 폭발적으로 근거를 찾아붙였다. 과학의 가파른 상승곡선과 터빈의 발명, 산업혁명 등은 인간중심주의 신화를 굳건히 했다. 현대에 와서야 성찰하고 많이 뒤집혔다지만 여전하다.
이 신화. 인간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며, 피라미드 속 영원한 강자라는 신화를 무너뜨리는 탈권위가 마음에 들었다. 작품에서 개구리와 실험쥐와 주검과 인간은 모두 등가였다.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그랬다. = 양옆에 사람과 개구리를 놓으면 항등식이 성립됐다.
산 자와 죽은 자 역시 동치였다.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비일상적 공간인 동굴에서 일하는 여자는 아이를 만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왜 하필 아이였을까? 미신이지만 아이들은 영가를 잘 본다는 속설이 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성인 관광객들은 여자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다 읽고 나서 첫 장으로 돌아오니 안녕, 시체들이라는 인삿말에 급소를 때려맞은 듯한 얼얼함이 들었다. 나는 헤드기어와 복싱 글러브를 낀 채 대자로 뻗어버리고, 책은 유유한 표정으로 스텝을 밟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천천히 껌을 씹는다. 이제야 체기가 좀 내려간다. 막혔던 위장에 가느다란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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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11 11:24:48
ID : NvxBdTTU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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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할 시간이 없다. 아프거나 그립거나 슬퍼야지 착즙되는 액체가 있는 법인데 밍숭맹숭한 물만 떨어지니 아쉽다.
셋 다 안되면 다이브라도 해야될텐데. 무엇에 뛰어들란 말인가? 선득한 공기를 가르며 나아간다. 물과 친해지면 건강해진다더니 정신까지 회복될 줄이야.
봄 언저리다. 위도를 얼마나 거슬렀다고 꽃은 없고 기온도 낮다. 누굴 시샘해야 이토록 추울 수 있나. 한껏 껴입은 행인들이 답답하다. 어물쩡거리는 계절에 대고 소리치고 싶다.
늦어지기 전에 넘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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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15 00:27:23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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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땀 뚝뚝 흘린다. 손수건으로 슬몃 훔친다. 뛰는 듯 걷다보면 시큰거리는 통증이 온다. 3km 지점에 임박했다. 운동 후 심박을 천천히 되돌리려면 갑자기 앉거나 서는 방식으로 중단하면 안 된다. 좁은 보폭으로 숨을 크으게 들이마쉰다. 서서히 내쉰다. 잠깐 숨을 참았다 폐가 부풀어오르는 감각을 느껴본다.
사람은 꽤 많았다. 규칙없이 걷는 사람과 뛰는 사람이 혼재돼있어 불편함과 고양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느린 사람을 앞지르고 빠른 사람에게 밀린다. 아무렇게나 튄 물방울을 스퀴지로 훔치는 것처럼 뇌 이곳저곳에 산재한 잡념을 쭈욱 밀어 배수구로 넘겼다. 끄르륵, 물방울이 와류를 타고 멀어져갔다.
바람막이의 모자가 열기로 꽉 차 뜨끈뜨끈했다. 참고 참다 벗었다. 시원한 공기가 뒷목을 간지럽혔다. 심박수 알림이 노래를 제멋대로 끊곤 했다. 설정해둔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무척 고단했다. 조금만 빨라도 곧바로 흥을 깨버리는 덕에 웃음이 터져나왔고, 좀 쉰다싶으면 어서 뛰라고 재촉했다. 뛰고, 걷고, 뛰고, 또 걸었다. 하고 싶어서 한다는 감각이 왜이리 낯선지. 신기했다.
CBT까지는 아니지만, 잘못된 생각이 들 때마다 휘파람을 불었다. 집중해 부르는 세 번이면 날아갔다. 좋지 못한 감정과 생각의 상호작용 연쇄를 끊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열쇠가 됐다. 좋은 생각으로 온전히 채울 수 없다해도 나쁜 생각 몇몇개는 걷어낼 수 있지 않은가. 물비린내 나는 빨랫감은 언제든지 걷어와 다시 세탁할 수 있다. 햇빛 들지 않는 실내라도 세탁세제와 섬유유연제만 신경쓰면 잘 마른다.
봄에게로 달려간다. 수압을 이겨내는 연습을 했더니 지상에서 나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153
이름없음
2026/03/15 00:50:36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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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0
사랑해, 사랑하지 않을 테니 돌아와.
이게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모른다.
아니, 너무 잘 알지. 그러니까 선택하는거잖아.
260303
문장이 잠시 머물다 간다.
사랑해, 사랑하지 않을테니 돌아와.
머무는 문장까지 막을 수 없단 걸 잘 안다.
오늘도 불현듯 문장이 떠올랐다. 쓰지 않아도 흘러갈 문장이었겠지만 굳이 쪼그려 앉아 퍼올린다. 누구에게 하고픈 말이었는지 잘 안다. 사진 속에 멈춰 선 채 웃고 있는 당신, 미치도록, 보고싶다. 이대로 잠들테니 꿈으로 걸어와. 웃으면서 내가 가르쳐준 건 다 잊었는지 물어봐. 왜 아직도 불량하게 걷느냐고. 바라고 바라도 검은 꿈만 꾼다.
154
이름없음
2026/03/15 23:18:15
ID : mIIE7hxTRu6
0
15
뇌의 일부가 여전히 그를 추종했고, 그것에 안도했다.
20
그들은 의지가 빼어난 나머지 박약한 의지를 손쉽게 비웃었다.
37
더 이상 자신의 신체 통제권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었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44
어쩌면 죽음의 경계에 다가갔던 순서대로 삶 쪽으로 더디게 되돌아오는 중인지도 몰랐다.
81
희망이 없어서 우정이 번성하던 시기였다.
115
오기는 창밖이 시커멓게 잠겨드는 걸,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가 일렁이는 게 누군가의 손짓처럼 보이는 걸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했다.
149
“산 게 근사합니까? 추접하죠. 악착같이 그 좁은 구멍에서 살려고 해댈 텐데…….”
173
잃은 게 그것 뿐인 것은 아니었다. 모두 잃게 될 줄도 모르는 채, 얼마나 오래전부터 인생에 헌신해온 걸까.
180
사랑을 잃어도 세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200
정원 한 가운데에, 오기가 누워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쪽에, 시커멓고 커다란 어둠이 고여 있었다.
209*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편혜영이 주는 불편함과 불쾌함을 사랑한다. 악착같이 살고 싶었으나 결국 죽음을 바라게 된 오기의 심정에 이입하게 만드는 설득력이 좋았다.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만큼 죽고 싶어할 때가 있다. 이대로라면 죽는 게 나을 듯한 상황도 존재한다.
큰 사고를 당한 오기는 살아내봤자 두 팔과 상반신만 움직일 수 있다. 세월을 바친 학교에서는 타의로 사직했다. 남은 것은 다스케테쿠다사이라고 중얼거리는 장모 뿐이었다. 기이한 동거였다. 삶에 남은 오기는 죽음으로 향하고 싶어했다. 작은 고통에도 행복감을 느끼던 그는 찢어지는 피부에서 나오는 비릿함을 맛보며 죽음으로 거칠게 포복했다.
마침내 하나 뿐인 가족이 만들어낸 나락의 구덩이로 처박혔다. 소설이 허무히 끝났다. 울면서 사라진다니. 생각해보면 서래와 유사하게 죽은 건데도 오기의 것은 일견 타당하고 서래는 부당해보인다. 서래는 어딘가에 살아있을 사람처럼 느껴지고 오기는 그대로 백골이 된 채 바스라져 흙에 양분을 줄 것처럼 여겨진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다.’, ‘삶과 죽음을 동일한 정도로 원할 수 있다.’, 와 같은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철저히 자의적인 분석이나, 편혜영은 삶 이후/너머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자체가 연속된 과정임을 인생이라고 인식하는 듯하다.
애꿎은 정원을 전부 뒤엎어 구덩이를 만들었던 아내/장모처럼 조금 더 파헤쳐보면, 둘의 가치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의 소설에서 죽음은 ‘생존’ 이상 혹은 이하의 무언가로 여겨지지 않는다. 정확히 생존만큼의 질량을 갖는 것으로서 죽음은 등장한다.
그가 죽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가치판단한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게 아니다. 절댓값을 보자면 그렇다는 거다. 1과 -1은 절댓값 기호를 씌웠을 때 동일하다. |1|은 |-1|과 같다. 그런 것처럼, |삶|과 |죽음|이라는 수식을 만들어봤을 때, 적어도 편혜영에게는 저 사이에 등호를 끼워넣을 수 있는 힘이 있다. 『홀』은 그런 점에서 역설적이다.
중반까지 오기는 삶에 대한 의욕으로 가득차있었다. 특히 왼손이 움직였을 때 잠시 그랬다가, 더는 나아지지 않는 다른 기관들을 보며 미칠듯한 절망에 빠졌다가, 오른손가락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의욕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후반에서 포복으로 방을 빠져나가면서도 낮은 철책을 선택해 산책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거대한 방벽처럼 장모가 나타나자 의지가 꺾여버렸다. 삶에 대한 의지 없이는 누구나 죽음의 공동空洞으로 굴러떨어진다는—자의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을까.
단숨에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이 책을 중도에 덮는다면 의지력이 대단한 자일테다. 끝을 보지 않고는 궁금증에 시달려 불면이 올 정도였다. 아직 읽지 않은 ‘선의 법칙’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일부러 발췌독했는데, 편혜영의 문장이 주는 힘이 느껴지지 않아서 별로였었다. 아무래도 읽는 방식이 문제였겠지. 무얼 판단하겠나. 그저 읽는다. 언제나 편혜영과 작품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하나 낙심한 것이 있다면 작가의 말.
어른의 미래도 그렇고 홀도 그렇고 작가의 말이 없다! 하지만 그마저도 의도라고 생각하면 이해는 된다. 없는 편이 더 좋았다고 생각했겠지. 없어야지만 작품에 여운을 느끼고 곱씹게 할 수 있다고 본 거겠지. 그래도 돌아서면 아쉽다. 해설은 없어도 되는데 항상 말미에 담긴 몇 마디를 읽고 싶었다. 이 작품을 퇴고하고 나서의 소회가 무척 궁금했다.
그런 아쉬움으로 안녕. 나는 내일로 가야지.
155
이름없음
2026/03/16 23:48:39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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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에 반짝거리는 조약돌만 모아도 근사하지 않을까. 발바닥이 델듯 달구어진 검은모래 해변을 맨발로 걷는다. 파도가 자꾸만 가까워진다. 아니다. 내가 파도에게 다가갔나. 성큼성큼 새긴 발자국이 금방 지워진다. 정처없이 나아가기만 하는데도 들떠있다.
자기 전에는 좋은 상상을 하란다. 꿈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면서.
날카롭게 박히는 거친 모래가 있어도 마냥 나아간다. 왼발바닥 중앙을 아프게 하는 조개껍데기가 있어 줍는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각도를 바꿀수록 빛을 반사하는 부분이 달라진다. 아름답다. 한적한 해변에서 들리는 파도소리라니, 전세낸 기분이다.
자세히 보니 안경이 없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들어오는 정보란 온통 파랗거나 검을 뿐이었다. 주머니를 뒤져도 없고, 상의 목깃에도 걸어놓지 않았다. 눈도 없이 도대체 왜 걷고 있는 걸까. 그냥 걷고 있다. 저멀리 버려두다싶이 두고 온 서핑보드 위에 온갖 짐까지 부리고선 한발 두발 내딛는다.
좋은 상상이었는데 궁금해졌다.
파도로 자꾸 가까워지고 있다. 바다수영까지 능숙하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상상인가. 정말 혼자 있나. 아무도 없는 해변이라면 무얼 믿고 짐 다 버려두고 나다니는 거지. 시력은 왜 바닥에 떨구고 다니나. 대답은 없다. 단지 걷는다. 시뻘건색 서핑쇼츠에 무늬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하와이안 셔츠 차림이다. 시계도 휴대폰도 없다. 문명의 이기에서 멀어졌다.
왜 거니는지. 언젠가는 반드시 그럴 거라는 믿음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지. 궁금해지면 잠과 멀어지지만, 호기심은 솟구쳤다. 더 깨어나기 전에 어서 도망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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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18 09:26:22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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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다.
많은 기억이 있다. 모두 내던지고 차가운 비를 따갑게 맞던 날, 우산을 칼처럼 휘둘렀던 장면, 투명우산에 기대 누군가와 통화하던 시간, 선명하고 동그랗게 떨어지던 우박의 따가움, 발매된 앨범을 바로 듣던 버스정류장에서의 빗소리, 그리고 오늘. 비가 온다.
누군가와 약속을 잡을 때면 종종 비가 오곤 했다. 전날 밤부터 알 수 없는 근육통에 시달리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깬다. 티비 없이 살면 주간 날씨 예보와 멀어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애써 생각했던 옷차림에 변동을 주어야 하나.
