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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6 23:36:33 ID : 9z9jBxXy7y2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인가.' 달리 말하면, 도대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얼마나 지독한 '연습'을 반복해야 하는가. -김승옥/생명연습 해설 16p
2019/08/16 23:52:39 ID : 9z9jBxXy7y2
김승옥의 등단작인 생명연습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본격적으로 던지기 전에 일단 다음과 같은 예비 물음을 묻고 있는 소설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인가.' 달리 말하면, 도대체가 '생명'을 유지하기위해서 인간은 얼마나 지독한 '연습'을 반복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 그래서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지금 살아 있는 인간들'에 대한 섬세한 관찰일지다.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눈썹까지 밀어버리고 등산모를 쓰고다니는 어느 대학생,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하나님의 명을 받아 자기 성기를 잘라버린 전도사, 서른둘밖에 안 된 나이에 얼굴에 "수많은 그늘"을 겹겹이 쌓고 있는 만화가 '오 선생', 그리고 시시한 유행가나 흥얼거리고 다니지만 알고 보면 대단히 진지한 태도로 여자들을 하나하나 "정복"해나가는 중인 친구 '영수',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것이 뭘까 하고 물었더니 당돌하게도 "여신의 멘스"라고 답하는 한교수의 어린 딸 등등. 최근 엘리자베스 시대 비극작가들에 대한 논문을 완성한( 즉, 삶의 비극성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이런 이들을 가리켜 "자기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자기 세계'라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몇 명 나는 알고 있는 셈이다. '자기 세계'라면 분명히 남의 세계와는 다른 것으로서 마치 함락시킬 수 없는 성곽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성곽에서 대기는 연초록빛에 함뿍 물들어 아른대고 그 사이로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을 불러일으켜보는 것이지만 웬일인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 세계'를 가졌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가 그 성곽에서도 특히 지하실을 차지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 지하실에는 곰팡이와 거미줄이 쉴새없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는 모두 그들이 가진 귀한 재산처럼 생각된다. (16쪽) 김승옥은 자아, 주체성, 세계관, 신념, 콤플렉스 등등으로 번역될 여지를 고루 갖고 있는 '자기 세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자기 세계'는 하나의 성곽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계의 부조리와 무의미에 노출되었을 때 자아가 붕괴되는 비극을 막아준자. 자주 인용되는 위 대목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비록 그 자기 세계라고 하는 것이 화사한 "정원"이라기보다는 침침한 "지하실"에 가까운 것이라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 그런데 이 소설의 더 중요한 취지는 '자기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의 지난함을 이야기 해보자는 쪽에 있다."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이 한마디로 얼마나 기막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말과 더불어 이 소설은 두 가지 핵심 에피소드를 번갈아 들려주기 시작한다. 하나는 젊은 날 한교수의 이야기. '유학이냐 결혼이냐'라는 선택지 앞에서, 사랑하는 여자의 육체를 연거푸 범한 이후 그녀에 대한 애정이 차갑게 식자, 비로소 유학을 결심할 수 있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나'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홀로 세 남매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녀가 사내를 집에 들이기 시작하면서 형과 어머니 사이에 오이디푸스콤플렉스적 갈등이 벌어졌고 결국 형은 목숨을 버렸다는 것. 한교수가 결국 자기 세계를 형성하면서 살아남는 데 성공한 사례라면 (물론 그의 자기 세계 안에는 '죄책감'이라는 "곰팡이와 거미줄"이 가득하겠지만), '나'의 형의 경우는 결국 삶의 부조리와 무의미에 좌초해버린 사례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세계는 한번 구축되면 그것으로 끝인가. 구출하는 일도 어렵지만 유지하는 일도 그만큼 어려울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한교수는 과거자신이 버린 여자가 어제 죽었는데 빈소에 가봤자 눈물이 날 것 같지 않으니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나'는 생각한다. "옳은 말씀이다. 이제 와서 눈물을 뿌린다고 해서 성벽이 쉽사리 무너져날 것 같지도 않"다. 이 말에 냉소의 기운이 배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고 말할 수는 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철옹성 같은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상적인 연민따위는 버려야 한다는 얘기인 것이니까.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쉬운가. 순수한 청년기의 영혼일수록 내적 갈등에 시달릴 것이다. 여기서 김승옥 문학의 청년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그는 '순수 아니면 타락'이라는 양자택일로 받아들인다. 순수한 자는 위선이 싫어 위악을 행하다가 환멸을 느끼며 자살하고, 타락한 자는잠시 동안 고민하는 척하다가 타락한 시대의 타락한 가치를 받아들이면서 살아남는다. (김승옥의 젊은 주인공들이 종교적 초월이나 정치적 혁명의 가능성을 논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다. 자살의 길과 속화의 길. -김승옥/생명연습 471p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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