비라는 카테고리의 서랍을 열면 원시적 기억에 가장 가까운 건 따지자면 최악이었다. 홀로 남겨진 작은 버스 지붕을 사정없이 때리던 빗소리. 기억 카드를 꺼내본다. 새파란 비닐 우비를 뒤집어쓴 무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낱낱이 알고 싶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적어도 내가 함께 있다. 뒷자리에 앉아 허탈한 표정을 짓는 꼬마의 등판을 멀거니 보고 있다. 이런저런 좋은 기억으로 덮어써왔다. 테라피 세션에서 전부 끄집어내 해체시킬 줄은 몰랐지만, 결코 나쁜 일만도 아니었다.
오늘로 돌아오자. 코트를 입어야 하는지, 허기진 배에 요기를 할지, 어떤 향기로 나갈지, 신발은 어떻게 신어야 하는지, 우산은 뭘 쓸지…. 사소한 고민이다. 비 오는 날을 싫어한 적 없었다. 어깨와 우산을 간지럽히는 툭툭 소리, 바람이 불면 대각으로 내려 안경에 물방울을 새기는 것까지도.
우산따위 필요 없을 정도로 부는 강풍마저 그립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뛰었던 거였다. 가방만 품에 소중히 안고 젖산을 마구 꺼내 써도 심장 한 번 아프지 않던 날이, 와이파이 신호 잡아가며 겨우겨우 듣던 그 목소리가, 처음 맞아보는 우박 너머로 걷고 있던 당신이 그리운가.
오늘로 돌아오자는 말은 글 안에서 의미 없다. 미등 켜놓고 누워있으면 한도 없이 과거를 펼쳐놓고 그리워하는 게 특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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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22 09:22:57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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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다보면 생각이 사라진다. 자연스레 노래와 심박에 집중하게 된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내리막이다. 넘어져 무릎 깨질까봐 그렇다. 그토록 바라던 길인데도 근육 결마다 힘이 빡 들어가서는 살살 걷는다. 물에서 허우적대다가 산으로 돌아오다니.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편지가 발송되었다. 발목 유연성이 문제일까. 왜 이렇게 안 되는 걸까, 하며 킥판을 썼다 버렸다가 난리였다. 대번에 늘 수 없겠지. 물과 친해지기가 목표였는데 애진작에 달성했고 이제 올바른 자세로 착지할 줄도 안다.
배우는 중에는 습득이 계단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흔히 망각한다. 눈앞에 보이는 성과를 쫓는다. 매일 가는데 왜 안 늘지. 심지어는 어제의 내게 진다는 좌절감도 맛본다. 분명히 같은 ‘나’라고 믿었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건가. 다시 몸부림치지만 제자리다.
긍정적으로 돌이켜보면 좋아진 점은 많았다. 레인 밖으로 나오자마자 겪었던 현기증이 사라졌다. 운동 후 심호흡할 때 심박이 쉽게 안정됐다. 눈 없이도 익숙하게 나다닌다. 일종의 도전이었다. 언제까지 안경과 수경을 번갈아가며 쓰고 벗을 수는 없었으니.
희한하게 마음은 편하다. 반복적으로 말하기도 했었다. 바쁘겠지. 답장이라는 게, 반드시 와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도달하지 않은 증여일 수 있다. 나의 행동에 반드시 수반되는 반향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태도도 어리석다. 켜켜이 쌓아올린 문장이 아니었다면 불안했겠지.
주말 아침부터 하는 일이란 뻔하다. 평안하길 바란다는데 그렇게 해야지. 평온한 일상만큼 쟁취하기 힘든 상태도 없다. 그저 읽는다. 쓴다. 먹는다. 나간다. 단순반복이지만 루틴이 주는 견고함을 체감하고 나니 그러지 않기도 어려웠다. 이게 내가 만드는 벽인건가.
그래도 그리움 한 스푼 잔잔히 떠먹는다. 열심히 지킨 뒤 돌아가면 여름이라도 성한 몸으로 올라갈 수 있을거라 믿는다. 검은 꿈에선 도통 찾을 수 없으니 내가 가면 좋겠지. 두 발로 뛰어가면 더욱 좋을테지. 언제까지 와달라고 앉아서 힝힝 우는 소리나 내나. 다리를 뿐질러버려도 기어코 가야만 하는 걸.
아, 더는 미룰 수 없다. 반납 기한이 매섭게 쫓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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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22 23:43:21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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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다. 검은 꿈의 장막을 찢고 당연하다는 듯 등장해줬으면 한다. 혼자 듣는 노래도, 휴대폰에 갇혀 설렘을 이야기하는 일도 지쳤으니 어서 파동을 일으켜줬으면 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허공으로 내뱉는다. 한숨이 길다. 어디 땅 한 번 시원하게 꺼져보라지.
심지부터 몸통 중앙까지 까맣게 타버린 성냥을 버릴까 하다 잘 보이는 곳에 뒀다. 머리부터 상체까지 새까만 붕대로 돌돌 말린 미라처럼 보였다. 밍숭맹숭한 샤인머스켓 과즙이 입안을 가득 메우는 순간이 떠오른다. 더 맛있는 거 고르는 눈이 없어서 미안해.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다 미안해. 다가 뭔데. 나를 붙들고 서 있다. 교복 반 체육복 반인 내가 와서는 껄렁껄렁 시비 턴다. 얄쌍하니 보기 좋네. 당신에겐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나 하고 앉았다. 거기 있으면 횡단보도나 넘어봐. 안 가겠다는 말 취소하고 차가 오든 말든 뛰어가라고.
개인화의 오류를 범한다는 걸 배웠다. 자책한답시고 일부러 자가당착의 굴레 속에 갇힌다. 5분이든 10분이든 시간을 정해서 나쁜 생각을 하는 건 괜찮댔다. 탱고는 둘이서 출 수 있지만 이별은 혼자서도 한다는데 왜 반대같냐. 춤은 혼자서 출 수 있다쳐도 이별은 가급적이면 같이 해야한다.
내 눈앞에서 모진 말이나 하고 사라지든지, 안녕 하고 입안에서 잘 나오지도 않는 껄끄러운 착한 척 할 수 있는 기회라도 있든지. 어느 쪽이든 좋으니 하고 싶다. 마음이야 이미 비행기 타고 붕붕 떠 있다. 차디찬 대리석 하염없이 쓸어내린다. 잠깐이라도 따뜻해지면 좋을테니.
하루에 한 번은 작은 티스푼으로 홍삼 진액 떠먹는 것마냥 찾게 된다. 입에도 쓰고 마음에도 쓰다. 나한테는 책임도 잘못도 없다는 거 누가 안 말해줘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나. 외부에서 충전 안 되면 이런 식으로 퍼먹는다.
시간 지났어. 이제 그만 가야지, 내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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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23 11:32:22
ID : 6lvilyKY2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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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지쳤다고 했는데 악몽처럼 나타났다. 빌어먹을 순환을 끊으려고 휘파람을 불었지만 던져놔야 사그라들 것 같다. 꿈은 반대라더니 그래서 나타났나. 이 악물고 증오하진 말아야지. 마음을 두는 순간이 길어질수록 괴로움은 비례한다.
어짜피 뛰어들고 나면 아무 생각도 안 나겠지. 지금은 수영이 언제쯤 능숙해질지가 최대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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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24 12:18:16
ID : 3yGtAjg42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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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제일로 꽂혀 있는 것은…
상대방의 일방적 호의에 기대는 연락의 지속 여부.
너는 “모든 걸 다 알려고 하지 마, 그럴 필요는 없어.” 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궁금하다. 행인이 보란듯이 횡단보도의 아스팔트 부분만 밟으며 나아간다. 그런 심정이다. 천천히 흐르는 개울에 돌다리가 놓여져 있어도 누구 보란듯이 냇가부분에만 발목을 푸욱 담으며 걷는다. 청개구리식 사고다.
궁금하다. 궁금해 죽겠다. 이럴 때면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놓인 충전기의 양 끝을 모아 원형을 만든 뒤 한 쪽만 꼰다. 시작도 끝도 없는 뫼비우스 띠 위를 천천히 걷는 기분이다. 왜 궁금한 걸까? 그야 궁금하니까. 아무래도 ‘절대’ 알아낼 수 없을 거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절대라는 건 없는데, 왜 묻지도 않았으면서 이런 망상이나 해서는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다시 괴롭히지 않는 측면으로 돌아와본다. 봄을 알리는 개나리가 창밖으로 지나간다. 일교차가 심하다. 잘 지내고 있을까. 겨울부터 쭈욱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나씩 나아지고 있다 전하고 싶었다. 당신은 평안에 가까운지 알고 싶었다. 무게를 모르는 호의를 저울에 올려본다. 뭘 돌려줄 수 있을까. 생존? 살아낸다는 사실이 증여로 기능하기도 한다는데 그런 언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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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24 12:21:01
ID : 3yGtAjg42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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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바뀌면 다시 과녁이 바뀐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마음도 없고 과할 정도로 생채기를 내는 자학도 없다. 다만 발목에 집중한다.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뛰어든다. 코 점막이 따가워진다. 케헥 쿨럭 크헉. 앞으로 코를 통해 얼마나 더 물을 마셔야 잘할 수 있을까. 두근, 두근, 귀마개를 끼면 심박과 수면을 걷어차는 소리만 들린다. 둥, 둥,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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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24 22:38:18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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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개들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컹컹 낮게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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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찾을 거 뭐 있어? 세상천지가 다 늑댄데.
야생성이 거세된 채 도시 속에 던져지고, 개성을 가진 대체 불가능한 인간이 아닌 부품으로 물화된 인간은 자유의지를 상실해버렸으니 짧게만 살다 죽어가는 짐승보다도 못한 것이 아닐까. 도대체 편혜영에게 동물이란 무얼까. ‘사육장 쪽으로’에서는 개와 그, ‘동물원의 탄생’에서는 사내와 늑대가 특별히 구분할 수 없는 개체값을 가진 채 등장한다.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우습게도 그렇다. 직유로 대놓고 말한다. 너희와 동물원의 우리를 탈출한 늑대가, 보신탕용 혹은 투견용으로 길러진 개가 동일하다는 논리다. 읽어내려가다보면 자연스레 흰 깃발을 흔들게 된다. 불쾌감이랄까, 찝찝함이 거슬리지만 차차 스며든다. 종국으로 다다르면 어느새 그의 논리를 목줄마냥 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차라리 작품 속 개와 늑대에게는 야생성이라도 있다. 우월함을 견주어본다면 짐승인 쪽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왜냐고? 삭막한 도시에 하루하루를 팔아 연명하는 인간에겐 결정적인 무언가가 결여돼있기 때문이다. 야생동물에게는 야생성이라고 하니 인간에게는 인간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두 작품 속 주인공들은 색채 없는 도시에서 삶을 연명하고 있다. “아무리 고개를 뒤로 젖혀도 고층 건물에 가려진 밤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둥글고 기다란 콘크리트 철창에 갇힌 느낌이었다. 새들이 간수처럼 허공을 돌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동물원의 탄생)
다른 하나는 도시 태생이며 벗어나본 적이 없어 일말의 애정을 갖는 경우다. “도심 한복판에 산 적도 없고 도시를 떠나본 적도 없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도시인이었다.”, “그는 폐로 들어오는 도시의 공기가 반가웠다.”(사육장 쪽으로)
노동에 소외된 인간은 관료제 아래에서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치환되고, 본질을 상실한 사람과 야생성을 간직한 동물의 대조가 이어진다. 개는 사육장에서 탈출해 무리지어 나오고 늑대는 동물원의 우리를 넘어 자유를 찾아 떠난다. 그러나 말미에 두 작품 속 주인공은 일상을 견인하는 부품으로 기능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시간을 두고 차차 생각해야 할 문제다.
163
이름없음
2026/03/25 20:01:53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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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참을 쫓겼다.
사람이 많아 한 레인에 넷이 서 있게 됐는데 나만 초급이었다. 초보도 아니고 초급. 킥판을 썼다 치웠다, 레인 한 가운데에서 다급히 착지하질 않나, 실성해 웃다가 물을 한바가지 들이키고, 하여간에 완전히 생쑈였다. 아무도 쫓아내지 않았는데 눈치껏 벽을 차고 나아갔다. 어깨와 하체 전체엔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불편하고 불안했다. 가라앉기 싫어서 필사적일수록 다친다는 걸 아는데도 몸은 반대로 행했다.
한번에 잘하면 그게 물개지 사람이겠냐고. 그런 생각은 안 든다. 물 안에서는 이성보다 감성이 두 템포 빠르다. 어설픈 롤링을 하다 중력에 의해 잡아당겨진다. 푸허윽, 하고 살기 위해 숨을 급히 들이마시기도 한다. 그렇게 해도 심박은 안정권에서 놀았다. 진작 할 걸 그랬나. 장거리 선수할 것도 아닌데 괜히 겁 먹었다. 지금은 벽을 차고 나아가는 그 짧은 순간이 좋았다. 금방 몸에 힘이 들어가서 아쉽지만 연습은 연습이니까 최대한 살랑살랑.
긴장할수록, 더 잘하려 욕심을 부릴수록 처졌다. 직접적으로 대비되니 더 안달났다. 팔꿈치를 직각으로 접어 물잡기 하며 나아가는 분도 있었다. 수면 아래서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양태가 희미하게 인지됐다. 지쳐서 얼굴 근육 꾸기기도 힘겨웠다. 숨을 고르고 다시 출발. 이제 뜨는 건 그다지 무섭지 않다. 어떻게 해야 더 멀리 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상으로 배워도 아리까리하다.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이라는데, 수영에서만큼은 하루하루가 다르긴 다르다. 정확히 어떤 점이 다른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킥판 발차기는 바보처럼 하고 있으니.
언제쯤 편해질까? 아직 물의 문법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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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26 18:31:16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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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불꽃이 되기를
사랑에 빠지는 데 5초면 충분했다. 뜀박질로 달아오른 심장 덕에 흔들다리 효과를 맛봤나. 예상치 못한 노래를 셋리스트의 가장 초입에 넣어뒀을 줄이야. 멀리서부터 둥, 둥, 둥, 둥, 대는 반주의 진동이 느껴졌고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도달한 무대엔 나풀거리는 치마를 입은 갈색 머리칼의 그가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 노래를 불러? 새하얘진 머릿속으로 온몸을 비틀며 오른편 난간을 잡았다.
그러다 노래 중간에 그가 몸을 홱 틀더니 갑자기 내 편으로 손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큐피트 존재 따위 믿지 않고 살아왔는데 거기서 퍽 꽂혀서는 아직까지 좋아하고 있다. 실물이 더 예쁘다던가 하는 비현실적 감상은 없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좋았다. 극악의 음향 환경을 뚫고 나오는 가창력이, 바람이 쎄고 쎈 동네라 머리칼이 하루종일 휘날리는데도 꿋꿋하게 좌중을 압도하는 아우라가 좋았다. 뜻없이 흔든 손에 십 년을 저당잡혔으니 다시 생각해봐도 말은 안 되지만.
며칠을 얼얼한 기운에 빠져 살았다. 상기된 볼을 하고서는 버스에서 미친 사람처럼 쪼갰다. 정면 시점 영상이 올라오자 구간반복처럼 돌려봤다. 당사자에겐 의미없는 흔들거림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무겁게 만들어도 붕 뜬 기분은 끄떡없었다. 분명 찰나였는데 아직도 느린 화면으로 되감기된다. 짧디 짧은 한순간에 어떻게 매료된 걸까. 구름이 잔뜩 껴 흐렸고, 습기를 머금어 축축했으며, 저녁에는 비까지 내렸다. 그럼에도 행복한 기억으로 노래와 함께 박제되어 있다. 노래를 들으면 그의 손인사와 찢어질 듯한 스피커의 먹먹함이 떠오른다.
한 번 더 순환을 돌릴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다. 멀리 떠내려갔다고 느꼈던 마음이지만 불태우기는 쉬웠다. 그저 파이어스타터 하나가 없었던 탓이라면 성냥 한 번 빠르게 그어주고 던지면 됐다. 불길이 주위의 공기를 잡아먹으며 순식간에 일렁였다. 오랜만이다. 힘이 넘친다는 기분이 든다. 이럴 때일수록 경계해야 안 다칠텐데. 원래 뒷산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어그러진 덕에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어디 충전해뒀다가 부족할 때 수급받고 싶다. 트랙에서 뛰어야 하나. 차라리 기진맥진하고 싶다.
시간을 넘어 편지가 오고 있다. 편집증적으로 새로고침하던 습관은 고쳤다. 아무래도 평안에 다가간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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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27 18:34:57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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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나올 때 생각한다. 네 꿈에 나도 나올까. 일어나자마자 왜 너냐고 화냈다가 이내 잠든다. 아무리 눈을 빛내도 바라던 자는 도통 찾을 수 없고 하루종일 검은 장막 뒤를 헤매고 있다. 그러다 불현듯 깨어난다.
내 꿈에 네가 나타난 것보다 네 꿈에 내가 더 자주 등장했으면 한다. 나만 당한다고 생각하면 괘씸하거든. 멋모르고 휴대폰 잡고 실실 쪼개는 꼬라지 마음에 안 든다. 빌어먹을 기억 자동재생 되는 기분이 어때.
성과, 눈에 보이는 성과를 원한다. 준비할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까 어서 내가 넘어가게 해줘. 당신의 편지를 보다보면 호명은 나를 이곳에 묶어놓는 힘이 있었다. 분명했다. 이름 두 글자가 무어라고.
아무것도 아닌 호칭이라 가볍게 치부했건만, 애석하게도 아니었다. 뛰어넘겠다며 이름 하나 결정해서 가장 먼저 알렸더니 뒤에서 훅 밀어주는 힘이 느껴졌다. 나는 힘빼고 유선형 자세 만들고 누워만 있다.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쭉 나아간다.
보고싶은 이유야 많다. 줄줄이 나열할 수도 있다. 잔잔한 호수에 돌 던져 자그마한 파장이라도 일으킬까봐 신중한 것이다. 예상은 하고 있겠지. 실시간으로 언어놀이를 하고싶어 한다는 마음. 잘 드러나지 않나.
언젠가는 언제일까.
불안하진 않고 손꼽아 기다리지도 않고 은은하게 어떤 회신이 올지 궁금하다. 이정도면 원하던 대로 제어되는 듯하다. 치료라 하면 거창한데 진짜 뭔가가 되고 있다.
권한 없는 영역에 골몰하지 말고 진작부터 내 영역에 집중할 걸. 오늘도 역시 제자리 킥판차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꼬마들 수영 참 잘하더라. 어릴 때 배웠으면 좋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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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3/28 19:40:25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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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더웠다. 봄을 훌쩍 뛰어넘고 여름 초입에 온 듯했다.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땀이 줄줄 흘렀다. 점점 사계절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세먼지가 최악인 날치고는 하늘빛이 볼만했다. 역광으로 서면 불투명한 막이 씌워진 것처럼 나오기는 했지만 순광 방향은 좋았다.
망원 렌즈가 무거웠다. 삐질삐질 흐른 땀이 등판을 질척이게 했다.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청각을 차단해도 시각적으로는 매우 많은 자극이 들어오고 있었다. 온갖 몸통과 휴대폰의 향연을 보며 우두커니 서있으면 기운이 송두리째 뽑혀나간다. 머얼리서 풍광을 잡아당긴다. 파란 하늘과 짙은 기와색, 빛을 받아 활짝 핀 꽃이 어우러져 절경이었다.
만개한 홍매화 소식이 어디까지 퍼진 걸까. 주말엔 나들이 가는 게 아닌데. 그런 후회보다는 즐거움이 한 발씩 앞서니 다행이었다. 봄꽃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돌계단 사이에 홀로 피어있던 이름 모를 보라색 야생화가 기억에 남는다. 어느 누가 씨앗을 흩뿌렸기에 척박한 곳에 정착했는지 묻고 싶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일교차가 널뛰는 요즘이다. 지구의 광기를 느낀다. 인간을 전부 내쫓기라도 할 셈인가. 여름에 40도 보는 건 아닐까. 그럼 얼른 도망쳐야지. 더운데다가 사람까지 많으면 아주 죽을 맛이었다. 가뜩이나 숨막히고 지친데 부대끼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수도 태생들에게 물었더니 그게 당연한 거란다.
인구 과포화가 당연하고 또 자연스럽다 느끼는 삶이란 대체. 혹자는 서울 태생에 엄청난 메리트를 느낀다고 했었다. 그에 비하면 단 한 번도 특혜라 느껴본 적 없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도시를 누가 좋아할 수 있나. 야생성이 남아있는 탓인가. 잉태된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말도 아닌데 왜 자꾸 이럴까.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댔으니 사실은 말이란 말인가.
정답은 그들에게 있으니 됐다. 더는 고민하지 말고 기다려보자. 도시로 뛰어들어 정착한/정착하고픈 말들이 와서 속삭여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난 곳은 아주 엉망이라고. 여기가 아니면 미래는 없다고. 정녕 그럴까.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으며 질문지를 보고 다음 물음을 꺼내겠지. 세션이 끝나면 그제야 녹음을 끄고 물을 것이다. 정말 이곳을 사랑하는 거냐고.
167
이름없음
2026/03/29 23:00:24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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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당연히 좋지. 병원에 오면 다 아픈 사람인데 나는 아픈 데 없이 멀쩡하니까 좋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요.”
“병원이 좋은 게 아니고 집이 싫어.”
21
갑작스러운 도시의 쇠락을 지켜보며 이석은 이인시가 갑자기 이인실이 되었다고 웃지 않고 농담했다. 병자들이 넘쳐나는, 그러나 국가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가장 많이 비어 있는 병실 같다는 것이었다.
41
무주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 맞는 세계, 균형이 잡힌 세계란 없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비뚤어져 있고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라고, 그런 점에서 세계는 애초 구나 정육면체처럼 정확하고 완벽한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트램펄린 같은 것이었다. 똑바로 서면 균형을 잃는 곳, 균형을 유지하려면 비틀거리거나 한쪽 발을 구부리고 팔을 뻗어야 하는 곳, 뒤뚱거려야만 가까스로 설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런 세계이므로 균형을 잃은 태도를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로 여겼다.
65
사무장 말대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은 죽기 마련이다. 다른 곳도 아닌 병원에서. 특히 중환자실이나 일부 병동에서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가끔은 사람들이 죽으러 병원에 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사들이 실패할 때도 있었다. 병원에는 날마다 긴급을 알리는 코드 발송이 이어졌다. 괜찮아질 때도 있었지만 좋지 않은 환자가 나올 때도 많았다.
69
병원이 바라는 건 병상이 비지 않는 것이지, 환자의 완치가 아니었다.
84
내내 퀴즈를 풀어야 하는 기분이었는데 알고 보니 어떤 문제도 주어지지 않은 셈이었다.
91
한동안 이런 밤을 견뎌야 했다. 뒤척이며 그동안 잘못한 일을 생각하는 밤 말이다.
92
몇 해 지나면 아이는 드디어 정글짐에도 오를 것이다. 과감하게 단을 오르다 몇 번쯤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안전한 세계와 불리한 세계를 조금씩 가릴 줄 알게 될 것이다.
111
간혹 모두 사라지듯 복도가 감쪽같이 텅 빌 때가 있었다. 편의점은 흐린 간판만 남겨두고 문을 닫고 공용 욕실도 닫고 약국도 문을 닫아 복도 끝의 비상구 표시등과 자판기 불빛만 희미하게 빛났다. 도시를 감싼 적막감도, 진군하는 어둠도, 고된 통증도, 분주한 질병도 모두 제 일을 마친 것처럼 일순 고요해지는 순간. 빛도 지나가지 않고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순간. 그런 순간이면 정적만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여 마음이 고요해졌다.
112
갖가지 이유로 울고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고 탄식하는 사람들을 보면 장례식장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상조회사 직원이 되어 조의금을 받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싫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배회하는 풀 죽은 사람보다는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이나 곧 죽을 사람을 상대하는 편이 나았다. 때로는 그들이 더 살아 있는 느낌을 주었다.
116
뒹구는 돌에도 절망이 묻어나고 공터를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가 사람들의 한숨 소리나 낮은 울음처럼 들렸다
119
“병원에 영안실이 있으니까 귀신이 있다느니 어떻다느니 떠들어대지만 정작 무서운 건 귀신도 시체도 아닙니다. 사람이죠.”
“맞아요. 사람이 죽어 된 게 시체고 귀신이죠.”
“어떨 땐 환자고 보호자고 다 귀신 같죠.”
168
이름없음
2026/03/30 23:56:08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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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조선소 말이야. 경기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누굴 자르겠냐고."
"그야 비정규직이겠죠."
"그중에서도 용접공. 때울 게 있어야 남아나지."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똑같아. 선후의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결국 같은 처지가 되니까."
134
"거미줄 하나에 거미 두 마리가 함께 있는 게 공존이 아니야. 그건 자연계를 무시한 처사지. 한 거미줄에 한 마리씩의 거미가 여러 개 늘어서 있는 것, 그게 공존이야. 다른 거미줄을 넘보지 않는 상태가 공존인 거라고."
146
빛이 스크린에만 집중되어 있어 단상에 선 이석의 얼굴은 검게 보였다.
166
다 빼앗길 게 분명한데도 이 사람은 왜 사과부터 할까. 뭐가 미안한 걸까. 이렇게까지 하면서 남고 싶은 걸까. 이렇게 악착같이 구는 이유는 뭘까. 왜 어떤 삶은 굴욕과 함께 지켜내야 하는 걸까.
184
흰 주차선 위로 창살처럼 뻗은 나무 그림자는 무서울 정도로 시커멨다.
194
45년간 이석의 내면을 다양하게 반사했을 얼굴, 그 얼굴에서 아무것도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게 기이하게 느껴졌다.
204
송곳 같은 어둠과 적막을 겁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좋았다. 무서움이 느껴지지 않는 고요도 오랜만이었다.
211
횡단보도에 서서 무주는 서로를 밀치듯 재게 걸음을 놀리는 사람들과 느릿느릿 밀려드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건강한 동물의 내장기관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세포처럼 번식하며 길을 메우고 있었다.
223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라고 그러는 거예요?"
'다들'은 누구고 '우리'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무주는 어느 쪽에나 속하는 것 같았다.
169
이름없음
2026/04/01 13:34:09
ID : mIIE7hxTRu6
0
다친 다리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불운과 행운이 동시에 깃들었다. 적어도 연속해서 같은 쪽을 망가뜨리진 않았으므로. 규칙이 깨지니 활력이 줄어들었다. 와병할 때는 그래서 어떤 생각에도 골몰하지 않는 편이 좋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빨려들게 된다. 깨진 운동 루틴 대신 일상의 규칙은 지키기로 했다. 일찍 일어나기, 새로운 공기 들이기, 제때 밥 먹고 잠 자기 같은 사소한 습관을 견고히 할수록 정신건강에 특효가 있었다.
꺾인 왼발목보다 갈아버린 오른무릎 통증이 훨 심했다. 한쪽은 체중 부하를 주지 않으려 애써야 했고, 반대 발은 신중하게 꺾는 각도를 조절해야 했다. 엊저녁엔 특히 통증이 심했다. 끙끙대며 앓았다. 잠까지 설칠 지경이었다. 제미니가 참으래서 참았지 안그랬으면 어땠을까. 놀랍게도 그의 말대로 딱 이틀 가는 통증이었다. 습윤밴드를 갈아주니 씻은 듯이 나아있었다. 헛웃음 지었다.
으레 그렇듯이 다치고 낫는 중이지만, 거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다. 끼니 챙기고 씻고 책을 읽고 공부하는 과정, 모든 일상을 준비하는 시간만 두 배가 된다. 차라리 책 읽고 공부하는 건 누워서 한다 치지만 나 하나 먹이고 나 하나 씻기는데도 온갖 한숨과 기합이 다 들어간다. 평소라면 툭툭 갖고 들어왔을 택배 하나도 시련이요 난관이다. 낑낑대며 깁스 신발에 발을 꿰어넣고 신중한 걸음을 옮긴다.
어쩐지 에서 예견하더라. 다칠 사람은 어떻게든 다치게 된다. 에너지가 넘칠 때일수록 차분히 굴 걸. 항상 이런 식이었다. 수위 조절도 빠꾸도 없이 가다가 후루룩 다치고 재정비. 그래도 과거의 나보다는 나아야겠다 싶어서 세운 목표가 회복 속도 앞당기기였다. 재활할 공간도 있고 시간도 충분하니 이번에야말로 6개월 내내 아프지는 말아야지. 기왕 다친 마당에 하염없이 쉰다. 까짓거 수영도 좀 째고, 책하고도 공백을 둔다.
넘어지며 양 손바닥으로 받친 탓에 두짝 다 쓸려 있다. 체감상 손바닥 회복은 다른 어떤 피부보다 빠르다. 벌써 껍질이 탈각된다. 물끄럼 보고 있으니 잠이 스멀스멀 눈꺼풀을 짓누른다. 이토록 본능에 충실한 생활이라니. 그 한달이 무어라고 자책감 든다. 한창 물속에서 헛짓거리하고 있어야 하거늘! 코끝에 희미하게 수영장 특유의 염소 냄새가 퍼진다.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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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4/02 18:26:32
ID : h9haq3U0o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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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사이 벚꽃이 만개했다. 하늘은 파랗게 반짝였다. 양끝이 갈라진 꽃잎이 바람을 타고 조용히 보도블럭 위로 착지했다. 꿈처럼 느껴졌다. 며칠 틀어박혔다고 현실감이 사라져있었다.
카페 창가석에 앉아 페퍼민트를 시켰다. 대학가 골목에서 오래 터줏대감을 맡은 듯한 꽃집을 마주보는 자리였다. 이름 모를 노란 꽃이 골목을 환히 비추고 있다.
지켜보는 동안 가방을 멘 행인이 가게로 들어섰다. 어떤 꽃을 고르고 나올까. 스쳐지나가는 평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념할만한 날일지도 모른다. 오토바이가 일으키는 바람에 꽃잎이 좌우로 흔들렸다.
사람 많은 동네의 장점은 멍 때리기 좋다는 거 아닐까. 특별히 구경할 의도를 가지지 않아도 개성 넘치는 행인들이 쏟아진다. 시선 끝에서부터 끝까지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나간다.
의미가 불분명하지만, 활력이 서서히 몸으로 돌아오고 있다. 외향형은 이럴 때 쓰는 말이라던데. 햇빛을 받아 그런가. 가만 앉아있으니 문득 떠나고 싶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훌쩍.
입안은 개운한데 어딘지 모를 답답함이 있다. 아. 많이 바쁜가. 아직 전달되지 않은 증여에 대해 읽고 온다. 이러다 필사한 페이지가 닳게 되면 어쩌나. 연필로 쓴 게 아닌데도 끝이 뭉개질까 두렵다.
참, 그러고 보니 해가 눈에 띄게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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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4/08 11:28:17
ID : Pa1g2ILhy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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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시 동물원에서 늑대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편혜영의 ‘동물원의 탄생’에서도 늑대 한 마리가 탈출한다. 기사 댓글이 소설에서 꼬집은 대로 흘러가 한동안 큭큭거렸다. 늑대는 악독스럽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닥치는대로 노약자를 사냥하고 자신의 배를 채울 듯이 묘사되었다. 생포하지 못하면 사살해야 했다. 동물원에서 평생을 길러진 늑대에게 야생성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길들여진 그에게 탈출이 주는 자유는 얼마나 달콤할까.
65*
사라진 것은 늑대였다. 시베리아 산이었다. 몸길이 백이십 센티미터, 꼬리 길이 사십팔 센티미터, 몸무게가 사십칠 킬로그램인 놈이었다.
66
사실 늑대는 함부로 인간을 공격하는 동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추위와 굶주림이 닥쳐오면 어떻게 굴지 알 수 없었다.
67
사람들은 뉴스에 나온 늑대의 황갈색 눈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늑대는 사라졌기 때문에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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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뻘리 늑대를 잡아야 하는 당위성은 늑대에게 악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확고해졌다.
75
늑대만큼 야성적이고 매력적인 것은 없었다. 늑대는 야생성을 간직한 채 도시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것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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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4/09 14:41:23
ID : SE2lbcldDxQ
0
새벽이 사라졌다. 하루 안에 잠든다. 동이 터오면 천천히 깬다. 무언가 써낼 시간이 없다. 책을 읽으니 불면에는 최악인 습관이었단다. 침대는 자는 곳이니 다른 생각을 펼칠 거면 앉으랬다.
봄비가 내린다. 가랑비일 줄 알고 우산을 제꼈다. 빗방울이 아침보다 거세졌다. 밤까지 이럴까? 만약 그렇다면 맞으며 가야지 어쩌겠나. 때이른 벚꽃이 후두두 떨어진다.
꽃만 피고 기온이 오락가락해 봄인지 헛갈리는 지경이다. 눈 깜짝할 새 여름으로 당도할 것이다. 슬슬 사람이 지겹다. 어딜 가나 사람인 동네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 리프레시 하고 싶다.
수도 태생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걸 견뎌낼까. 종종 그런 의문이 들곤 한다. 갑갑하다는 단어로는 부족할 지경으로 치밀하다. 밀도가 높다 못해 터질 듯하다. 인간지옥이다.
실력이 부족해 자주 스타트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돌핀킥에 욕심이 생겼다. 선수들은 잠영만으로 15m 혹은 그 이상도 갈 수 있단다. 짧은 순간의 추진력을 어떻게 유지하는 걸까?
아주 천천히 늘고 있다. 조금 가혹할 정도의 스케줄이긴 하지만 복습을 철저히 한다고 생각하면 나쁘지만은 않다. 도리어 주말만 되면 몸이 근질거린다. 초반의 중독성이겠지.
173
이름없음
2026/04/10 23:07:26
ID : mIIE7hxTRu6
0
12
검은 숲을 향해 몸을 움츠리고 걸어가다 보니 자연이 반드시 옳은 교훈만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70
물에 빠져본 적은 없지만 만약에 물에 빠진다면 그런 기분일 것 같았다. 서서히 숨통이 조이다가 완전히 끊어지는 기분.
73
그는 숲을 배신할 수 없었다. 배신해서는 안 되었다. 그랬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135
사택을 둘러싼 숲이 조금씩 어둠에 파묻혔다. 먹색이던 눈앞이 어느 순간 완전한 어둠으로 바뀌었는데, 지켜보고 있음에도 그 흐름과 변화를 알아챌 수 없다는 게 흥미로웠다.
142
그는 자학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검은 천장이 기히학적 무늬를 그리며 감은 눈 위로 쏟아져 내렸다.
170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 순간을 모두 잃었다. 다시 회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180
불을 끄자 검은 밤의 계류장처럼 어둡고 고요해졌다.
204
운명을 만드는 것은 과거였다. 과거는 한때의 시간을 떠나는 순간 운명에 속했다.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현재 속에 중첩되고 현재를 간섭하다가 미래에도 살아남을 것이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과거와 현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233
모든 것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과거가 현재를 장악했다. 현재는 과거에 속박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곧 미래도 잠식당할 것 같았다.
267
오랜 세월 숲에서 지낸 그들은 숲에서는 죽음이 보통 위쪽에서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284
그들은 인생이 예기치 않은 한순간에 깊이 틈을 벌리고 절대 그 틈을 아물지 않는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326
“구토라니. 시의적절해요. 의심이나 증오는 이를테면 구토 같은 거예요.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 없지요. 누군가를 의심하고 미워하는 것만큼 통제하기 힘든 건 없지만 전적으로 소화를 못 시킨 내장의 문제일 수도 있어요.”
337
두려움이 혈관을 타고 흘러 두려움과 분리된 자신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343
진은 어둠의 심연을, 골짜기의 깊은 틈을, 뒤엉켜 뻗어 자란 나무의 근부를 알고 싶지 않았다.
345
이제 우리는 텅 비었다. 진을 봐주는 것은 우리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어둠뿐이었다. 진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어디에서도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174
이름없음
2026/04/11 18:36:41
ID : mIIE7hxTRu6
0
문득 도시에서 불안을 느끼는 이유가 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했다. 나고 자란 곳은 어딜 가나 하늘 끝에 산이 걸려있었다. 섬을 두쪽으로 가른 거대한 줄기는 유년 시절 배운 신화와도 연결돼 있었다. 치마에 흙을 퍼담아 나른 후 하나하나 쌓아나갔다니. 자세히 기억이 안나 찾아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앉으려고 하니 뾰족한 것이 찔러 불편하자 윗부분을 뜯어 던져버렸고, 그것이 연못처럼 형성되었다는 설이 있단다. 던져버린 부분은 남쪽으로 떨어져 오름이 되었다는데. 아마 여기까지 배우고 나서 소리내어 웃었을 것이다. 기억 저편에 희미하게 잔상이 있다.
목에 정체 모를 담이 왔다. 온몸 근육을 푸는 동안에도 전혀 이상이 없다가 나가기 직전 알 수 없는 행동 후 갑자기 뻑뻑해졌다. 묵직한 통증에 15분 정도를 쉬어주니 겨우 나설 수 있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양지 바른 곳에선 벌써 라일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향기를 맡았다. 제철 맞은 생화 향기를 어떤 향이 이길 수 있을까. 코 깊숙한 곳 점막까지 짜릿해졌다. 진정 봄이다. 부정할 수 없었다. 곧 장미가 주택가를 환히 비출 것이다. 숨을 몇 번 더 들이쉬었다. 집 뒤편 라일락도 잘 피었으려나, 궁금해졌지만 손에 들린 책이 무거워 돌아가진 않았다.
바삐 걸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반년은 족히 땔깜으로 쓰고도 남을 분량의 나뭇가지가 쏟아져 있었다. 가지치기를 한 듯했다. 누가 이 많은 가지를 자르고 옮겼을까. 잠깐 사이 드는 온갖 의문을 물리치며 다 읽은 책들을 반납했다. 숨이 확실히 가벼웠다. 호흡을 조절해야만 하는 운동의 힘인지, 활동량이 늘어 운동 부족 상태에서 벗어난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무렴 둘 다인지도 몰랐다. 일상 속에서 효용이 느껴지자 의지가 줄질 않았다.
편독偏讀도 언젠가는 해결해야지 생각만 하고 큰 실행 없이 미뤄두던 과제였다. 지독하게 일본 (추리) 소설만 파던 시절이 있었다. 특유의 번역체에 큰 이질감이 없었다. 반면 서양 번역투에는 지나치게 과장된 묘사와 감각이 있다는 느낌이 들자 거부감이 올라오더니 못 읽게 되었다. 그나마도 비문학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비문학 자체를 차단해버리니 방법이 없었다. 독서에서라도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왜 하는 걸까, 이대로도 괜찮다, 뭐 그런 안일함으로 합리화를 해왔다. 교정하고 싶은 마음이 내내 이기지 못하다가 겨우 이겼다. 방법은 간단했다. 다섯 권 중 한 권 이상은 반드시 비문학을 섞는다. 안 읽고 반납하더라도 그렇게 했다.
반납 기한이 다가오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모조리 읽어버렸다. 남은 책이라도 읽어야지. 그리하여 서서히 교정에 성공했다. 이제는 문학 3 비문학 2의 비율을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 주로 심리학, 철학, 사회학에 포커스를 두는 건 아쉽지만 어쩌겠나. 다음달에 고치면 될 일이다. 수학이나 기술, 예술, 역사…는 취향이 아니었다. 상호대차로 받아볼수록 편독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어떻게 분류표에서 균형을 찾아 한 권 씩 읽는단 말인가. 그야말로 이상적인 독서가 아닐 수 없겠다. 그래도 다음번 책부터는 억지로라도 길들여야 하나. 아주 조금이라도 더 흥미가 있는 쪽은 기술과 예술 분야였다.
약통에서 언제 처방 받았는지 모를 근이완제를 발견했다. 이거라면 내 목을 돌려줄까. 다리는 생각한 것보다 금방 나았다. 아마 고개도 내일이면 수월히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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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4/11 22:03:21
ID : mIIE7hxTRu6
0
나는 뜨겁게 살면 안 됐는데, 당신께 뜨겁게 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거지. 내 사주가 얼마나 뜨거울 줄 알고 타오르듯 살라고 했던 걸까. 뼈 있는 말을 던지며 떠나던 뒷모습이 눈에 박혀 있다. 창문 너머로 여름이 오던 5월의 향기, 이글거리던 몸의 열기를 식혀주던 당신의 그림자, 스피커라는 매개체 없이 넘어오던 목소리, 손가락과 밸런스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큰 반지.
의미를 부여하면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했다. 혈색이 옅어 차디찬 손가락이나 어깨, 목덜미의 촉감 같은 것들이 아직 선연하다. 안마를 해 준 적이 있었을 터였다. 자주 하고 다녔었다. 에너지가 넘칠 때였다. 어떻게서든 해소하고 싶어 이리 뛰고 저리 뛸 때였다. 두 가지 종목의 대회를 준비했었으니. 해봐야 선출도 아니고 동아리 수준이었지만 땀 흘리는 게 좋았다. 합 맞춰 노력하고 패배해도 노력은 배신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던 시절이었다.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로도 모자라 쫄대로 휘익휘익 바람 일으키곤 했었다.
그럴 때였다. 에너지가 넘쳤으니 줄 곳 있던 마음도 넘실거려 어쩔 줄 몰랐다. 당신이 내게 날아와 꽂힌 거였을까. 그저 악순환을 반복하기 위해서였던가. 마음을 어떻게 숨기나. 시선을 빼앗고 싶었다. 경쟁자따윈 없었다. 모두 당신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고개를 숙였으니. 그래도 시선이 더 머물기를 바랐다. 그런 마음이 아직도 켜져 있는 걸 보면 신기하다. 버스에서 비슷한 색으로 물들인 머리칼을 보고 크게 놀랐다. 같은 사람일 리 없잖은가. 차창 너머를 비집고 들어온 햇빛에 반짝이던 그 색이 정확히 일치했다.
길을 걷다 떠오르라고 걸음걸이를 교정한 걸까. 두 발로 서서 걷지 않고선 살 수 없는데.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고맙지만 도시로 떠나지는 말라고 발목을 망가뜨린 걸까. 아직 무릎도 완전히 낫지 않았다.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도 검붉은 딱지가 피를 머금고 피부 아래 갇혀 있다. 좋아하는 시는 어쩌다 알려준 거였더라. 암송할 줄도 알았었다고 그랬는데.
그리워할수록 깊이가 얕아지는 것만 같아 두려울 때가 있다. 닳고 닳아서 원형이랄 게 없을까봐 불안하다. 찾아갈 때마다 생각한다. 더 이상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모습에 죄책감이 든다.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인사를 빨리 하고 나와버리는 게 싫었다. 인지오류라는 걸 알면서도 내 잘못 같다. 횡단보도를 건넜으면 무언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항상 생각한다. 바보처럼. 아무것도 못 했다는 생각이 든다. 국수라도 꾸역꾸역 먹다 차라리 다 게워내버리지 두 젓가락만 먹고 내려오다니.
인지오류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는 게 아니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낯설다. 근거없이 도망다니며 떼쓴다. 내가 뭘 할 수 있었냐고 물어보면 할말 없다. 오답만 정확히 짚어가며 헛짓거리 하니까. 틀렸어, 틀린 건 나인데, 왜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지. 내 잘못이에요. 내 잘못 맞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묻겠지. 그럼 나는 앉아서 지루한 재방송을 해야 한다. 회상하다보면 살아있는 거 같아서 되감고 다시 본다고 했다. 살려볼 수 있을 거 같지 않느냐고 말하며 웃는다. 그래, 정말 그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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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4/17 12:04:25
ID : 3vgY2nxBd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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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나 했더니 책을 멀리했다. 오늘은 정미경의 책이라도 다시 읽어야겠다. 디지털 세계에 깊이 들어갈수록 시간은 빨라지고 부정적 감정은 끈적이는 타르처럼 폐 안쪽에 쌓인다. 실질적으로 녹일 수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 운동, 호흡, 독서 같은 행위는 효능이 좋다. 산발적 정보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감각해야 한다.
예컨대 같은 소식을 보더라도 신문을 펼쳐 읽기와 인터넷 뉴스에서 보기, 커뮤니티에서 재생산된 무언가를 보는 것은 아주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자극적인 쪽은 커뮤니티에서 마주하기다. 이용자들의 편향된 생각(댓글을 다는 사람은 부정적 발언을 할 확률이 높다)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문해력에는 ‘어떤 경로에서 정보를 습득할지 선택하는 능력’도 포함되어야 한다. 정보 원천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비판적 읽기의 첫단추라고 하면 좋겠다. SNS, 숏폼, 인터넷 기사, 커뮤니티, 신문, 방송, 도서…. 아무래도 책으로 올 수록 정보 전달 속도가 느리겠다.
아. 무슨 잡생각인지. 얼른 녹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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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4/17 14:34:21
ID : Hxu065gjipd
0
어디까지 온 걸까? 보낼 때야 좋다고 실실거리며 보내긴 했는데. 받는 쪽의 반응을 살필 수 없으니 불안했다. 그냥 하는 일이 아니란 걸 잘 안다. 언젠가 회신이 돌아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두려움도 있다. 그럴 때 이미 와 있는 편지를 거슬러 오른다. 언젠가는 온다고 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천천히 시간이 흐르길 기다린다.
사실 ‘제때’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싶었다.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로 스스로 혼란이라는 디버프를 걸면 더 나을 듯했다. 아직도 보내지고 있다고 여기면 꽤나 편했다. 진짜 편지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표를 붙이고, 새빨간 우체통에 넣고, 집배원이 거둬가길 기다린다. 그러니 괜찮다. 쓰일 곳 없는 불안도 두려움도 잘 뭉쳐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자.
으슬으슬하다. 운동과 운동 사이 공백은 지루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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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음
2026/04/18 12:41:34
ID : lfTO9Bzbvf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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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이다. 지상 연습 하다보니 갈증이 생겨 부리나케 뛰어왔다. 예정에 없던 소비도 했다. 충동적이다. 이유는 하나다. 튜브도 구명조끼도 없이 먼바다로 나가고 싶다. 파랑에 두려워하지 않고 싶다. 꼬르륵 잠겨도 좋겠다. 힘을 빼면 떠오르니. 짠물은 더 잘 뜬다고 한다. 어서 여름이 왔으면. 아니, 내가 가는 건가.
179
이름없음
2026/04/19 14:10:59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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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2
마음속에 선생님의 언어를 본뜬 제가 있는 걸까요.
260224
유격이 생겼는지 빠져버린 나사를 드라이버로 조였다. 그러는 동안 바람이 마구잡이로 뛰어들어와 온갖 모서리와 부딪혔다. 하루종일 소란스러울 것 같았다. 나라도 평정에 도달하고 싶었다. 기운이 금방 누그러지는가 싶더니 장난끼 많은 어린아이처럼 달려드는 통에 약한 두통이 느껴졌다.
260310
(1)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2)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3)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4) 그 방해물을 어떻게 제거할까
260312
두 팔 휘적이고 어깨까지 써서 넓은 보폭으로 걸을 때면 생각난다. 아직도 교정된 걸음이 어색하다. 당신의 입김이 십 년 뒤에도 유효하려면 제멋대로 걸어야한다는 걸까. 터덜터덜 걷다보면 낭중지추 하나 허벅다리를 찌른다. 예리한 감각 너머엔 언제나 당신이 서 있다. 굳건한 왕국으로 어서 떠나버리자. 아니, 왕국이 내게 오는 건가.
260326
혹시 무너지더라도 굳게 닫힌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사람이 당신을 본뜬 나였으면 했다. 무지막지한 브리칭 램 내부에 코어마냥 웅크린 기억이 있다.
누가 말했는데, 눈동자 너머에 아무것도 없으니 제발 애쓰지 말라고.
260407
게다가 이번은 내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는가. 괜찮다고 생각해봐, 진짜 괜찮아진다.
180
이름없음
2026/04/20 00:52:54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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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어. 이런 생각 하는 게 나쁘다는 것도 안다. 그런 말이 있다. 이승에서 계속 생각하면 ‘좋은 델’ 못 가고 지천에 떠돈다는. 죄책감은 거기에서 오는가.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나쁜 마음은 왜 잔존해 있나. 꿈에 나와달라 하는 소망이 정말 옳지 못한 걸까. 무의식이 띄우는 환상적 영상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도 보고싶다. 나라도 생각한다면 잊히지 않는 거니까. 망각은 죽음 이상으로 무섭다. 친구를 잃은 자는 잊혀지는 게 싫어 자꾸만 이야기한다고 했다. 나라도 당신을 호명한다면, 수영장 타일 색을 닮은 방안에서 숨을 한껏 들이쉬고 이름 석 자 부른다면, 어떤가. 생은 그렇게 이어지나. 고작 한 번의 호명만으로도 무언가 달라지나.
눈꺼풀이 묵직하다. 슬프다. 아프지는 않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마음이라……. 사실 그런 건 없었다. 나는 생판 다른 사람이 부르는, 당신의 이름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오랜만이었다. 타인의 음성으로 존재를 증명받는 경험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그렇게 호명되니 정말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실은 꿈꾸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으므로. 버릇처럼 되돌려보다보니 전지적 시점에 갇혀 있었다. 1인칭 주인공이었지. 당신이 다만 숨을 고를 뿐인데도 마음의 온 볏짚에서 불길이 이글거렸다.
영원히 미결될 마음이 기승을 부린다. 불면에 이르게 하려고 하나보다. 좀처럼 끝나지 않을 꿈을 꾼다.
181
이름없음
2026/04/22 12:13:03
ID : fgqi9vwsqj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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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덮어쓰고 싶다. 잡념은 수용성인데 왜 다른 것들은 간단하지 않지. 길가를 하얗게 수놓은 이팝나무가 보인다. 보기엔 꽃가루 많이 휘날릴 듯해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글을 본 적 있다.
술이 당긴다. 제한과 역방향으로 커지는 욕망이라 헛된 일이다. 술이나 담배에서 위안을 얻을 거였으면 스스로도 분명히 제어할 수 있다. 사서 중독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드나들 때 구태여 라일락이 있는 현관으로 나선다. 일년 중 한달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만 주어지는 행운이다. 시한이 정해져있으므로 귀한 게 아닐까. 숨을 깊게 들이쉰다.
어제 아침부터 풀리지 않는 체기가 있다. 명치 약간 아랫부분이 꽉 막혀 있다. 잠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한참을 밍기적거렸다. 날씨도, 마음도 오락가락한다.
이상한 봄이다. 더울 거면 쭉 더워야지. 꽃도 시샘하지 않는 추위를 끌어다가 쓸 일인가. 행인들의 패딩과 반팔이 혼재된 차림을 보자면 웃음이 나온다.
유가만 아니었어도 쉬러 갈텐데. 무척 고되다.
182
이름없음
2026/04/23 11:26:53
ID : 47s066o59ij
0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떠난 자가 꿈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던 차였다. 그 사람이 자신을 잊어주길 원하면 안 나온다고 했다. 정말 그런지 오래 고민했다. 반대로 결론냈다. 찾는 중에는 당연히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눈에 힘 주어 빛내도 암흑 속에서는 탐색이 어렵다. 망각을 원하는 자는 없으므로, 잊어달라는 부탁이 합리적일 리 없었다. 잊히는 순간이 부재다.
지금 어디 있는지, 회신 없을 신호를 보내본다. 여전히 생동하는 과거의 내가 뚜득뚜득 기계음의 짧은 메시지를 돌려준다. 기억으로 남아있다. 실은 과거도 현재도 편의대로 만든 개념이잖은가. 동시에 흐를 수 있다. "거짓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는 착각에 잠시 빠져본다. 이럴거면 도대체 왜 불안해했던가? 닳아버릴 거라니. 몇 년이 지났는지 헤아려봐. 진짜 그랬나.
183
이름없음
2026/04/24 11:43:32
ID : LdXAnQk2qY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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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선배가 혹 내 얼굴에서 낙오자의 안색을 발견하면 어쩌나 조바심도 났다. 광합성을 하는 사람에게는 광합성의 빛이, 전자파를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전자파의 빛이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22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
41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수면 위로 올라와도 숨을 쉬느라 소리칠 수 없었다. 깊은 물에서 둔하게 찰방이는 걸로는 주의를 끌기도 어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조용히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물속에서 느낀 아주 기이한 고요를 기억하고 있다.
52
불길한 징조가 우리의 앞날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애썼다
55
장판 위로 네모난 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는데, 그 사각형 안에서 뭔가 희미하게 출렁이고 있는 걸 발견해서였다. 그건 방바닥에 비친 아지랑이 그림자였다. 내 발 아래서 신비롭게 출렁이는 봄기운. 나는 잠시 충만해져 '아, 보이지 않는 것에도 그림자가 있구나' 감탄했다.
67
나무는 전쟁 중 길가에 함부로 버려진 시신처럼 쓰러져 있었다.
94
세계는 비 닿는 소리로 꽉 차가고 있었다. 빗방울은 저마다 성질에 맞는 낙하의 완급과 리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듣다 보니 하나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자연은 지척에서 흐르고, 꺾이고, 번지고, 넘치며 짐승처럼 울어댔다. 단순하고 압도적인 소리였다. 자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연은 회의(懷疑)가 없고, 자연은 반성이 없었다. 마치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 같았다.
103
어둠 저편에서 물들이 심하게 몸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냄비와 컵을 비롯해 각종 그릇에 든 물들도 뭔가 예감한 듯 일제히 흔들렸다.
필사하려니 두통이 심해 며칠째 진도가 멈춘 김애란의 『비행운』.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마음에 꽂히는 문장이 많았다. 화살처럼 관자놀이를 꿰뚫는 서늘함이 싫어 누운 채 술술 넘겼다. 도대체 어떻게 썼을까 싶은 문장들은 아쉽지만 흘려버렸다. 『바깥은 여름』 말고도 읽을 책이 많다. 그래도 전작주의 하기엔 나름 쉬운 작가가 아닐까. 인기가 적당히 있어야 도서관에서 찾기 쉽다.
184
이름없음
2026/04/25 16:30:52
ID : mIIE7hxTRu6
0
107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마을을 삼킨 황톳물은 어디론가 거세게 흘러갔고, 그 위로 현대의 아름답고 치명적인 쓰레기들이 둥둥 떠다녔다.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구조대를 태운 배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108
순간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던, 하지만 점점 뚜렷해져가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사람들이 우리를 잊은 게 아닐까?’
117
암흑 속에서 고요를 찢어발기는 세찬 물소리가 들려왔다. 회의를 모르고, 반성을 모르는 거대한 금치산자가 내지르는 포효였다.
146
"그러니까 제 말은요. 그렇게 우연히 노래랑 나랑 만났는데. 또 너무 좋은데. 나는 내려야 하고. 그렇게 집에 가면서, 나는 그 노래 제목을 영영 알지 못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는 거예요."
268
하지만 갈등은 사소한 데서 시작됐다. 얼핏 보면 별거 아닌 문제들이지만, 그런 것이 차곡차곡 쌓이자 어느새 두꺼운 벽이 되었다.
277
세계는 원래 그렇게 '만날 일 없고' '만날 줄 몰랐던' 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 돼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293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317
조만간 다시 옛날이 될 오늘이, 이렇게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있네요.
5년 만에 읽게 되었다. 등록일을 보니 2021. 04. 03. 이라 적혀 있었으나 그때 정말 읽은 것인지 읽었다고 표시를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날이 더워지면 가끔씩 크레인 위를 오른 소년 한 명이 머리를 스쳐간다. 뿌연 빗물에 잠긴 세계를 발아래로 두고 앉아서 발을 휘적이는 소년. 자연이라는 거대한 금치산자는 다윗이겠지. 깨달음을 이제서야 얻었다. 그렇다면 소년이 이겼겠구나.
천천히 시간을 두고 전작을 훑는 중이다. 작년에는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었었다. 휘날리며 읽어서 기억이 거의 없다. 성장소설과 청소년소설 어드메를 전전한다는 분위기만 어렴풋 새겨져있다. 첫 작품으로 되돌아갈 때, 희열이 크다. 이토록 날것이었구나 하는 마음 반, 이름을 날리려면 처음부터 이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하는 마음 반. 보정 전 A컷의 raw 파일을 모니터에 켜두는 기분이랄지.
총평을 끌어왔더니 문단 간 연결이 어색하다.
그래도 남길 건 남겨야겠다.
소설 속 화자들은 모두 평범하다.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마저 지독할 정도로 그렇다. 그러나 내가 나를 살아내는 동안, 세계를 구축하고 수리하고 부수어뜨리는 동안 평범은 지워지는 게 아닐까. “천 개의 잎사귀는 천 개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86쪽)”. 천 명의 삶은 그 방향이 제각기이기에 특별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것이 불행 혹은 비행(非幸)을 위해 달려가는 일일지라도.
185
이름없음
2026/04/25 23:58:53
ID : mIIE7hxTRu6
0
두 달쯤 전의 인연을 더듬는다. 별것도 아니었다. 금방 사랑에 빠지지만 좀처럼 식지 않는 성질을 가진 마음을, 아직도 다루지 못하는 미성숙함이 그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사랑이라 부를 마음까지는 아니다. 기회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되었을까. 하지만 연이 다해 앞으로도 영원히 아닐테니 털어본다. 글로 쓰는 방법보다 현명한 방식이 있을텐데 남겨두고자 한다. 마음이 그러자는데 그리 해야지.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이 으레 그렇지만 그땐 조금 특수했다. 불자의 손주로 태어난 탓인지 성당과 교회보단 사찰이 편했고, 영화에도 나온 곳이었으므로 충동적으로 묵었다. 그 사람은 어떤 목적으로 그날 묵었던 것일까. 휴식 차 온 것인지, 불자였던 건지, 이름과 나이는 무엇인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저 낯섦 없는 호의를 묵묵히 받기만 했다. 돌아가는 날 아쉬움을 남기기 싫어 새벽 예불에 참가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으니 슬쩍 와서는 등판을 툭툭 두드렸다.
불경을 펼쳐도 모르는 말 투성이였다. 불자들은 익숙한듯 책을 펼치기만 하고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외는데, 나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수의 목소리가 만든 삼엄한 경계 바깥에서 맴돌았다. 속했는데 속하지 않았다. 내부자이면서 외부자였다. 그가 나를 경계 안쪽으로 훅 밀어넣었다.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기에 도와준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그 역시 처음에는 다른 불자의 호의를 받았을지 모른다. 양쪽 귀로 불경 외는 소리만 들렸다. 마음이 어딘가로 끌어당겨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지속될 수 없는 관계가 주는 다정함에 흔들리는 것까지 잡아주진 못했다.
미어캣처럼 목을 쭈욱 빼고 당신의 뒷모습을 찾았다. 좀처럼 보이지 않더니 식당 안으로 들어오자 몇 사람 앞에 서있는 듯했다. 혼자 먹을까 망설였지만 용기 아닌 용기가 불쑥 샘솟았다. 맞은편에서 묵묵히 밥을 우겨넣었다. 일정이 빠듯해 새벽참이 아니면 식사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탐식하는 모습이 보기에 무척 좋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당신은 그런 나를 물끄럼 쳐다보더니 내게 묻는다. 오늘 가시냐는 작은 속삭임이었다. 네, 하고 짧게 우물거리곤 고개도 끄덕였다.
붙잡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식사 중엔 금언이 원칙이었다. 당장이라도 식사를 버리고 뒤쫓아가 절에는 자주 오시는지, 불자인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지 따위의 잡담을 나누고 싶었으나 번번이 목구멍에서 좌절해 돌아갔다. 분명 내 마음이었는데 이해가 안 됐다. 당신이 떠난 자리를 들여다보며 남은 밥을 씹고 또 씹었다. 평소 내향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기에 더욱 갑갑했다. 한참 고민하다가 적확한 문장이 툭 떨어진 것이다.
『비행운』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146쪽, "그러니까 제 말은요. 그렇게 우연히 노래랑 나랑 만났는데. 또 너무 좋은데. 나는 내려야 하고. 그렇게 집에 가면서, 나는 그 노래 제목을 영영 알지 못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는 거예요."
「호텔 니약 따」 277쪽, 세계는 원래 그렇게 '만날 일 없고' '만날 줄 몰랐던' 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 돼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아마 영영 노래 제목을 알 수 없겠지. 그러다 어느 날 귓바퀴에 걸린 단 한 구절만 하루가 내도록 돌림으로 부르겠지. 말쑥한 표정으로 웃던 표정이 짧은 영상으로 부메랑처럼 반복된다. 조금 더 알고 싶었다. 다시 볼 일이 없다면 내밀한 조각을 서로 손에 쥐어주고 서울로 도망쳐버리고픈 마음이었다. 실은 다시 만나고 싶었다. 친절함에 휩쓸리다니 말도 안되지만. 말이 안 되지만. 강렬한 느낌이 파도가 된 채 밀려와선 한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4시간을 달려 도시에 도착하고 나서야 밀물 다음엔 반드시 썰물이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남선 터미널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망연히 서 있었다. 다들 명확한 행선지가 있었으며 발걸음은 재빨랐다. 오른발을 절뚝거리며 지도를 켰다. 몇 년을 살아냈는데도 이 거대한 도시가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리면 쉬이 저항하지 못했다. 밀면 그대로 밀려나갔다. 한번도 끌어당겨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보고싶었다. 사찰의 규칙을 잘 안다면 도시의 규칙따위 이미 몸에 밴 사람일 거라는 헛된 확신 때문이었다. 디딤발이 쓰라렸다. 빵빵하게 부푼 가방을 부리고 노래를 바꾸어 틀었다. 한참을 그렇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186
이름없음
2026/04/28 14:52:35
ID : O4NtbdCkpPh
0
물에 뛰어들기 전까지 흐렸는데 씻어내고 나오니 조금 갰다. 미숙한 평영 발차기를 하며 허우적대는 동안 전혀 기대하지 않던 회신이 와 있었다. 기분 그래프를 오른쪽 끝까지 밀었다.
들떠있다. 심박이 평소보다 빠르다. 실실 쪼개며 코로 길게 내뱉는다. 평영 발차기 영상을 보며 공부할 요량이었는데 다 치우고 글자를 들여다본다. 꽤 잘 하고 있었다.
약 없이도 기분의 평형을 맞추고 싶었다. 약과 독은 동전의 양면 관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외부로 향했던 통제욕구를 내부로 돌려놓기만 하면 할만한 일이었다.
책이 그렇게 말했다. 그 이전엔 아마 당신이었으리라. 간단하고 명료하지만 빛이 없는 동굴 속에서 “살아낸다”는 행위는 난도가 높게 느껴졌었다. 고개가 아래로 처졌다.
돌이켜보면 쓸모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완전한 관해寬解에 다다르지 못했음에도 소회를 남기는 게 조금 웃길지 모른다. 확실한 건 이전보다 나아지고 있다. 나아가고 있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했다. 오토바이를 근처에 둔 기사가 쓰러져 있었다. 가벼운 두통을 느낀다. 아주 가끔씩, 좋지 못한 상상을 한다. 자동적으로 그리 되는 것이다.
완전 관해따위 바라지 않는다. 언젠간 모두 스러질 테니까. 이젠 머릿속의 시한폭탄 같은 단어로 부정적인 의미화를 않는 것처럼, 서서히 나아지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다.
사대문 중 하나를 통과한다. 길가에는 부처님 맞을 준비를 하는 등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문득 생김새만 아는 당신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도.
날이 쌀쌀하다. 그러고보니 어제 비가 왔었다.
187
이름없음
2026/04/28 22:08:23
ID : 8nQk61wk3u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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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의 꼬리를 타고 넘어가보니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알고 싶어졌다. 글이 주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비언어 없이 정제된 단면만 보고 판단하려니 천천히 읽어내려가며 생각을 키우곤 한다. 회신할 시점엔 몇번을 읽었을까. 모르겠다. 아직 한번도 전범위 복습을 해본 적은 없지만 곧 아카이빙할 겸 쭉 훑게 될 것이다. 그럼 무언가를 찾아내려나.
버스를 잡기 위해 내달렸다. 이제는 뛰어도 거친 호흡 너댓번이면 금방 돌아왔다. 물속에선 숨을 언제든지 쉴 수 없다는 압박감이 힘겨웠다. 반면 지상에선 어느 정도까지는 심박이 올라도 숨이 확실히 덜 찼다.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 들숨을 쉴 수 있었으므로. 걸림돌이라면 오른발 뿐이었다. 욱씬거렸다. 이러다 말겠지.
환절기도 지나버린 봄인데 기온이 오락가락한다. 체온도 쉽게 널뛰었다. 겹겹이 입었다 한꺼풀씩 걷어내고, 덧입기를 반복한다. 다시 글로 돌아간다. 원하는 만큼 알아낼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분위기가 꽤나 경쾌하다. 그간 왔던 회신에 비하면 뜀걸음 하는 어린아이처럼 가벼웠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망설임을 깨치고 나올 정도로 잘했다는 건가.
가끔, 아주 가끔은 내 생각도 할까. 말린 건어물 냄새가 훅 끼친다. 질겅질겅 씹고 싶다, 턱 아플 때까지. 이제보니 타코야끼 위 가쓰오부시와 데리야끼 소스 냄새의 혼합인 듯하다. 저녁을 걸렀을 뿐인데 음식이 주는 자극에 정신을 못 차린다. 단식하다보면 어느 임계를 뚫고 나갔을 시점에 머리가 확 시원해지는 순간이 온다. 아마 새벽녘이려나. 평소보다 후각이 예민하다. 위장이 아우성친다.
실존하는 인물인지 알아내고 싶다, 며 하소연했더니 너는 시간에 상징성을 부여하라 했다. 그때쯤 난 무얼하고 있을까. 당신은 어떨까. 내일의 나도 다 모르겠는데 몇 년 뒤를 어떻게 헤아리나. 다만 상상해본다. 불현듯 치고올라오는 첫번째 감정은 불안함이다. 만나게 된다면 이후로는 연락할 수 없게 되거나, 거절당한다거나……. 조커 카드만 쏙쏙 뽑아오고 앉았다. 툭 버려본다. 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면서 안좋은 상상을 우선하는가. 할 수야 있지. 좀 나중으로 미룬다면 좋을텐데.
숨을 길게 내쉬고 뱉는다. 뒷목이 서늘하다. 이런 것도 봄이라니. 곧 5월이다. 잠깐 숨고르는 사이 여름은 밀려들 것이다.
188
이름없음
2026/04/28 22:11:49
ID : hdRyJTWi5Ry
0
의미를 공들여 생각지 말라고 얼마나 많은 단어를 치환하고 삭제하는지 알고 싶다.
189
이름없음
2026/04/29 08:22:00
ID : mIIE7hxTRu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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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의점에 간다」 짧은 리뷰
그런 와중에도 누군가 죽고, 태어나고, 아프고, 울고, 웃는다는 게 기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도시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인간들은 그저 기계 부품처럼 정해진 궤적만 따라간다는 생각에 지배되었다가도, 다시 나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반대다. 도시는 멈추어 있고 사람이 움직인다. 행인이, 버스 안에서, 지하철에서, 카페 안에서, 오늘 본 사람을 내일 다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할 것 같은 그 ‘사람’들이 지탱하는 도시를 본다. 권태로울 수밖에. 지겹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틈바구니에서 꾸역꾸역 숨쉬겠는가.
『달려라 아비』 전체 리뷰
원룸이나 자취방이나 하숙과 같은 공동생활의 전경은 무척이나 일상적인 일이다. 생활에 밀착된 이야기를 써내려가면서도 흡인력이 있기가 참 어렵다. 김애란은 그걸 해낸다. 필사하지 않아 어렴풋 떠오르는 『안녕이라 그랬어』 「홈 파티」의 경우에도, 초대 받아 간 모임은 꽤나 있을 법한 사건이지만, 일상적 사건에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작가의 상상력과 통찰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우리에게는 무수히 비슷한 기회가 있다. 새로운 사람과의 합석, 뜻하지 않은 모임, 자기소개를 해야만 하는 시간들이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창작해낼 수 있는 역량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겠다. 『달려라 아비』는 그가 가진 힘의 원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
정확히 20년 전 서울이었음에도, 현재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분위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노크하지 않는 집」이나 「종이 물고기」 속 서울은 개인화된 생활방식의 일면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것이 지금의 서울과 유사하다 느껴지는 까닭은 시간이 멈췄다기보다는 너무 빨라 안에 있던 청년들만 계속해서 갈아치워지는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울을 떠났거나 서울에 얽매여있거나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 생기는 익명성, 고독감, 그리고 외로움 같은. 작품을 읽어내리다보면 나, 나의 근원, 부모님,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자아인 나에 집중하게 된다. “아버지, 아버지, 나는 어떻게”(「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생겨났는지 묻는, 복집에서 지리를 먹고 잠에 빠지면 안되는 소년처럼, 묻고 싶어진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어떻게.
어머니, 어머니, 그는 어떻게.
그리고 그에게, 그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생을 망가뜨리는 상상에 빠져 있던 내게 손을 내밀고 싶어진다. 가끔씩만 그러자고. 아주 가끔씩만.
190
이름없음
2026/04/30 14:34:22
ID : 1eHyFbhglx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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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3
다시 돌아갔다. 이번엔 등판에 차가운 손이 훅 달라붙었다. 자, 여기를 꼿꼿하게 해서 가봐. 마른 손이 딴딴한 벽처럼 느껴졌다. 어깨를 신경쓰라는 말과 함께 걸었다. 몇걸음 더 걸을랬더니 팔을 크게 휘두른단다. 어렵다고 했다. 안해서 그렇지 자꾸 해야된다고 그랬던가. 몇 번 더 반복하자 만족스러운지 이제 됐다며, 가보라는 말과 함께 들어가버렸다.
새하얘져 정보 처리가 지연됐다. 세수를 반복해야만 했다. 한번 오른 열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손이 몇 번 닿았다 떨어진 것 뿐인데 왜 더웠을까. 대혼란이었다. 한쪽에서는 감정카드를 여러개 펼쳐놓고 올바른 선택지를 고르기 위해 난리였고, 반대편에서는 기억을 저장하고 비디오테이프 형태로 변환하고 있었다.
260424
작년 10월의 너는 뭐라 말할까. 그게 “네/내”가 진짜 바라던 일이라고 말하며 웃나. 봄과 여름의 경계에 서 있다. 여름이 넘실거리며 다가옴을 느낀다. 햇빛을 강하게 쬔 아스팔트 위에서 어지럽게 일렁이는 아지랑이를 본다. 허상인 줄 알아도 시선을 빼앗긴다.
260429
손톱이 길어지고 있다. 애써 의식하고 있기도 하지만 불안도가 낮아지기도 했다. 입에 손이 갈 때마다 얼른 깨닫고 주머니에 넣어버린다. 고치기로 했으니 지켜봐야지. 이제껏 여러번 실패해왔다. 수능이 끝난 후 몇 달, 휴학 후 몇 달 정도를 긴 손톱으로 살아온 적도 있었으나 금세 버릇이 도졌었다. 이번엔 몇 달 가려나.
오늘도 빙빙 돌고 있을 지구 주위를 서서히 공전하고 있다. 손톱달부터 시작해 보름을 거쳐 삭까지.
그리고 오늘 아침
잠에서 깨며 문득 시간성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일어나자마자 꿈에서 계속 생각해왔던 것처럼 아— 하고 깨우쳤다. “오늘”이라. 그런 인사도 한 적이 있었나. 몇달을 건너 보낸 편지의 회신이었는데 오늘 건강에 유의하라 한다. 오늘, 이라, 그거 매우 현실적이고, 사실적이었다.
191
이름없음
2026/04/30 23:35:44
ID : mIIE7hxTRu6
0
거짓말 같았던 그날부터 두 해가 지나버렸다. () 어디서든지 보랏빛 생화향이 퍼져오면 당신의 천진한 목소리가 들린다. “라일락이다!” 어떻게 아세요? 라 물었더니 이런 향을 가진 꽃은 하나뿐이라고 했다. 덕분에 다음 해부터 길가에 핀 연보랏빛 꽃잎이 있으면 천천히 다가간다. 노래가사처럼 꽃이 지는 날 안녕, 해야 할까. 화자는 말한다. 이별은 기쁜 일이라고. 이제 하이얀 클라이막스를 넘겼으니 봄바람처럼 떠나자고.
장면이 바뀐다. 저 멀리 파란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가로선이 보인다. 그보다 가까이 흰 등대가 있다. 더 가까운 곳엔 당신이 수면 아래로 몸을 숙인 채 하염없이 무언가를 찾고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스노클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튜브에 온몸을 내버린 나는 풍경에 엮인 당신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는 확신과 함께 멍하니 당신이 손을 올린 튜브를 지켜보고 있다. 튜브 모양이 특이해서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인이 박일 듯했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지점이 오자 불쑥 본능이 치밀었다. 불안했다. 그때까지는 정말 물이 무서웠다. 실은 튜브에 반신이 떠 있어서 안 닿을 뿐이고, 일자로 서 있으면 충분히 발바닥을 디딜 수 있었다. 돌아보니 우습다. 트라우마가 참 짙긴 했었구나. 최근 연달아 물과 친해지고 있었다. 강습으로 모든 걸 배울 수는 없어 온라인 강사들과 엄마의 전언을 혼자 되씹으며 실험해본다.
그렇게 배면 뜨기와 자유형을 하나씩 해나갔다. 자유형에서 중요한 것은 호흡하는 타이밍이었다. 몸이 완전히 뜰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물을 밀어내며 속도가 붙는 잠깐 사이에 들이쉬어야 했다. 15m만 가도 쩔쩔매며 남은 숨을 몰아쉬지만 그래도 무척 좋았다. 쾌감으로 들어찬 폐에 얼른 공기를 밀어넣었다. 후하, 후하, 후하. 얼른 바다로 달려가고 싶다. 그러다 아쉬워한다. 그때 수영할 줄 알았더라면 좋았을걸.
양손 가득 캔 보말을 자랑하던 뿌듯한 얼굴빛이 기억에 남아 있다. 수영복을 챙기지 않아 러닝용 반팔에 반바지로 대충 들어갔는데, 물 밖으로 나오니 몸이 아주 무거웠다. 그래도 참 좋았던 시간이었다. 슬리퍼 직직 끌고 아침 산책하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고, 가까운 바다에서 송어가 팔딱팔딱 뛰는 이유에 대해 찾아보고,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돌아가던 시간이었다. 원주민은 죽어도 모를 맛집에 들어갔었고, 한톨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웠고, 부른 배를 통통 두들기며 나왔었다. ‘굳이’ 해안도로를 택해 멀리멀리 돌아갔으며, 소가 누워 있다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섬을 찍었으며, 원주민만 가는 관광지에 함께 다녀왔다.
그러곤 서울에서 다시 만난 게 이태 전이다. 돌려받은 지명에 대한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다. 어렴풋한 지식으로 고장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채무로 생각해왔는지 자연스럽게 역사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에서 뿌듯함이 전해졌다. 찰나의 순간, 그가 귀여웠다. 아니, 아니지. 멀리서도 향기만 맡고 라일락임을 알고, 물안에 빠져 있던 옷가지를 챙기는 모습들은 퍽 귀여웠다.
그리 될 줄 알고 옷을 두고 간 거였을까.
그렇다면 이제는 무어라고 연락해야 하는가. 내려갔더니 그 바다에 가보고 싶어서 갔고, 생각이 나더라고 할까. 실은 내가 바랐던 건 풍경이 아니라 당신이었다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여러 말을 손 안에서 굴리다 전부 지우고 잘 지내시죠? 요새 바쁘신가요? 문득 생각나서 연락드립니다. 라고 보낼 것이다. 무슨 책을 읽다 덮었더라, 잘 모르겠다. 샌드위치의 맛은 기억이 난다. 체할 뻔 했었으니. 리트리버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던 순간도 보인다. 계단을 오르다 헉헉대던 저질체력에 화나기도 했었더랬다.
192
이름없음
2026/05/01 13:04:18
ID : 0pQmoE2twNz
0
“그리고 문득, 누군가를 만나기 전 그 사람 이름을 먼저 알게 되는 건 위험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네모난 자리들, 김애란)
숙련된 청자의 스킬이라는 걸 모른 채 투정만 부렸다. , “그러다 하루는 힘을 빼고 썼더니 좀 기운이 없어보인다고 하고.” 웹서핑 중 만난 글귀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올바른 대답, 답장, 회신은 말꼬투리를 잡는 게 아니라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야만 한단다. 나는 주로 말꼬투리를 잡는 유치한 화자였다. A라는 일이 있었으면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고, 상대의 B에 대해 궁금해하는 식이었다.
반복 숙달을 통해 이뤄낸 성취겠지. 어쩌면 역할 바깥에 있을 때는 그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늦여름엔 1.1.7 정도의 버전업은 되어있으리라 믿는다.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다. 감정을 숨기는 훈련을 받은 자의 글귀를 읽어내려가며 어디까지 파악할 수 있을까. 실은 지금도 예전의 회신을 읽으면 끊어진 어절마다 숨 고르는 표정이 그려지곤 한다. 그러니까 당신은, 선생님은, 감추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제아무리 골몰해봐도 의문스러운 게 당연했다. 작정하고 수면 아래로 보내버리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 눈동자 너머, 감춰진 장막 뒤로 들어가 가만히 지켜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도 좋으니. 바닥에 털썩 앉아 의자에 기댄 등판을 멀거니 쳐다보았던 옛 시절처럼. 내게 필요한 건 단순한 고요였다. 익숙한 자가 펼친 결계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함께 공간을 점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래서 자꾸 꿈에 불러오나보다. 당신의 결계 안으로는 들어설 수 없으니 내 공간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다급히 옮겨적는 이유는 꿈의 장막이 무너지기 전에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정념은 빼고 결정체만 남겨놓으니 딱 그만큼이었다. 궁금하고, 알고 싶고, 결계 내부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들은 다 엊저녁 습관들에서 비롯된 거였다. 생존은 하고 있는지, 불건강하다면 왜인지, 어떤 오늘을 살고 있는지, 내일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가능하면 그 외에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직언은 아니었고, 우회로를 통해 언어가 전달됐다. 강제개행과 어절 사이 공백에서, 쓰려다 말았을 것 같은 숨겨진 문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궁금하다. 한 바닥에 쓰여진 작가의 말을 덮고 난 뒤 밀려오는 공허감을 털어낼 때, 세탁기가 깨끗이 빤 이불을 건조대에 널어놓을 때, 가만 누워 발가락과 발톱을 들여다볼 때. 생각난다. 양쪽 코를 모두 사용하여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혹시 그거 아는가? 사람들은 버릇처럼 한쪽 콧구멍만 사용해 숨을 쉰다는 사실. 물안에서든 지상에서든 호흡법을 단련하다보면 양쪽 모두를 써서 폐 가장 안쪽의 폐포에게까지 공기를 전달할 수 있다. 아마 그때쯤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완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랐을 것이다.
193
이름없음
2026/05/03 23:05:33
ID : i65hxXyZfQs
0
생각이 많아 자꾸 들락거린다. 글을 쓰다가 전부 지워버린다. 마음이 복잡하다. 어떤 의미인지 물었을 때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도망친 탓에 문제가 커졌다. 오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접고 모자를 썼다. 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하루종일 나른한 비가 내렸다. 이제 여름으로 들어서겠다는 선언처럼 토독토독 잘도 소리를 새겼다. 내일도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아직 머리 위 먹구름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어떤 의미인가? 작은 의미인가? 크다면 얼마나 큰가?
물속에선 이론과 행동이 충돌했다. 조금만 더 잘하고 싶었는데 숨을 원활히 쉬지 못하니 흐름이 툭툭 끊겼다. 시원찮았다. 몸통을 유연히 돌려야 하는데 발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가라앉는다. 숨 대신 물을 한바가지 들이켰다. 오기가 생겼다. 쭐래쭐래 전화했다. 폐활량을 기르는 훈련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남은 숨이 많은데도 쉬이 몸이 굳어버렸다. 호흡하려고 몸을 틀 때 발이 멈추기도 했다. 고칠 점이 많았다. 얼른 강사를 보고 싶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이라도 들려주었으면. 선행하지 마세요, 같은 말이라도.
이런저런 자료를 뒤적였더니 성과가 있었다. 혼자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자동적 사고를 받아적는 행위가 중요했다. 감정 구조가 빈약한 편이므로 부정적 생각이 훨씬 빨리 치고 올라오는데, 잠자리채로 휙 낚아채서 얼른 비합리성을 찾아 고쳐주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낚아채는 과정에 있었다. 불안이 활개칠 때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하기란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선생님의 언어를 본뜬 내가 정말 있다면 그 시점에 달려와야 하는 건데도, 그러진 않았다. 혹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는 감정의 변화를 원치 않는 걸까? 다 버려두고 웅크린 채 그림자에 본인을 가두길 바라는가?
실마리가 잡혀가고 있다. 구름이 걷히면 더욱 선명해지겠다.
194
이름없음
2026/05/04 12:20:08
ID : 0qZa6Y61wmp
0
맑다. 비틀린 마음까지 내리비추는 해가 기어이 떴다. 뭉게구름이 뿌듯한지 웃고 있었다. 눈을 맞대고 대들다 먼저 피해버렸다. 무슨 의미고 어떤 마음인지 뭐가 중요하지? 눈앞의 일부터 치워버리자. 시간이 없다.
아침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의 단골손님은 단연코 당신이었다. 고친거라곤 발목의 각도 하나 뿐이다. 그땐 완전한 팔자였었다. 지금은 십일자다. 아직도 큰폭으로 팔을 휘젓고, 어깨는 약간 굽어있다. 벽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전과 상이한 목표를 가지고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 나쁜 일만은 아닐 듯했다. 문제의 핵심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 중추를 담당하길래 간접경험으로 읽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지 알고 싶었다. 비행운의 진도를 못 뺀다는 사실이 꽤 충격이었다.
타이레놀 먹어가면서 읽어야할 정도의 고통을 느꼈었다. 차라리 꾀병이었으면 했다. 통증만이 진짜였다. 관자놀이를 날카롭게 뚫는 그 감각이 고작 텍스트 처리에서 기인한다는 게 웃겼다. 고작이 아닌가? 잊으려 했던 기억을 억지로 연상시킨 걸까? 두통은 단지 반작용일 뿐이려나.
새벽에 잠시 깼다. 꿈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메모했다. “06:56 / 편지 받는 꿈을 꿨다 / 이상하지 / 무난하게 동글동글한 일반 글씨”. 회색과 노란색이 어지러이 섞인 편지지에 검은 볼펜으로 2~3문장 정도 쓰여 있었다.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날 때 적었어야 했는데, 아쉽다. 마지막에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195
이름없음
2026/05/06 09:57:11
ID : ikk8paq7s2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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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만 들여다보지 말고 상대의 것을 보란 말이야. 실수를 반복해도 똑같이 굴고 있으니 따끔한 충고를 들어야 했다. 어떤 생각으로 돌려주는지 알면서 이기적으로 굴 거야? 화장실에서는 옆집의 알람소리가 울렸다 사라지고, 울렸다 사라진다. 마치 경보음 같다. 계속해서 귓가를 때린다. 성가시다. 하나씩 고치기로 했으니 이번에는 진짜 마음이 시키지 않는 방향을 택한다. 행동을 한 뒤 인지를 누더기처럼 기우면 된다. 이게 내가 믿는 일이고, 바랐던 거라고.
196
이름없음
2026/05/10 01:07:21
ID : nzQldzRxBhu
0
생각이 다시 많아졌다. 당신은 뭘까? 어떤 의미이길래 주지화를 써가면서 고민을 지연시키는가? 시간을 아무리 쏟아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사실 알아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이런 현상”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반복하면 몰라도. 열심히 밑밥을 깔았으니, 순진하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이제 다 안고 갈 수 없어. 그런 생각이나 했다.
나를 납득시키지 못할 바엔 도망쳐버릴까봐, 차라리. 손에 쥐지 못해 불안해하거나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기에는 인생이 짧았다. 발버둥치다 호흡 못하고 잠겨버리느니 나아가야겠어.
센서등이 제멋대로 점등을 반복했다. 어서 두꺼비집 스위치를 내려버리고 싶었다. 완전한 암흑으로 들어가버린다면 좋을텐데. 무작위 재생에서 나온 노래가 심정을 알맞게 대변하고 있었다.
“Hate that, Hate that, I hate that.” 싫어 죽겠다. 왜 이런 짓을 했지? 신경이란 걸 쓰지 않았어야 했다. 감정 판별에 오랜 시간을 들인다는 것도 알면서. 생각하면 병신되는 거 진짜 순식간인데—.
197
이름없음
2026/05/10 01:24:06
ID : BbyIFimHDxR
0
당신은 여기까지 읽고 꽃말을 짚어주며 앞으로는 반복하지 말라고 한 걸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렇게 사랑하고 그냥, 앞으로는, 좋아해도 괜찮은 사람들만 눈에 넣으라고. 그렇다해도 잔인하고 아니어도 미칠 지경이었다. 떠날 필요 정말 없었던 거 아닌가? 명치 아래에서부터 뜨끈한 응어리가 스멀스멀 만들어진다. 더 밀고 올라오기 전에 도망간다. 원망하고픈 에너지가 형성되면 안 되잖아.
그래도 밉다. 감정의 원천이 어디인지 알게 됐다. 전이 맞잖아. 건강한지 목숨걸고 물어보는 이유 뭐겠어. 묻지 않아도 알고 있다. 차라리 원형으로 존재했다면 옮겨갈 마음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당신이 보고싶어. 지금도. 가쁜 숨 쉬며 횡단보도 빨간불이 되기 직전, 인도에 왼발을 붙여줘. 엄지손가락이 떨린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형형색색의 꽃잎을 보며 해맑게 웃어달란 말이야. 왜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된 거지? 가끔 뒤를 돌아본다. 너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도대체 어떤 계기가 퍼펙트 텐에 화살을 꽂다못해 관통시켰느냐고. 나는 묻는다. 너는 말이 없다. 단지 당신의 그림자 안에 몸을 웅크린 채 앉았다. 그게 네 자리였지. 내가 그토록 바라던 자리다. 당신이 만든 응달이 좋았다. 상상만 해도 평온하다. 차가운 벽이 주던 기묘한 안정감. 5, 4, 3, 2, 1……. 해사한 표정으로 웃는 얼굴을 상상했더니 응어리가 저절로 뭉개져 혈관 너머로 사라졌다. 지연시키자. 이 새벽녘에 고민 좀 한다고 풀릴 거였으면 진작에 해결될 일이었다.
198
이름없음
2026/05/10 15:40:16
ID : 4LbBgo5gnXz
0
백일몽인가, 싶다.
199
이름없음
2026/05/11 12:01:19
ID : 9ButBs7cLgp
0
경계를 끊임없이 의식해야만 한다. 잠시 느슨해졌을 뿐이다. 정신 차리자.
200
이름없음
2026/05/12 12:24:01
ID : RvfQljze6i2
0
궁금하니까, 의 너머에 있는 진짜를 마주했다. 의존을 강화하려고 만나자고 하고픈거다. 그건 정석이 아니다. 손을 느슨하게 만들어야 된다고 그랬잖아. 옳지 않은 욕망과의 가위바위보에서 영원히 져줄 셈인가? 이겨야지. 그 욕망은 어린 내 모습을 하고 있었다.
201
이름없음
2026/05/14 07:15:53
ID : oIKZimHBgph
0
260413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그곳으로,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함부로 눈을 뭉쳤다. 손끝이 차다 못해 타오르고 있다는 착각이 일었다. 뜨거웠다. 전기장판에 손을 아무리 녹여도 감각이 다 돌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아침 햇살에 눈이 자취를 감출까 허겁지겁 뛰어나가 멀건 눈으로 지켜봤다. 결국 녹아내렸다.
왜 나아지지. 내 슬픔, 그리움, 사실 다 원형으로 껴안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260414
보고 싶어, 라고 말하는 문장 끝에 누가 오는지 지켜본다. 진짜 걔가 보고 싶어? 아닐걸.
260417
아찔한 감각이었는데 말이지. 회상해보면, 공연이 끝나고 난 뒤 여운과 소식이 겹쳐 굉음을 내며 터진 것이었다. 감각이 없다고 느껴지는 지경에 더 빨리 올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화가 난다는 감정은 이차적이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어떤 카드를 뽑을 것인지 무의식 중에 고르게 된다는 거다. 익숙한 감정일수록 선호하게 되어 부지불식간에 분노를 뽑아드는 경우였는데, 정말 그럴 일인지 물으면 된다.
이게 화 낼 일이야?
260423
하도 보고싶어하니 정성에 감응해서 타이밍 맞춰준 건가. 그런 생각이 짧게 나를 치고 지나갔다.
이미 감정에 깊이 잠겨 있어 판별이 어려웠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었나. 돌아가고 싶다. 돌려보고 싶다.
260430
상상의 물망초도 피워본다. forget-me-not. 잊히는 즉시 부재니까. 잊지 말라고, 생각해달라고.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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